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7월 25일 로동신문

 

전시가요들에 비낀 전승세대의 숭고한 사상정신세계를 더듬으며

불멸의 영웅신화를 떠올린 혁명적락관주의

 

반만년민족사와 세계혁명사에 전무후무한 영웅신화를 아로새긴 조국해방전쟁의 승리가 근 70년세월이 흘러간 오늘까지도 우리 국가와 혁명, 우리 매 개인의 운명과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은 참으로 거대하며 후세에 남긴 진리는 대단히 심오하다.

과연 무엇으로 하여 제국주의침략자들과의 전쟁에서 우리 인민이 승리하였는가.

력사의 기적에 대한 이 물음에 전시가요들에 비낀 전승세대의 숭고한 사상정신세계는 훌륭한 대답을 주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1950년대에 전승세대가 세운 특출한 위훈과 후대들에게 남긴 정신적재부와 유산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고귀한것으로 깊이 간직되고있습니다.》

보병총과 원자탄의 대결로도 불리우는 조국해방전쟁에서 우리 인민이 승리할수 있은 기본요인의 하나가 침략자들과 대비조차 할수 없는 정신도덕적우월성에 있다는것은 누구나 잘 알고있는 사실이다.

조국해방전쟁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 인민이 대를 이어가며 즐겨부르는 전시가요들이 항상 커다란 주목을 받고있는것은 바로 거기에 위대한 수령의 두리에 굳게 뭉쳐 제국주의침략자들과 맞서 이긴 우리 군대와 인민의 정신도덕적힘, 혁명적락관주의가 힘있게 맥박치고있기때문이다.

혁명적락관주의는 자기 고향과 조국을 끝없이 사랑하고 자기 위업의 정당성을 굳게 믿는 사람들만이 지닐수 있는 강위력한 사상정신적힘이다.

그것은 진실한 운명의 체험을 통해 축적되고 공고화되는 숭고한 정신이며 전쟁과 같은 참혹한 재난속에서 자기의 귀중한 생활과 미래를 지키려는 강렬한 요구로부터 더욱더 승화되는 열정이고 지향이다.

1951년에 가요 《전호속의 나의 노래》가 창작되게 된데는 1211고지용사들과 깊은 인연이 있다.

그해 6월말경 종군의 길을 이어가던 창작가들이 찾은 1211고지는 말그대로 불타는 고지였다.사방에서 작렬하는 적의 포탄과 해빛마저 가리우는 자욱한 포연, 하루에도 수십차례씩 벌어지는 전투…

그속에서 우리의 영웅전사들은 탄알이 떨어지면 수류탄으로, 그것마저 떨어지면 공병삽과 부서진 바위로, 나중에는 한몸이 그대로 육탄이 되여 원쑤들을 족치고있었다.그러나 죽음도 두려움없이 싸우는 그 불사조들의 가슴마다에 나서자란 고향산천과 부모처자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뜨겁게 간직되여있고 미래에 대한 그들의 희망과 포부가 얼마나 소중한것인가를 창작가들은 불타는 고지의 전호속에서 충격속에 새기게 되였다.

치렬한 전투가 끝난 후이면 전호가에 빙 둘러앉아 장군님께서 주신 땅을 부여안고 눈물을 흘리던 일이며 사랑하는 처자와 함께 밭갈이하던 해방후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전사들, 동무들과 함께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던 꿈같은 나날을 돌이켜보는 애젊은 병사들, 고향에 계시는 부모들에게 자기의 소식을 꼭 전해달라며 가슴에 품고있던 훈장을 꺼내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창작가들에게 전쟁의 폭음도 짓누를만치 그윽하고 강렬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주었다.

고향에 보내고저 하는 전사들의 자랑과 고결한 애국의 마음, 아름다운 정서를 노래에 담아 후방에 보내주자!

이런 말없는 충동을 동시에 받아안은 시인과 작곡가는 약속이나 한듯 전호속의 한 모퉁이에 수류탄상자를 엎어놓고 땀에 젖고 화약내가 풍기는 오선지와 창작수첩에 붓을 달리였다.그렇게 되여 유명한 이 노래가 이틀만에 창작되게 되였다.

우리 인민이 사랑하는 전시가요들인 《내 고향의 정든 집》이나 《소년빨찌산의 노래》도 이처럼 싸우는 고지와 마을마다에서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세계를 직접 체험하는 과정에 창작된것이다.

승리와 미래에 대한 드높은 락관을 안고 무비의 영웅성을 발휘하는 군대와 인민의 생활과 투쟁은 그자체가 강렬한 정서적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시이고 노래이다.

