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3월 2일 로동신문

 

조국과 나의 가정

중구역 동안2동에 살고있는
성순경전쟁로병이 들려준 이야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오늘 우리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 청년들은 혁명의 전세대들이 피로써 개척한 주체의 길을 따라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과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한 보람찬 투쟁을 벌리고있으며 보다 창창한 미래에 대한 확신에 넘쳐있다.》

얼마전 우리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의 한 학술연구원으로부터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대전해방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전투에서 휘날렸던 공화국기발을 새로 전시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그 공화국기는 한 가정에서 70여년세월 가보로 물려온것이였다.

우리는 그 기발에 깃든 사연을 알고싶어 중구역 동안2동에 살고있는 성순경전쟁로병의 집을 찾았다.

지나온 수십년세월을 돌이켜보는 성순경전쟁로병의 눈에는 짙은 회억의 빛이 어리였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그는 이렇게 이야기의 첫머리를 떼였다.

《그 공화국기발은 저의 남편이 아버지에게서 넘겨받아 조국해방전쟁의 전기간 휘날려온것이라고 합니다.

남편은 늘 그 기발을 보며 지나온 나날을 돌이켜보았고 자식들이 조국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도록 가르치군 하였습니다.》

공화국기발을 휘날리며 전화의 포연을 헤쳐온 전쟁로병 강성익동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우리는 그의 안해인 성순경전쟁로병으로부터 기발에 깃든 사연에 대해 들을수 있었다.


* *


《산천도 노래하라 이날의 감격을 조선은 빛나는 인민의 나라다》라는 노래소리가 온 조국강산을 진감하던 공화국창건의 그날 당시 10대의 어린 나이였던 강성익은 아버지가 흰 광목천에 물감을 들여 만든 공화국기발을 처음으로 보았다.

《자, 보아라.우리 나라 기발이다.이젠 우리에게도 우리 나라 기발, 공화국기발이 있다.》

마치 온 세상을 다 안은듯 람홍색국기의 기폭에 얼굴을 묻으며 기쁨에 울고웃던 그 모습…

그때로부터 수십년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려진 사실이지만 강성익의 아버지 강한필은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해방구상을 높이 받들고 항일혁명투쟁에 참가하였던 반일애국렬사였다.해방후 자기의 투쟁공적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아버지는 농민들을 새 조국건설에로 불러일으키는 사업에 모든것을 바치였다.

그때부터 그의 가정에서는 명절날이면 온 식구가 집마당에 모여 공화국기발을 띄우군 하였다.나라에 바칠 애국미를 싣고 가던 길에서도 강성익의 아버지는 공화국기발을 휘날리며 앞장에서 달구지를 몰아갔다.

공화국기발은 그들가정에 있어서 희망과 행복의 상징이였다.

원쑤들은 우리 인민들에게서 그리도 소중한 공화국기발을 빼앗으려고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불구름이 밀려오던 때 강성익은 나이를 불구어서 인민군대에 입대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품속에 사연깊은 공화국기발을 넣어주며 이렇게 당부했다.

《이 기발은 설사 목숨이 진다 해도 절대로 원쑤들에게 빼앗겨서는 안된다.》

강성익은 용감하게 싸웠다.력사에 현대포위전의 빛나는 모범으로 자랑스럽게 아로새겨진 대전해방전투에서도 그는 아버지가 품에 넣어준 공화국기발을 휘날리며 싸웠다.전투에 전투를 거듭하던 나날 《나는 죽어도 이 조국의 강산은 영원무궁하리라! 동무들아, 우리 조국을 길이 지키라!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로동당 만세!》를 웨치며 한목숨바친 전우들의 붉은 피도 그 기발에 슴배였다.

심한 부상을 당했을 때에도 그는 람홍색기발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끝끝내 일어났다.

피로 물들일지언정 결코 내리울수 없었던 공화국기발은 어버이수령님 안겨주신 기름진 땅이였고 배움의 종소리 정답게 울리던 학교였으며 목숨과도 바꿀수 없는 사랑하는 내 조국이였고 존엄이였고 승리였다.

전후에 제대된 강성익은 총알자리들이 력력한 공화국기발을 소중히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그것은 그 어떤 훈장이나 표창보다도 귀중한것이였다.

승리자가 되여 돌아온 아들이 소중히 포개여 내놓은 공화국기발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싸움터로 떠나갔던 강성익의 형들중 한명은 전사하였고 한명은 영예군인이 되여 돌아왔다.그러나 아버지는 결코 슬퍼하지 않았다.자식들이 조국을 위해 장한 일을 하였기때문이였다.목숨보다 소중한 조국을 지켜 용감히 싸웠고 공화국기발앞에 떳떳하게 살았기때문이였다.그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공화국기발을 강성익에게 물려주었다.자손들이 대대로 그 기발을 물려주며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해 모든것을 바칠것을 부탁했다.

