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8월 10일 로동신문

 

참된 량심으로 새긴 애국의 자욱은 지워지지 않는다

한 평범한 공민이 남긴 《충성의 일지》를 펼치고

 

얼마전 우리는 한 전세대 공민이 남긴 20권의 《충성의 일지》에 대하여 알게 되였다.중구역 오탄동 34인민반에 살고있는 리금철동무의 아버지가 남긴것이다.그의 아버지는 지나온 혁명의 년대들에 이 나라 방방곡곡 어데 가나 만날수 있었던 보통공민, 평범한 근로자들중 한사람이였다.

이름은 리설룡, 그는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공화국창건 40돐을 승리자의 대축전으로 맞이하기 위한 200일전투를 벌릴것을 호소한 당중앙위원회 편지를 받아안고 그에 화답하는 《충성의 일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애국의 마음은 조국과 인민을 위한 실천활동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생의 매 순간마다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받드는 충성의 삶을 수놓아온 전세대 당원의 숭고한 모습이 진한 피방울마냥 붉게붉게 어려있는 《충성의 일지》,

30여년의 세월속에 어느덧 색은 날았어도 이름없는 한 애국자의 불같은 생의 자욱이며 꾸밈없는 마음의 목소리인 일지의 글줄마다에서 우리는 행복한 나날에나 시련의 나날에나 당을 따라 오직 한길을 꿋꿋이 걸어온 전세대들의 간곡한 당부, 애국과 량심에 대한 또 하나의 소중한 교본을 받아안는다.

 

당에서 나를 부르고있다

 

주체77(1988)년 2월 22일 《로동신문》 1면에는 온 나라 전체 인민을 세차게 격동시킨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 관한 보도와 함께 전체 당원들에게 보내는 당중앙위원회 편지가 실리였다.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를 몸소 지도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화국창건 40돐에 즈음하여 전체 당원들에게 당중앙위원회 편지를 보내는 취지를 밝히시고 전당, 전민이 총동원되여 사회주의건설에서 새로운 대고조를 일으킬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온 나라는 삽시에 거세찬 충격의 열파로 부글부글 끓어번졌다.

공장과 농촌, 외진 섬마을 등대초소에 이르기까지 로동당원들이 있고 우리 인민들이 사는 그 어디서나 위대한 당의 호소를 받아안고 비상한 각오와 열정으로 들끓던 바로 그 시각 평안북도의 한 기계공장에서 품질감독원으로 일하고있던 리설룡동무도 크나큰 감격과 흥분을 누르지 못하며 남다른 결심으로 새로 마련한 책의 첫 페지를 펼치였다.

《1988년 2월 22일.

지금 나의 머리속에는 전체 당원들에게 200일전투를 호소하는 당중앙위원회 편지의 구절구절이 쉬임없이 울리고있다.

〈당중앙위원회는 당과 혁명에 대한 당원동지들의 충실성을 믿고있으며 이번 전투에서도 당신들의 헌신성과 선봉적역할에 큰 기대를 가지고있다.〉

당에서 나를 부르고있다.이 부름앞에 당원으로서 말보다 실천으로 대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리설룡동무의 《충성의 일지》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가장 믿고 사랑하는 자식에게 터치는 어머니의 열렬한 호소와도 같고 절절한 당부와도 같은 당중앙위원회 편지를 받아안고 심장의 붉은 피, 애국의 더운 피를 펄펄 끓인 우리의 주인공,

그에게는 나라없던 그 세월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여나 짐승만도 못한 노예살이를 강요당해야 했던 가슴아픈 생활체험이 있었다.뼈가 채 굳기도 전에 지주집머슴살이를 해야 했고 일제가 벌려놓은 공사장에 내몰려 죽기보다 더한 고역살이속에서 몹쓸 전염병까지 만났던 어제날의 천덕꾸러기가 바로 그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찾아주신 조국은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삶의 터전, 둘도 없는 행복의 보금자리였기에 그는 침략자들이 우리 조국땅에 불을 지르자 용약 손에 총을 잡았으며 남진의 길과 락동강계선, 1211고지부근에서 원쑤들을 무찌르며 용감히 싸웠다.

