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4월 19일 로동신문
로당원이 수십년세월 품고 산 입당청원서 신발공업관리국 신발연구소 로동자
얼마전 신발공업관리국 신발연구소를 찾았던 우리는 이곳 일군으로부터 당중앙위원회 제8기 제2차전원회의 결정을 높이 받들고 땀과 열정을 아낌없이 바쳐가고있는 한 로당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그가 바로 우리 인민이 뜨거운 추억속에 돌이켜보군 하는 천리마시대가 시작된 1950년대부터 선반공으로 일해오고있는 형타직장 로동자 박원오동무였다. 사람의 한생과 거의 맞먹는 60여년을 한직종에서 성실히 일해오고있는데 대하여 감동을 금치 못해하는 우리에게 일군은 이렇게 말하였다. 《박원오아바이는 40여년전 입당할 때 쓴 입당청원서를 지금까지도 간수하고있습니다.》 40여년전의 입당청원서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한 우리는 박원오동무를 만났다.우리가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그는 정말 품속에서 《입당청원서》라고 쓴 한장의 종이를 꺼내놓는것이였다. 수십년세월 품고 산 입당청원서, 보풀이 일고 만년필잉크도 색이 바랜 40여년전의 입당청원서를 앞에 놓고 우리는 천리마시대로부터 오늘까지 박원오동무가 변심없이 걸어온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생의 출발점에서부터 마지막순간까지 충성의 꽃을 계속 피워야 후회가 없고 부끄러움이 없는 보람있는 인생으로 될수 있습니다.》 로동당원이란 어떤 사람인가. 박원오동무가 이에 대하여 처음으로 생각을 깊이하게 된것은 우리 나라가 제1차 5개년계획수행으로 끓고있던 벅찬 시기였다.
고무신이나 벨트같은 고무제품생산에 필요한 형타를 제작하던 직장에서 공작기계를 만든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였지만 직장의 당원들은 어떻게 하나 기어이 해내야 한다고 하면서 앞장에서 종업원들을 불러일으켰다.그들은 낮에는 생산과제를 수행하고 퇴근후와 휴식일 그리고 작업의 짬시간에 모르는것은 배우고 없는것은 찾아내면서 복잡하고 정교한 공작기계의 각종 부속품들을 하나하나 깎아냈다. 어느날 퇴근시간이 가까와올무렵 긴급한 과제가 제기되였다.직장에서는 당원들이 남아서 그 과제를 수행하기로 하였다. 등을 떠밀리우다싶이 하여 집으로 갔던 박원오동무가 다음날 아침일찍 현장으로 들어서니 눈앞에 뜻밖의 모습이 안겨왔다.당원들이 기대앞에서 말뚝잠을 자고있었다.작업대우에는 공작기계설계도면이 펼쳐져있었고 그옆에는 처음 보는 기계부속품들이 쌓여있었다.박원오동무는 당원들이 급한 과제를 수행하고 또 공작기계생산에 필요한 부속품들을 계속 깎았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잠시후 그날작업이 시작되였을 때 박원오동무는 옆기대에서 일하는 당원인 작업반원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밤을 꼬박 새웠을 그가 몹시 걱정스러웠던것이였다.그런데 그는 불이 황황 이는것 같은 눈빛으로 힘차게 돌아가는 선반을 주시하고있는것이 아닌가. 박원오동무가 휴식참에 그에게 다가가 힘들지 않은가, 공작기계부속품은 오늘 모두 함께 깎아도 되지 않는가고 하자 작업반원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서나 공작기계를 만들라는것은 우리
박원오동무는 《당원!》 하고 입속으로 외워보았다.묵직한것이 가슴에 마쳐왔다. 그날 밤 나란히 퇴근길에 올랐을 때 그 작업반원은 박원오동무에게 말했다.
《난 해방전부터 이 공장에서 일했소.그땐 정말 짐승보다 못한 처지였지.…해방이 되여서야 공장의 당당한 주인이 되였소.
