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1월 20일 로동신문
당 제8차대회가 제시한 위민헌신을 실천의 구호로
사회주의건설의 새로운 고조기, 격변기가 도래한 장엄한 력사의 분수령에서 우리 당은 일심단결, 자력갱생과 함께 이민위천의
하다면 혁명의 지휘성원들인 우리 일군들에게 있어서 인민을 하늘처럼 여기는 자세와 립장은 어떤 실천행동으로 발현되여야 하는가.
《일군들은 인민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야 합니다.》 위민헌신은 말그대로 인민을 위하여 몸바쳐 일한다는 뜻이다.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제 와서 새롭게 깨닫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실천은 언제나 어렵고 누구나 하나같지 않다. 인민을 하늘처럼 여기는것만큼 인민에 대한 헌신은 그 열도와 높이에 있어서 아름찬 크기를 요구하며 완강하면서도 지속적인 노력을 전제로 한다. 바로 그런 헌신을 통해서만 우리 일군들은 인민에 대한 충실성을 검증받을수 있으며 이민위천을 변함없는 투쟁의 기치로 내세운 당앞에 무한히 고지식하고 떳떳한 전사로 나설수 있다. 위민헌신은 자신이 다름아닌 인민의 심부름군이라는것을 자각하는것으로부터, 그것을 더없는 영예로 여기는것으로부터 첫걸음을 내짚게 된다. 만약 자신을 인민보다 우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인민을 위하여 몸을 바칠수 없다. 혁명가는 인민과 꼭같이 혹은 그보다 더 호강하게 지내기를 바랄수 없다.자기가 고생하는 대가로써만 인민이 락을 누릴수 있다는것을 각오하고 그 숭고한 본분앞에 언제나 성실한 사람이 바로 인민의 심부름군이다. 그렇다면 인민의 심부름군에게 남는것은 과연 무엇인가. 혁명가는 그것을 보람이라고 말한다.비록 그지없이 소박한 두 글자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칭호와도 같이, 가장 값비싼 재부와도 같이 그 부름을 소중히 여긴다. 혁명의 승리를 위해 준엄한 적후투쟁의 길에서 위훈을 세운 투사를 원형으로 하여 창작된 어느 한 예술영화에는 한 녀인과 주인공이 나누는 이런 대사가 있다. 《…이젠 선생님마저 집을 잃고 이렇게 거리에 나앉게 되지 않았습니까.그래도 행복이 찾아올가요?》 《난 행복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삶의 보람을 약속했지요.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민의 행복을 위해서 싸우기때문에 우릴 공산주의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걸 누가 알아줍니까?》 《…혹 누가 모른다고 해도 그자신이 알게 아닙니까.이게 삶의 보람이지요.》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열혈혁명가들이 영화의 주인공이 말한 그런 값높은 보람을 위하여, 인민의 행복넘친 웃음을 위하여 한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바쳐왔던가. 위민헌신의 길에서 혁명가가 가장 희열에 넘쳐 맛보는것은 보람뿐이지만 인민은 그런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을 주고 당과 조국은 죽어서도 영생하는 고귀한 삶을 주었다. 항일의 투사들과 전화의 영웅들, 당의 기초축성시기 일군들, 고난의 행군시기와 더불어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일군들을 비롯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헌신분투한 참다운 혁명가들은 영원히 후대들앞에 삶의 거울로 남아있다. 종업원들의 생활보장을 위해서는 밤낮없이 뛰여다니며 훌륭한 창조물들을 수많이 일떠세웠어도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긴것이 없이 혼솔이 다 닳은 내의차림으로 눈을 감은 흥남비료련합기업소 당책임일군, 자기 대에는 덕을 보지 못해도 인민들에게 복이 되면 그만이라는 고결한 진정을 안고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치산치수사업에 아낌없이 노력을 바쳐온 회창군과 성천군, 운산군의 일군들을 비롯하여 오늘도 인민의 참다운 복무자들은 시대의 선구자로 존경받고있다. 지금이야말로 이들처럼 당과 국가의 고민과 걱정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 피타게 애쓰는 일군, 오직 혁명밖에, 일밖에 모르고 인민을 위해 무엇인가 해놓겠다고 뛰여다니는 일군, 과업을 맡겨주면 눈에 띄게 일자리를 푹푹 내는 일군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인민을 위한 헌신적복무의 길은
당 제8차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나는
우리
전당이 위민헌신하자! 본사기자 리 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