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1월 25일 로동신문
애국의 화원을 가꾸는 길에 한생을 바친 이역의 참된 교육일군 재일본조선인교육회 회장이였던 윤덕곤동지에 대한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60년전에 세상을 떠난 총련의 교육일군이 있다.재일본조선인교육회 초대회장이였던 윤덕곤동지이다. 자랑스러운 람홍색공화국기가 펄펄 휘날리는 교정에서 자라나 중앙본부로부터 분회에 이르는 총련의 각급 조직들과 애국의 여러 초소들에서 활약하고있는 무수한 사람들의 성장에는 민족교육의 화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길에 한생을 바친 윤덕곤동지와 같은 교육일군들의 헌신적노력이 깃들어있다. 하기에 재일동포들이 오늘도 잊지 못해하는 총련의 1세일군들의 전렬에는 그의 이름이 있다.
《우리 공화국의 건국과 수호, 기적과 번영의 성스러운 발전행로속에는 머나먼 이역땅에서 람홍색공화국기를 창공높이 휘날리며 애국애족의 선각자, 애국충정의 모범, 세계해외교포조직의 본보기의 영예를 떨쳐온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의 고귀한 피와 땀이 뜨겁게 스며있습니다.》 재일조선인운동사는 곧 민족교육발전의 력사라고 할수 있다.
조국이 해방된 후 절세의 영웅
우리 조선민족이 민주주의 새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힘을 합칠 때는 왔다고 하시면서 각계각층 인민들은 누구나 다 애국적열성을 발휘하여 새 조선건설에 떨쳐나서야 한다고 하신
그이의 열렬한 호소따라 재일동포들은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할 불타는 열의 안고 애국운동에 용약 떨쳐나섰다. 그 첫 사업이 바로 일제에게 빼앗겼던 우리 말과 글을 되찾고 자녀들을 어엿한 조선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민족교육사업이였다. 국어강습소의 명칭을 단 교육기관들이 일본땅 곳곳에 세워졌다. 당시 그 누구라 할것없이 동포들의 생활이 가난하고 비참한것으로 하여 교사라는것은 비바람이 스며드는 창고같은 건물들이였고 책걸상들과 칠판 등 교구비품들도 산지사방에서 모아온 낡은것들이였다.하지만 누구도 락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 어떤 고생을 무릅쓰고라도 자녀들을 공부시켜
그때 일본땅에서 우리 학교설립에 앞장선 선각자들속에는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 도꾜도 이따바시지부 위원장이였던 윤덕곤동지도 있었다. 조국이 해방된 그해 초겨울 이따바시조선초등학원(총련 도꾜조선제3초급학교의 전신)이 세워졌다.일본에 있는 조선학교들중 력사가 오랜것으로 꼽히는 이 학교를 일떠세운 사람이 바로 윤덕곤동지였다. 비록 유리창 하나 변변한것 없는 낡은 판자집교사이지만 우리 말과 글을 배우니 정말 좋다고 웃고 떠드는 아이들, 그 순진한 모습을 눈물겹게 바라보는 윤덕곤동지의 뇌리에는 한창 배울 나이에 지주집 머슴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자기의 비참한 지난날이 떠올랐다. 《을사5조약》이 조작된 이듬해 북변의 한 농가에서 태여난 윤덕곤동지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향학열이 높았다.하지만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그로 인한 극심한 가난은 불행한 식민지소년에게서 배움의 꿈을 앗아갔다. 소학교공부를 몇해 못해보고 지주집머슴으로 끌려가게 되였을 때 그의 가슴속에는 피눈물이 고이였다.어떻게 하나 공부해보겠다고 스무살때 이역땅으로 건너갔지만 차례진것은 죽음의 고역장에서의 노예로동뿐이였다. 식민지조선인이라는 한가지 리유로 모진 민족적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던 우리 동포들이였다. 그 참담한 나날을 돌이켜보며 그는 학생들에게 절절하게 말하였다.
《이제는 우리에게 참다운 조국이 있습니다.
우리 학교는 학생들에게 지식만을 주는 단순한 배움터가 아니라 그들을
하기에 그는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며 지혜있는 사람은 지혜를 내여 우리 학교를 세우자!》라는 구호밑에 학교건설사업이 전동포적인 운동으로 힘있게 벌어지도록 하는데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민족중등교육의 맏아들학교로 이름높은 총련 도꾜조선중고급학교의 설립도 그가 일본당국의 횡포하고 로골적인 방해책동을 짓부시고 이루어낸것이였다. 아직은 미흡한 점이 많았지만 우리 학교들은 재일동포들의 가슴마다에 애국의 신심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굳건한 정신적보루, 강력한 거점이였다. 재일조선인들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일본반동들은 우리 동포들이 애국의 념원을 안고 세운 학교들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탄압, 파괴하려 들었다.사나운 파쑈의 광풍속에서 민족교육은 모진 시련과 난관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력사에 4.24교육투쟁으로 기록된 민족교육권리사수투쟁의 앞장에서 윤덕곤동지는 주먹을 부르쥐고 견결히 싸웠다.그 나날 철창속에 갇히기도 하였지만 그의 애국의 신념은 변함없었다.
당시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사업은 매우 어려운 형편에 있었다. 제일 심각한것은 자금문제였다.걸음걸음 제기되는 자금문제때문에 윤덕곤동지의 머리칼은 때이르게 희여지고 얼굴의 주름살은 펴일새가 없었다. 이러한 때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감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윤덕곤동지는 즉시 가까운 한 학교로 달려나가 강당에 모인 교직원, 학생들에게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웨치였다.
《나라에서 돈을 보내여왔습니다.