경쾌한 선률과 인상적인 가사형상으로 하여 오늘도 우리 인민이 즐겨부르는 가요 《자동차운전사의 노래》,

이 노래는 1951년 여름 종군의 길에 오른 창작가들이 어느 한 수송전사들과 함께 차를 타고가다가 목격한 내용들을 가지고 만든 작품이다.

적기의 공습을 피해 끝없이 야간행군을 이어가다나니 자기들이 지나가는 고장이 어데인지 알고싶어 창작가들이 운전사에게 묻자 《순천입니다.전선원호사업에서 일등으로 소문난 곳이지요.》라는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그의 말을 증명이나 하려는듯 어둠속에서 여러명의 처녀들이 나타나더니 운전사들에게 금방 딴듯 한 과일이랑 두툼한 솜장갑과 솜옷이랑 들어있는 지성어린 원호물자꾸레미를 안겨주며 꼭 승리하고 돌아오라고 거듭거듭 당부하였다.

패주하던 적들이 무리로 녹아난 유명한 양덕고개를 지나 신고산벌에 이르자 몇십년만에 처음 보는 장마로 길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였는데 수송전사들을 도와나선 그곳 마을사람들이 흙가마니와 자기 집 울바자기둥까지 뽑아가지고나와 진창길에 깔아주었다.인민의 이런 뜨거운 마음까지 싣고 불비쏟아지는 길로 꼬리를 물고 달리는 자동차행렬…

정녕 이것이 노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민족적정서가 짙은 흥겨운 선률장단으로 전선원호에 떨쳐나선 인민들의 모습을 실감있게 형상한 가요 《얼룩소야 어서 가자》에는 세월이 흘러도 잊을수 없는 하나의 감동깊은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1950년 여름 남으로 진격하는 인민군전사들을 따라 락동강까지 넘었던 작가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탄과 폭탄도 마다하지 않고 원호물자를 날라오는 사람들을 보며 지은 이 노래는 당시 수많은 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졌다.

1952년 8월의 달밝은 밤, 어느 한 마을의 녀인들앞에는 수백리길을 걸어 전선동부로 식량을 실어가야 할 어려운 과업이 나서게 되였다.그들속에는 사랑하는 남편을 전선에 내보내고 보잡이명수, 노래명수로 마을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남들보다 두몫, 세몫씩 일을 해제끼군 하는 한 녀인도 있었다.소달구지행렬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불러줄것을 요청하자 그 녀인이 맑은 소리로 부르기 시작한것이 가요 《얼룩소야 어서 가자》였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적기들이 조명탄으로 밤하늘을 대낮같이 밝히며 달려들었다.놈들이 기총탄을 퍼부으며 소이탄까지 떨구는 바람에 그만 달구지 하나가 불길에 휩싸이게 되였다.노래를 부르던 그 녀인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정성다해 마련한 쌀가마니에 불길이 타번지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어 탄우속으로 뛰여들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찌하랴.가증스러운 원쑤들의 기총탄이 그만 녀인의 가슴을 뚫고지나갔으니.

녀인은 전선에 보내는 쌀가마니와 아들애를 부탁하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자기의 귀중한 모든 감정을 전선에 보내는 그 쌀가마니에 담아 이야기한 녀인,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끝없이 번영할 조국의 래일을 그려보며 사랑하는 아들애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러본 녀인을 부둥켜안고 마을사람들은 흐르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얼마후 다시 전선으로 떠난 달구지행렬에서는 녀인이 못다 부른 노래가 울음을 삼키며 복수를 다짐하는 사람들의 합창으로 높이 울리였다.

원쑤놈의 시한탄에

귀한 내 딸 잃었단다

이내 원쑤 갚아주는

인민군대를 찾아가자

이랴 이 소야 어서 가자

오늘 우리가 청높이 부르기도 하고 즐거운 시각들에 흥겹게 듣기도 하는 전시가요들은 이렇게 하나하나가 모두 전화의 나날 자기의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잃고서도, 귀중한 전우들과 마을사람들, 공장동무들을 잃고서도 슬픔을 천백배의 힘으로 바꾸며 부른 강인한 사람들의 노래이며 승리할 래일에 대한 드높은 락관을 안고 멈춤없이 부른 노래들이다.

전승세대가 지니였던 혁명적락관주의는 위대한 수령에 대한 무한한 흠모와 신뢰의 감정으로 반석같이 다져진 백절불굴의 신념이다.

