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7월 24일 《우리 민족끼리》

 

세월이 흘러도 반드시 결산해야 할 범죄

 

일제가 《정미7조약》을 날조공포한 때로부터 어느덧 114년이 되였다.

한세기가 넘는 기나긴 세월이 흘렀으나 쓰라린 굴욕과 치욕을 남긴 정미년의 7월을 우리 민족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

일제는 1905년 11월 침략적인 《을사5조약》을 날조하여 조선을 강점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였으며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권을 빼앗아내였다. 그후 일제는 《헤그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황제자리에서 내쫓고 고종의 아들인 순종을 황제자리에 올려앉히려고 꾀하였으며 《정미7조약》을 손쉽게 조작해내기 위해 1907년 7월 고종에게 《양위》를 강박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7월 19일 황태자에게 황제를 대리시키겠다고 말하였을뿐 그해 8월 27일까지 황제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미7조약》은 응당 조선봉건정부의 최고주권자인 고종의 윤허와 서명, 옥새날인이 있어야 법적으로 성립될수 있었다. 더우기 고종황제는 7월 24일 총리대신 리완용 등이 일제의 사촉을 받고 《정미7조약》의 초안을 비준하라고 요구하였을 때 윤허도 서명도 옥새날인도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교활한 일제침략자들은 매국노 리완용의 도장만 받아놓고 《조약》이 마치도 《체결》된듯이 《한일협약》이라는 이름으로 공포하였다.

이처럼 《정미7조약》은 체약일방인 조선봉건정부의 최고주권자 고종황제의 윤허와 서명, 옥새날인이 없는 비법, 불법의 허위문서였다.

《정미7조약》을 날조공포한 일제는 조선의 내정권까지 완전히 틀어쥐였다.

이 《조약》에 의하여 친일주구들로 꾸려진 조선봉건정부는 일제《통감》의 《승인》밑에서만 법령의 제정과 중요한 행정상의 문제 등 내정문제전반을 처리하게 되였다. 또한 조선봉건정부는 《통감》의 동의없이는 조선인고등관리를 임명하거나 외국인을 고용할수 없게 되였으며 이때부터 일제는 조선에 대한 《통감정치》와 식민지지배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렇듯 일제는 《정미7조약》과 같은 협잡문서들을 거리낌없이 조작하여 우리 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자연부원을 닥치는대로 강탈하였으며 우리 인민을 죽음의 전장터와 고역장에 끌고다니며 이루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강요하였다.

그때로부터 한세기이상의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일본반동들은 저들의 만고죄악에 대한 사죄와 배상은커녕 지금도 력사외곡책동에 매달리면서 조선반도재침의 기회만을 노리고있다.

최근에는 독도를 《일본령토》라고 우겨대고 일제전범기를 형상한 경기복장제작과 경기대회장에서의 《욱일기》사용을 허용하는 등 신성한 올림픽경기대회를 저들의 령토강탈야망을 정당화하며 해외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정치선전장으로, 군국주의부활의 공간으로 삼으려 하고있다.

그런데도 남조선의 친일보수패당은 과거 일제의 반인륜범죄에 대한 철저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려는 민심에 도전하여 《관계개선》나발을 불어대며 민족의 천년숙적과 붙어돌아가고있다.

이제 더는 지난날의 망국사가 남긴 피의 교훈을 되풀이할수 없다. 일본의 과거죄악을 한치의 에누리도 없이 똑똑히 계산하고 특등사대매국노, 친일역적무리들을 청산하려는 전체 조선민족의 의지는 날이 갈수록 더욱더 굳세여지고있다.

오늘의 조선민족은 국력이 약한탓에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당하고 피눈물속에 내정권까지 강탈당해야만 했던 어제날의 약소민족이 아니다.

우리 인민은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만고죄악을 천만년세월이 흘러도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며 반드시 철저히 계산할것이다.

본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