강성익은 한생을 나라의 동맥인 철도부문에서 일해오며 아버지의 당부대로 살기 위해 애썼다.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포연서린 공화국기앞에 마음을 세워보며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성실히 일했다.

집을 떠나있는적이 많았던 그는 출장길에서 돌아오면 어김없이 그 기발을 펼쳐보며 조국을 받드는 길에 변함이 없을것을 마음속으로 맹세다지였고 여러번 이사를 갈 때에도 그 기발을 제일먼저 품속에 안고갔다.

자식들이 성장하여 소년단에 입단하고 또 청년동맹원이 되는 날이면 강성익은 어김없이 그 기발앞에서 할아버지세대와 아버지세대가 어떻게 공화국기발을 지켜왔는가를 이야기해주군 하였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들인 강무광이 조국보위초소로 떠나게 되였다.강성익은 사연깊은 공화국기발을 아들의 품에 넣어주며 당부했다.

《조국이 있고서야 가정의 행복도 있고 너희들의 밝은 앞날도 있다는것을 항상 명심하기 바란다.》

이런 당부를 안고 강무광은 군사복무의 나날을 위훈으로 이어왔다.훈련의 참기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마다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공화국기발을 펼쳐보며 그 기발앞에 떳떳하게 살리라 맹세를 다지였다.

해방후 공화국이 창건되던 그날 할아버지가 띄웠던 공화국기발, 전화의 나날 아버지가 높이 휘날렸던 그 기발을 아들이 대를 이어 자랑스럽게 휘날렸다.

제대후 당의 품속에서 대학을 졸업한 강무광은 청년동맹일군을 거쳐 당일군으로 사업하고있다.

강무광이 제대된 후 그 기발은 인민군대에 입대하는 강성익의 조카의 아들들에게 전해졌다.그들도 할아버지세대처럼 살리라 굳은 맹세를 다지며 공화국기를 가슴에 품고 조국보위초소를 굳건히 지키였다.

오늘은 사연깊은 공화국기발을 언제나 마음속에 안고 성장한 강무광의 딸도 주체과학교육의 최고전당인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며 앞날의 조국을 빛내일 꿈을 키워가고있다.

두해전 1월 온 나라에 가요 《우리의 국기》가 높이 울려퍼지던 날 강무광의 온 가족은 집안의 가보인 공화국기앞에서 노래를 따라불렀다.

 

우리의 람홍색기발 창공높이 날릴제

바라보며 높뛰는 심장 애국의 피로 끓어라

거세찬 펄럭임에 조국의 숨결 어리고

목숨처럼 소중한 기폭에 인민의 운명 실었네

사랑하리라 빛나는 우리의 국기를

나붓겨다오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노래의 구절구절을 새기는 그들의 뇌리에는 잊지 못할 하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느해 공화국창건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강성익은 전쟁때 입은 상처가 도져 그만 병석에 눕게 되였다.명절날이면 살림집창가에 사연깊은 공화국기발을 제손으로 띄우군 하던 아버지였다.뜻깊은 9월 9일 아침 아버지는 어제까지만 해도 병석에 누워있던 사람같지 않게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아직도 포연내가 물씬 풍겨오는듯 한 공화국기발을 창문가에 띄웠다.

그 순간 자식들의 귀전에는 애국가의 장중한 선률이 들려오는듯싶었고 눈앞에는 애국미를 바치며 공화국기를 휘날리던 할아버지의 모습과 그 기발을 휘날리며 포연탄우를 헤치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는듯싶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폭이 아니였다.우리 인민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공화국기발은 곧 조국이였다.그 품에서 모든 영광과 행복을 받아안았기에 우리 인민은 대를 이어 그 품을 지키고 길이 빛내이기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는것이다.


* *


장장 70여년세월 4대를 이어 물려온 공화국기발은 한가정이 걸어온 애국의 자취를 말해주는 증견물이였고 귀중한 가보였다.

바로 그 기발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기증하며 성순경전쟁로병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우리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만이 아닌 이 나라의 모든 새 세대들에게 전하고싶습니다.조국이 있고서야 한가정의 행복도 있으며 조국을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바치는것보다 더 고귀한 생명, 참된 행복이 없다는것을 말입니다.》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전시되여있는 포연서린 공화국기발을 보는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노래가 끝없이 울려퍼지고있다.

우리가 지켜온 기발 대를 이어 지켜지리

사랑과 정의의 힘으로 우리 국기 불멸하리

본사기자 유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