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7월 1일 《우리 민족끼리》
《우리 민족끼리》기사편집국은 어제도 오늘도 조국통일을 위한 우리 겨레의 투쟁의 앞길을 환히 밝혀주는 기치로, 등대로, 교과서로 되고있는
(6)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
외세의 민족영구분렬책동을 저지파탄시키고 조국의 자주적통일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거족적인 투쟁을 보여주는 력사의 갈피에는 해방후 평양에서 진행된 4월남북련석회의가 뚜렷이 아로새겨져있다. 당시 외세는 남조선에서 《5.10단선》을 강행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영구분렬을 꾀하면서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이로 하여 민족분렬의 위기는 첨예한 국면에 이르고 우리 민족은 통일이냐, 분렬이냐 하는 운명의 기로에 놓이게 되였다. 조성된 엄중한 정세는 북과 남의 모든 애국적민주력량과 전체 인민이 총발동하여 외세와 리승만역도의 《5.10단선》을 단호히 저지시키기 위한 투쟁을 더욱 완강히 벌릴것을 요구하였다. 전민족적구국통일전선을 이룩하는것, 이것이야말로 통일애국세력의 압도적우세를 보장하고 통일적정부를 성과적으로 수립하기 위하여 제기되는 긴절한 문제였다. 《단선단정》책동을 짓부시고 통일정부를 세워야 할 목전의 현실은 하루속히 전민족의 일치단결, 통일전선의 형성을 바라고있었다. 이러한 정세적요구를 깊이 통찰하신 이미 외세의 민족영구분렬책동의 흉심을 꿰뚫어보신 뿐만아니라 통일적인 완전자주독립국가건설을 지향하는 전민족적회의소집제안을 담은 편지를 남조선의 여러 정당, 사회단체 이리하여 북과 남의 모든 애국적민주력량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고 구국대책을 협의할수 있는 기초가 성숙되여갔다. 마침내 주체37(1948)년 3월 25일에 소집된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제26차회의에서는 평양에서 남북련석회의를 열것을 남조선의 정당, 사회단체들에 제의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였다.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발표한 공개서한을 통해 련석회의에서 국내정치정세를 심의하며 우리 국토를 갈라놓으려는 반동분자들의 온갖 기도를 파탄시키고 조국의 통일을 촉진하며 세계의 모든 자유애호국가들과 동등한 일원으로 될 조선인민의 통일국가수립을 촉진시키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데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방책을 채택할것을 제의하였다. 이것은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전민족적인 구국투쟁을 벌려 외세의 민족분렬책동을 짓부시고 자주적조국통일투쟁의 국면을 열어놓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였다. 민족분렬의 위험이 현실화되고있는 당시의 환경에서 통일정부수립의 출로를 찾고있던 전민족의 긴절한 요구와 민족내부문제를 사상과 리념, 정견과 당파를 초월하여 민족자결의 원칙에서 해결하려는 전민족의 의지를 반영한것으로 하여 남북련석회의소집제의는 현실성이 있는 정당한 조치였다. 남조선의 각 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과 개별적인사들은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전민족적인 통일지향에 고무되여 앞을 다투어 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사선을 헤치고 38°선을 넘어왔으며 완고한 민족주의자로 소문이 났던 김구도 민족위기타개의 뜻을 품고 북행길에 올랐다. 주체37(1948)년 4월 19일 드디여 평양모란봉극장에서는 온 민족의 관심속에서 력사적인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련석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는 북과 남의 56개 정당, 사회단체대표 695명이 참가하였다. 4월남북련석회의는 실로 나라의 통일이라는 하나의 목표밑에 정견과 신앙, 주의주장을 초월하여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애국적민주력량으로 결속된 민족단합의 첫 마당이였다. 회의참가자들은 걸어온 길이 서로 다르고 주의주장은 같지 않았으나 거족적인 구국대책을 토의하게 될 력사적인 회합에 참가한 감회로 하여 커다란 감격과 흥분에 휩싸여있었다. 력사적인 련석회의 둘째날인 4월 21일에 보고에서 4월 23일 련석회의는 조선은 반드시 통일되여야 한다는것을 확인하고 남조선《단독선거》를 반대배격할것을 결정한 《조선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여 조선인민은 설사 《단선》으로 괴뢰정부가 조작된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조선인민자신의 손으로 민주주의적원칙에서 진정한 통일정부를 세울것이라는것을 엄숙히 선언하였다. 그리고 남조선《단독선거》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단독선거》를 파탄시키는 투쟁에 전체 인민들이 한사람같이 떨쳐나설것을 호소하는 격문 《전조선동포에게 격함》을 채택하였으며 3천만동포의 이름으로 《유엔림시조선위원단》과 외국군대의 즉시 철거를 쏘미량국정부에 요구하였다. 남북련석회의에 뒤이어 주체37(1948)년 4월 30일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협의회에서는 쏘미량국군대가 우리 조국에서 철거한 후에 북남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의 명의로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고 민주주의림시정부를 수립한 다음 일반적, 직접적, 평등적선거원칙에 의하여 비밀투표의 방법으로 통일적최고립법기관을 선거하고 헌법을 제정하며 통일적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할것을 결정하였다. 이렇듯 협의회는 외세의 민족분렬책동을 짓부시고 통일적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실제적인 대책을 토의함으로써 남북련석회의의 성과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남북련석회의 참가자들은 정견과 신앙이 서로 달랐지만 련석회의에 참석하였던 김구, 김규식은 남북협상파세력을 중심으로 그해 7월 21일 서울시 중구 《연무관》에서 《한국독립당》, 《민족자주련맹》을 비롯한 80여개의 정당, 단체대표 300여명을 망라하여 구국통일전선의 형성을 위한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다. 4월남북련석회의가 가지는 력사적의의는 한마디로 당파와 소속, 주의주장을 달리하는 북과 남의 각당, 각파 대표들이 민족의 태양이신 참으로 4월남북련석회의는 북반부가 조국의 민주주의적발전과 민족재생의 길을 가리켜주고있을뿐아니라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기치로 되고있다는것을 공인한것과 동시에 사상과 리념, 정견과 신앙에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비롯한 각이한 정치세력과 각계각층이 민족공동의 위업을 위한 투쟁에서 얼마든지 단결할수 있으며 북과 남이 화합하고 온 민족이 단결하면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실현할수 있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이렇듯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로 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