집에 돌아와서도 박원오동무는 잠을 이룰수 없었다.준엄한 조국해방전쟁시기 군수생산에 참가한 모범당원이며 자기에게 선반을 다루는 법을 배워준 그 작업반원의 목소리가 그냥 귀전에서 맴돌았다.끝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책상우에 흰종이를 펼쳐놓고 또박또박 적어나갔다. 《조선로동당원》,
그가 보기에 당원은
다음날부터 박원오동무는 자기앞에 맡겨진 생산과제를 어김없이 수행하고는 공작기계제작을 적극 도와나섰다. 워낙 눈썰미가 있고 이악한데다가 기능공들에게서 직심스레 배운 덕에 그는 인차 선반에 정통하여 웬간한 부속품 같은것은 손색없이 깎았고 공작기계생산에도 기여할수 있게 되였다.그 나날 박원오동무가 일하는 작업반은 천리마작업반의 영예를 지니였고 그의 가슴에도 천리마휘장이 번쩍이였다. 그가 한다하는 기능공으로 자라난 어느날 당세포위원장(당시)이 찾더니 전문학교(당시)에서 공부하라고 하는것이였다. 박원오동무는 깜짝 놀라 두손을 내저으며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시간이면 선반을 더 돌리겠노라고 고집을 썼다.그러자 당세포위원장이 손을 들어 앞의 벽을 가리키는것이였다.거기에는 소극성과 보수주의, 기술신비주의를 불사르자는 글발이 있었다. 당세포위원장은 그를 이렇게 타일렀다. 지금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도 많고 없는것도 부족한것도 많다.그 모든것을 해결하자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특히 동무같이 젊은 사람들이 많이 배워야 우리의 천리마가 더 기세차게 달릴수 있으며 우리 나라는 더 빨리 공산주의사회에 가닿게 된다.… 이렇게 되여 박원오동무는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되여 낮에는 선반을 돌리고 저녁에는 전문학교에서 기계기술을 배웠다. 박원오동무는 전문학교과정안을 마치면서 축가공과 관련한 론문도 집필하여 어떤 형태와 규격의 제품도 마음먹은대로 만들수 있는 능력있는 기술인재로 자라났다. 그후 형타직장이 독자적인 공장으로 되면서 작업반장이 된 그는 농업생산을 늘이는데 필요한 밭관수용분사식노즐과 각종 신발형타를 제작하여 경제발전과 인민생활향상에 이바지하였다. 높은 실력가, 성실한 노력가인 젊은 작업반장의 가슴에 훈장과 메달이 늘어날 때마다 작업반원들은 묻군 했다. 반장동지는 언제 입당청원을 하려는가고. 그럴 때면 박원오동무는 자기는 당원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대답하군 하였다.
사실 그의 품속에는 오래전에 쓴 입당청원서가 간직되여있었다.하지만 오직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박원오동무는 당조직에 입당을 청원하였다. 잊을수 없는 당세포총회가 열렸을 때 그는 로동생활의 첫걸음을 떼던 시기부터 마음속에 품고 산 입당청원서를 눈물속에 읽었다.그의 입당을 지지하는 세포당원들의 높이 쳐든 손들이 흐려드는 눈앞에 어려왔다. 당원이 된 후 박원오동무는 입당청원서의 내용을 흰종이에 그대로 적어 붉은 당원증과 함께 품속에 소중히 간수하였다.그리고는 좋은 날에나 어려운 날에나 때없이 그 입당청원서를 읽으며 묵묵히 선반을 돌리고 일터를 지키였다. 그는 매일같이 두몫, 세몫 일하였지만 성차하지 않았고 일터의 대를 잇게 될 기능공들을 키우는데도 품을 아끼지 않았다. 언제인가 작업반앞에 중요부속품을 한시바삐 깎아야 하는 일이 제기되였을 때였다.박원오동무는 그 과제를 신입로동자에게 대담하게 맡기였다. 일부 사람들이 중요한 과제인데 그렇게 해도 되겠는가고 걱정하자 박원오동무는 자기가 곁에서 돕겠다고 하면서 끝까지 그를 내세웠다. 제품가공의 나날 박원오동무는 신입로동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쇠밥이 타래져나오는 정도를 보면 가공이 잘되고있는지 아닌지 가늠할수 있다.