순간 장내에 깃든 숨가쁜 정적, 뒤이어 터져오른 우뢰같은 박수소리, 감격의 환호성… 연단에 선 윤덕곤동지의 눈에서는 뜨거운것이 좔좔 흘러내리였다. 어려웠던 나날이 격정속에 돌이켜졌다. 차디찬 방에서 곱아드는 손가락을 입김으로 녹이며 우리 말 교과서를 한권한권 만들고 눈물겨운 돈 한푼한푼을 모아 판자집교사의 지붕이나마 얹으며 쓰라린 가슴을 달래던 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복구건설을 다그치고있는 조국에서 돈을 보내여올줄을 우리 동포들중 과연 그 누가 꿈결에라도 생각해보았겠는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윤덕곤동지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많은 나라들이 해외동포들을 《민족의 파편》으로 여기고 외면하는 이 차거운 세계에서 해외동포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막대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까지 보내주어 자기 민족의 영원한 아들딸로 키우는 은혜로운 사랑의 이야기는 오직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도 그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그러는 아버지를 보며 어리둥절해하는 어린 자식들을 품에 안고 윤덕곤동지는 속삭였다.
《슬플 때보다 기쁠 때 눈물을 더 많이 흘릴수 있다는것을 이 아버지는 처음 알았구나.정말 우리
기세충천한 윤덕곤동지는
조선학교들이 놀라운 모습으로 일신되는 광경에 일본반동들은 아연실색하였다.
태양의 빛발아래 이역의 어지러운 잡바람이 스며들지 못하는 청신한 교정에서 배움의 글소리 랑랑히 울리며 민족의 넋을 새겨안고 희망의 나래를 활짝 펼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윤덕곤동지는
제일 어려운 분야인 민족교육사업을 맡았지만 그는 한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자기 한몸을 바치였다.그의 애국의 신념은 언제나 굳건하였다.
총련결성직후 일군들속에는 일본반동들의 가혹한 탄압과 모진 생활난의 후과로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 사실을 료해하신
이 사랑의 불사약을 받아안은 사람들속에는 윤덕곤동지도 있었다.
침상에서 억만금에도 비길수 없이 귀중한 보약재들을 받아안은 그는 끓어오르는 격정과 다함없는 감사의 정에 넘쳐
은혜로운 사랑에 천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애국의 일념으로 가슴 불태운 그는 늘 동포들속에 들어가 민족교육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해설선전하고 우리 학교의 물질기술적토대를 튼튼히 꾸리기 위한 방도들을 진지하게 토의하면서 그들모두를 민족교육의 강화발전을 위한 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업무량이 제일 많은 윤덕곤동지를 위해 총련중앙상임위원회에서는 승용차를 한대 마련해주었다.그런데 그것을 타고 일본땅 곳곳을 얼마나 메주밟듯 하였는지 한달이 멀다하게 차바퀴가 터져나가군 하였다. 당시 동포가정들에서는 살림이 어려운 속에서도 온 가족이 1년에 한번정도는 소박한 들놀이를 하는것이 관습처럼 되여있었다. 하지만 윤덕곤동지의 가정만은 례외였다.일밖에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자식들의 철없는 투정질이 마음에 걸린 윤덕곤동지의 안해가 몇번이나 재고재다가 휴식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값눅은 음식점에서 식사라도 한번 하자고 남편에게 청하여 승낙을 받은적이 있었다. 그날 자식들은 신새벽부터 마음이 들떠 노상 시계만 쳐다보았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아버지는 약속한 점심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갑자기 제기된 학교사업으로 윤덕곤동지는 모처럼 자식들과 한 약속을 지킬수 없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목빠지게 기다리다가 그만 울가망이 되였다. 그날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집에 돌아와 몹시 미안해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자식들은 로인이 된 오늘도 잊지 못한다. 윤덕곤동지는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그렇지만 남을 위해서는, 동포들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서는 가만 못 있는 성미였다.총련 조선대학교에 입학한 한 녀학생에게 남모르는 고충이 있다는것을 알고서는 주저없이 자식들이 오골오골한 자기 집에 데리고와 한두달도 아니고 대학 전기간 보살펴준 사실도 있다. 민족교육과 우리 학교에 대한 윤덕곤동지의 사랑과 헌신은 참으로 뜨겁고 열렬한것이여서 동포들 누구나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어느해 도꾜지역 조선학교 학생들의 가을철운동회가 열리였을 때의 일이다. 수만명의 교직원, 학생, 학부형들이 모여온 이 운동회에서 인기종목은 사람찾기였다. 이 종목에 제일 많이 뽑힌 사람이 바로 윤덕곤회장이였다. 자기가 지명되면 그는 신발까지 벗어던지고 아이들과 뛰였다.함께 뛰던 학생이 떨어지면 아예 업고 달리여 기어이 결승테프를 끊군 하였다.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여 초대석에 돌아와 숨을 돌리다가도 《윤덕곤회장선생님!》 하고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기쁨의 미소지으며 또다시 달려나가군 하였다. 민족교육과 더불어 애국의 첫 자욱을 뗀 윤덕곤동지는 생의 마무리도 그 길에서 빛나게 하였다.
주체50(1961)년 9월 조선로동당 제4차대회에서 하신
사실 그때 그는 중병으로 침상에 있었다.절대안정하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만류도 뿌리치고 그는 애국의 길을 재촉하였다. 이것이 총련일군들이 마지막으로 본 윤덕곤동지의 모습이였다.
한생을 묵묵히 애국의 뿌리가 되고 밑거름이 되여 민족교육의 화원을 가꾼 윤덕곤동지, 태양의 따사로운 품속에서 그는 이역의 참된 교육일군으로 영생하고있다. 본사기자 허영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