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8월 9일 로동신문
전세대들의 투쟁정신, 투쟁기풍을 따라배우자! 나라의 맏아들 김철로동계급은
오늘 조국은 금속공업부문과 화학공업부문의 로동계급이 나라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대고조의 불길로 당과 혁명을 보위한 전세대들의 투쟁정신, 투쟁기풍을 따라배워 중중첩첩 앞길을 가로막는 시련과 난관을 앞장서 뚫고헤칠것을 절절히 바라고있다.
일찌기 우리
모든것이 부족하고 어려웠던 지난 세기 50년대에
《조선혁명은 하늘이 주는 신비한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편단심 당을 따르고 옹위하는 영웅적
전쟁의 후과는 참혹하였다.공장과 농촌, 거리와 마을은 온통 재더미로 변하였다.김책제철소의 형편도 다를바 없었다. 당시 김철에 숨쉬는 용광로라고는 1호용광로 하나뿐이였다.강선의 분괴압연기가 강편을 뽑는 나라의 외아들이였다면 김철의 용광로는 선철을 생산하는 나라의 외아들이였다.
자력갱생의 혁명정신과 대담성을 안겨주신
1958년 봄 김책제철소를 찾으신
그날 제철소지배인은 용광로복구현장에서
《우리 김철로동계급은 2호용광로복구를 올해안으로 끝낼것을 결의해나섰습니다.》
순간
2호용광로는 전쟁기간 거의 90%가 파손되였다.2호용광로복구를 그해중으로 끝낸다는것은 결국 복구공사기일을 반년이나 앞당긴다는것을 의미했다.벽돌 한장 성한것이 없고 온 제철소가 페허로 되다싶이 한 조건에서 용광로 한기를 새로 건설하는것이나 맞먹는 방대한 공사과제를 그처럼 빠른 시일안에 수행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김철로동계급은 추호의 동요나 주저도 몰랐다. 온 제철소가 2호용광로복구투쟁에 궐기해나섰다.원쑤들이 파괴해버린 용광로를 우리의 손으로 더 훌륭하게 일떠세우자! 어디서나 이런 웨침이 터져올랐고 누구나 용광로복구공사를 기한전에 끝내고야말 열의로 가슴 불태웠다.
김철로동계급의 철의 신념과 배짱, 정녕 그것은
가렬처절한 전화의 시련을 이겨내면서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화선식정치사업이 현장마다에서 힘있게 진행되는 속에 2호용광로복구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척되였다.공사가 시작된지 한달도 못되여 해체정리작업이 끝나고 뒤이어 로체조립과 축로작업이 시작되였다. 로동자들은 로체조립과 축로작업을 동시에 진행할것을 발기해나섰다.사실 두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어느 한 공정이 처질 위험성이 있었고 그러면 자칫하다 공사기일을 드틸수 있었다. 그러나 김철의 로동계급은 모험을 하다가 일이 생기면 누가 책임지겠는가고 떠들어대는 기술신비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방해책동에도 물러서지 않았다.2호용광로복구공사를 앞당겨 끝낼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한 모임에서 한 연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나라의 형편은 어렵다.어디서나 철과 기계를 요구하고있다.때문에 나라의 어려움을 덜수만 있다면 한몸이 그대로 용광로가 되여서라도 더 많은 쇠물을 뽑아야 할 우리가 어떻게 책임이 두려워 제자리걸음을 할수 있겠는가. 연공은 그날 모든 공정을 흐름식으로 진행하되 로체조립에서는 내부용접을 앞세우고 여기에 축로작업을 복종시키며 동시에 외부용접을 진행하자는 건설적인 안을 내놓았다.그에 호응하여 수많은 로동자들이 공사를 앞당겨 끝낼수 있는 여러가지 좋은 방안들을 제기하였다.이처럼 당앞에 다진 맹세를 무조건 결사관철하려는 로동계급의 심장은 쇠물처럼 뜨거웠고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높았다. 용광로복구공사장 어디에서나 사람들을 놀래우는 혁신과 위훈이 창조되였다. 공사의 첫 시기 축로공들의 작업속도는 로체조립속도에 따라서지 못하고있었다.이때 안타까운 현실을 두고 모대기던 두 축로공이 낮에 밤을 이어가며 애쓰던 끝에 작업속도를 무려 다섯배나 끌어올릴수 있는 혁신적인 작업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벽돌무지속에서 알맞는 벽돌을 한장씩 골라쌓던 종전의 작업방법대신 몰탈을 바르기 전에 먼저 벽돌을 한줄로 배렬해보고 수평이 보장되면 그것을 련속적으로 쌓아감으로써 하루기준량을 5배나 초과할수 있는 능률적이며 합리적인 작업방법이였다. 이들의 모범을 따라배워 공사장 어디에서나 집단적혁신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랐다.용접공들은 하루계획을 200%이상 넘쳐 수행하고도 만족해할줄 몰랐고 축로공들은 작업속도를 부단히 높여 한주일작업량을 이틀만에 해제끼면서도 더 큰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줄달음쳤다. 이처럼 김철의 로동계급은 백절불굴의 혁명정신, 자력갱생의 투쟁기풍을 높이 발휘하여 일년나마 걸린다던 2호용광로복구공사를 훨씬 앞당겨 끝내는 자랑찬 로력적성과를 이룩하였다. 이것은 김철로동계급이 19만t의 공칭능력을 뛰여넘어 27만t의 선철을 생산한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서 천리마운동이 일어나던 격동적인 시기에 세인을 경탄시킨 무수한 기적들중의 하나였다. 1959년 3월 《로동신문》은 《김책제철소 제1호 및 제2호용광로와 제2호해탄로조업식 성대히 거행》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이날 조업식을 맞이한 김책제철소구내는 명절일색으로 단장되였다.… 조업식장인 용광로직장 앞광장은 몇시간전부터 모여든 이 공장 종업원들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조업식을 축하하여 여기에 온 시내근로자 등 1만여명의 군중들로 흥성거리였다.… 장내는 군중들이 부르는 〈만세〉의 환성으로 진동하였으며 쇠물의 뜨거운 열기에 붉게 상기된 용해공들의 구리빛얼굴에도 억제할수 없는 기쁨이 어리여있었다. 당과 조국앞에 이처럼 위대하고 찬란한 위훈을 세운 이들의 기쁨을 무엇에 비길수 있으랴!
더우기
로에서 계속 쏟아져나오는 붉은 쇠물은 당과
2호용광로복구당시 김철의 로동계급에게는 있는것보다 없는것이 더 많았고 부족한것도 한두가지가 아니였다.생활상어려움은 더 말할것도 못되였다. 하지만 그들은 오직 철생산 그 하나의 지향으로 가슴을 불태웠다.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용광로복구와 철생산만을 생각하면서 제 집 밥가마가 끓는것보다 용광로에서 쇠물이 끓는것을 더 흐뭇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바로 고지식하고 강직한 김철의 로동계급이였다. 전세대들의 잊을수 없는 투쟁모습을 돌이켜보며 오늘 우리가 심장깊이 아로새겨야 할 진리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의 시련과 난관이 아무리 혹독한것이라고 해도
본사기자 김경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