쇠밥의 색갈로도 그런것을 평가할수 있는데 그러자면 경험이 필요하다.… 이렇게 하나하나 가르치면서 마침내 그가 제품을 깎아내자 《수고했소.정말 용해.》라고 진심을 담아 말해주었다.작업반장의 칭찬에 큰 고무를 얻은 신입로동자는 이악하게 배워 후날 기능공으로 자라났다. 어떤 소재이든 선반을 거치고나면 정교한 제품으로 되는것처럼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고 곁에서 잘 이끌어주면 얼마든지 기능공으로 될수 있다는것이 그의 소박한 지론이였다.박원오동무의 손길에 이끌려 선반에 아예 깜깜이던 생둥이들도 어엿한 기능공들로 자랐다.지금 그가 일하는 연구소의 거의 모든 작업반장, 기능공들이 그에게서 일을 배운 사람들이다. 설계원으로 일하고있는 조어금동무는 우리와 만난 자리에서 20여년전의 일을 감회깊이 추억하였다. 《제가 첫 설계과제를 맡았을 때였습니다.그때 욕망이 컸습니다.제 실력을 뽐내보려는 생각에 설계를 제꺽 끝내고는 가공공정에 넘겨주었습니다.그리고는 제품이 빨리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박원오동무가 찾아왔다.그는 도면의 어느 한곳을 짚으며 이 부분을 수정해야 할것 같다고 말하였다.조어금동무가 다시 살펴보니 분명 그 부분은 잘못 설계되였다.하여 설계도 다시 하고 얼마후 인차 미끈한 제품이 만들어졌다. 《후날 박원오동지가 일하는 모습을 보니 선반을 돌리기 전에 먼저 품놓고 설계를 연구하는것이였습니다.만약 잘못된 설계대로 제품을 깎는다면 공장재산, 나라재산이 그만큼 랑비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그를 따라 작업반원들도 그렇게 일하였습니다.저는 그에게서 언제나 나라를 생각하는 로동계급의 량심과 알뜰한 일본새를 배웠습니다.》 이것은 조어금동무만이 아닌 연구소종업원들의 하나같은 심정이다. 박원오동무가 일해오고있는 일터는 발전하는 현실의 요구에 따라 그 명칭도 소속도 여러차례 달라졌다.하지만 신발형타제작에 지혜와 열정을 아낌없이 바치는 그의 깨끗한 량심과 헌신적인 일본새는 변함이 없다.오늘 우리 인민들이 즐겨찾는 신발들에는 박원오동무의 땀과 노력도 스며있다. 그는 국기훈장 제1급과 로력훈장을 비롯한 많은 훈장과 메달을 수여받고 국가적인 대회에도 참가하였으며 공훈기계제작공이 되였다. 이제는 그도 인생의 로년기에 이르렀다.당조직에서 여러차례 그의 공로를 평가하며 이제는 년로보장을 받고 여생을 편안히 보내라고 하였지만 그때마다 박원오동무는 머리를 저었다.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나의 기술과 기능을 새 세대들에게 깡그리 넘겨주기 전에는 일터를 뜰수가 없습니다.당원의 의무를 다하고싶습니다.》 지난 1월 조선로동당 제8차대회가 진행되던 나날에도 박원오동무는 품속에 간직하였던 입당청원서를 펼쳐보며 이렇게 결의다졌다.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박원오동무가 수십년세월 품고 산 입당청원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앞서 걸어간 로당원들처럼 참된 삶을 꽃피우기 위하여, 일을 더 많이 하기 위하여…》 60여년전 처음으로 심장속에 새기였고 40여년전 세포당원들앞에서 눈물속에 읽었던 입당청원서, 박원오동무는 오늘도 그 입당청원서를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삶의 순간순간을 값있게 살고있다. 70여성상 혁명의 진두에서 세차게 휘날려온 우리의 당기는 일편단심 당을 받들어온 박원오동무와 같은 수많은 애국자들의 불타는 충성심이 비껴있어 그리도 붉고 성스러운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참된 인간, 참된 당원들은 오직 조선로동당에만 있다. 본사기자 김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