사람들은 총포성이 울부짖는 가렬처절한 전쟁속에서 어떻게 《봄노래》와 같은 전시가요가 태여날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군 한다.전쟁의 포성이 멎은 때로부터 많은 나날이 흘러간 후 한 예술인은 아름다운 이 노래의 선률을 창작한 작곡가에게 이에 대해 물은적이 있다.그때 작곡가는 이 노래를 창작하게 된 사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전쟁의 최후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치렬한 격전이 한창 벌어지고있던 1952년 5월 어느날 평안남도의 한 마을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저녁늦게까지 마을농민들과 함께 삼태기로 두엄도 나르시면서 봄을 맞이한 조국의 대지우에 씨앗을 뿌리시였다는 감격적인 소식이 온 나라에 전하여졌다.이 격동적인 소식에 접한 작곡가는 벌써 어버이수령님의 품속에서 승리한 조국의 래일이 태동하고있음을 보았고 희망의 새봄을 노래하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는 강한 충동을 받아안게 되였던것이다.

작곡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조국해방전쟁을 진두에서 령도하고계신다고 생각하니 승리의 신심에 가슴부풀어올라 언제나 화창한 봄날을 맞는 기분이였지요.…》

전화의 나날 우리 영웅전사들과 인민들이 가슴마다에 지녔던 혁명적락관주의가 어디에 근원을 두고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작곡가의 이 말에 다 비껴있다.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 진정 그이이시야말로 싸우는 조선의 위대한 힘이시였고 모진 고난속에서도 수천만의 인민이 굳게 믿은 찬란한 래일이시였다.날강도침략자들을 족치는 전사들에게 무비의 용맹을 주고 후방의 인민들에게 필승의 신심을 북돋아준 이 숭고한 사상감정은 가요 《우리의 최고사령관》에도 맥맥히 굽이치고있다.

1951년 9월의 어느날 밤 전선동부 월비산이 바라보이는 한 마을에서는 인민군군인들과 마을사람들이 모여앉은 가운데 이동영사대의 영화상영이 진행되고있었다.1950년 5.1절의 화폭을 담은 기록영화의 화면들과 함께 행복했던 지난날의 잊지 못할 추억들이 되새겨져 관중들의 얼굴마다엔 환희의 물결이 일어번졌다.격동적인 장면들이 흐르는 가운데 오매에도 그리던 위대한 수령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화면에 모셔지자 관중들속에서는 일시에 김일성장군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의 얼굴마다에는 감격의 파도가 세차게 출렁이고 전설적영웅이시고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최고사령관으로 모신 한없는 긍지가 한껏 어리였다.그날 기록영화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요청에 따라 다시한번 상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날의 열띤 광경을 목격한 창작가들은 즉시 펜을 잡고 가사와 선률을 써나갔다.

 

오늘도 부대는 원쑤를 부시고

들과 강물 산발을 넘는다

나가는 진두에 언제나 그 모습

용맹을 부르는 우리의 최고사령관

그이의 부름에 원쑤를 부시고

그이를 모시고 승리를 노래하리

이렇게 창작된 가요는 삽시에 인민군전사들속에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전사들은 이 노래를 높이 부르며 원쑤들을 무찌르는 성전에로 용감히 나갔다.전선부대 화선예술선전대의 첫 공연종목으로 자주 연주되군 한 이 노래는 싸우는 전투원들을 대중적영웅주의에로 힘있게 추동하였다.

이밖에도 평범한 인민군군인들이 직접 펜을 들고 지어부른 《샘물터에서》, 《우리 님 영웅되셨네》, 《해안포병의 노래》를 비롯하여 력사에 길이 남은 전시가요명곡들은 적지 않다.

이 이야기들은 전화의 나날 우리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속에서 높이 발휘되였던 혁명적락관주의의 일단에 불과하다.

원쑤들은 우리 인민군대의 무장장비나 청소한 력사는 계산할수 있었어도 이처럼 무궁무진한 정신적힘, 혁명적락관주의의 위력은 계산할수도 리해할수도 없었으며 그로 하여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무장을 갖추고 온갖 제국주의반동세력을 긁어모아 우리 조국땅에 달려들었지만 비참한 참패를 면할수 없었다.

오늘 우리 인민은 류례없이 간고한 시련을 헤치며 사회주의건설의 새로운 고조기, 격변기를 열어나가기 위한 투쟁을 벌리고있다.그러나 아무리 조건이 어렵고 환경이 복잡하다고 하여도 조국해방전쟁때 전승세대가 헤쳐야 했던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수령을 모시고 사는 인민, 혁명적락관주의로 무장한 인민에게는 뚫지 못할 고난이 없고 이루지 못할 목표도 있을수 없다.

조국해방전쟁의 나날에 태여난 승리의 노래들과 거기에 비낀 전승세대의 숭고한 넋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는 이 진리를 사랑하는 후대들에게 간곡히 가르치고있다.

본사기자 리  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