주체109(2020)년 12월 29일 로동신문
성스러운 주체혁명사와 더불어 영생하는 충신들 혁명투사 김운신동지의 한생에서
항일혁명투사들은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부모처자의 곁을 떠나 긴긴 세월 풍찬로숙하면서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청춘도 생명도 아낌없이 바쳐싸운 참다운 애국자, 혁명가들이다. 하다면 그들의 가슴마다에 깊이 간직된것은 과연 무엇이였는가.
그것은
이런 투철한 신념을 지니고 항일의 혈전만리를 웃으며 헤친 열혈투사들속에는
《항일혁명선렬들은 모두가 조국과 혁명에 무한히 충실한 참다운 혁명가들이였습니다.》 력사적인 동강회의후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일대에 새로운 형태의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한 준비사업이 한창이던 주체25(1936)년 어느날이였다.
백두산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있던 김운신동지는
조국땅으로 향하는 김운신동지의 가슴은 세차게 높뛰였다.지나온 나날이 주마등마냥 떠올랐다.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여나 어린시절부터 등뼈가 휘도록 고역살이에 시달리던 일이며 늙은 어머니와 시집온지 겨우 두달밖에 안되는 안해를 집에 남겨두고 총을 잡던 일,
정녕 그가
김운신동지는
산짐승들도 길을 잃는다는 천고의 원시림지대에서 밀영후보지를 탐색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김운신동지는 온갖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밀영의 위치를 잡기 위한 결사적인 투쟁을 벌렸다. 백두산일대의 험한 산발들과 골짜기들을 샅샅이 누비던 그들은 드디여 소백수골을 찾아냈다. 그야말로 명당자리였다.소백수골에서 서북방향으로 40리가량 되는 곳에는 백두산이 솟아있고 20리쯤 되는 지점에는 선오산, 동북방향으로 15리정도 떨어진 수림속에는 간백산이 각각 솟아있었다. 천산만악을 거느린 백두령봉의 갈피속에 자리잡은 골짜기인것만큼 골도 깊고 산세도 험하여 적들이 수월히 범접할수가 없었다. 소백수골은 그 뛰여난 경개와 천험의 요새다운 지세로 하여 사령부밀영으로서는 그저그만이였다. 이렇게 되여 소백수골에 밀영이 꾸려지게 되였으며 백두산밀영은 조선혁명의 본거지로, 중심적령도거점으로 되였다.
《백두산밀영과 그 주변밀영들이 있는 곳을 속속들이 알고있은것은 김주현과 김해산, 김운신, 마동희와 같이 련락임무를 도맡다싶이 했던 몇몇 사람들과 소수의 지휘성원들뿐이였다.》
이렇듯 김운신동지는 백두산을 타고앉아 당조직건설과 통일전선운동을 확대발전시키고 전민항쟁준비를 강력히 추진시키시려는
김운신동지는 여러차례 중요한 적후공작임무를 받고 장백일대에 파견되여 활동하였다. 어머니와 안해가 살고있는 우럭골을 지날 때마다 잠간만이라도 집에 들려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지군 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김운신동지의
가렬한 전투와 행군으로 낮과 밤이 흘러가고있던 주체26(1937)년 여름 어느날
조선혁명사에 아로새겨진 그의 위훈과 투쟁업적은 오늘도 우리 인민의 가슴마다에 삶의 참다운 행복과 영예는
본사기자 심철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