당에서는 전쟁로병인 그가 만사람의 존경과 사랑속에 보람찬 삶을 누리도록 하였으며 그의 자식모두를 대학과 전문학교(당시)까지 공부시켜 나라의 역군으로 어엿하게 내세워주었다.

항상 마음속으로 당의 사랑과 은정에 보답이 따라서지 못하는것만 같아 못내 송구스러웠던 그는 200일전투를 호소하는 당중앙위원회 편지를 받아안은 격동의 시각에 나의 운명, 나의 가정의 행복은 당에서 준것이니 응당 당의 뜻에 마음도 걸음도 따라세워야 한다는 우리 인민의 생활신조를 다시금 뜨겁게 자각하였다. 수령의 은덕을 늘 가슴속에 새기고 기어이 보답할 지향과 열의로 심장의 피를 끓이는 사람은 비록 일터와 직무는 평범하다고 해도 동시대인들은 물론 많은 세월이 흐른 뒤의 후대들까지도 머리숙이며 따라배울 고결한 인생의 모범을 창조하게 된다.

200일전투에로 부른 당중앙위원회 편지의 구절들가운데서 그의 마음을 류달리 사로잡은것은 인민경제 모든 부문에서 로력과 자재를 극력 절약하고 내부예비를 최대한으로 동원할것을 호소한 내용이였다.하여 그는 200일전투기간 품질감독원으로서의 본신임무를 더 잘 수행하면서 20t의 파철을 로동시간외에 수집할것을 스스로의 200일전투과업으로 정하였다.

다음날부터 사람들은 찬바람부는 새벽의 어둠을 헤치며 손달구지를 끌고 파철을 모으는 리설룡동무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공장구내를 비롯한 여러곳을 다니며 파철을 수집하고는 집에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출근길에 오르는것이 그의 어길수 없는 하루일과로 되였다.

중요한 기계공장의 품질감독사업을 맡아하면서 나라에 보탬을 주기 위한 좋은 일을 또 찾아하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감동하기도 하고 쉬염쉬염 하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하지만 그는 남다른 보람의 미소를 지으며 헌신의 새벽길, 애국의 밤길을 변함없이 이어갔다.

이 나날 그는 《충성의 일지》에 하루하루 샘물처럼 맑은 량심의 기록을 남기였고 새로운 결의도 다지였다.

《1988년 5월 16일.

오늘 파철이 가득찬 손달구지를 끌고 한 오물장곁을 지나다가 걸음을 멈추었다.못쓰게 된 각이한 치차류, 축류, 볼트, 나트를 비롯한 갖가지 쇠붙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손달구지는 이미 힘에 부칠 정도로 무거웠지만 아까운 쇠붙이들이 눈에 뜨인 이상 그냥 두고 갈수 없어 그것들도 말끔히 거두어 실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니 손달구지의 육중한 무게가 배허벅을 아프게 파고들었다.허리마저 제대로 펼수 없었다.온몸을 구부린채로 젖먹은 힘까지 다 내여 손달구지를 끌며 생각했다.

전후 어버이수령님께서 강선로동계급을 찾아가시여 1만t의 강재만 더 있으면 나라가 허리를 펴겠다고 하신 그날의 교시를 언제나 잊지 말자고.》

《1988년 7월 3일.

손달구지를 끌고 집을 나서는데 울타리너머에서 옆집주인이 한마디 건네였다.

〈오늘이야 휴식일인데… 좀 쉬구려.〉

늘 듣는 지청구이다.나는 흔연히 대답했다.

〈내가 좋아서 운동삼아 하는거요.〉

구태여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충성의 200일전투를 이어가는 나에게는 휴식이 있을수 없다는것을.》

당의 부름에 티없이 깨끗한 량심으로 나섰기에 그 량심이 가리키는 길만을 곧바로, 묵묵히 걸은 리설룡동무였다.

그는 파철을 수집하는 속에서도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공장을 현지지도하실 때 다녀가신 도로를 매일 아침 정성다해 쓸고 또 쓸었다.언제인가 파철을 수매하고 돌아오던 길에서 이름모를 녀인의 무거운 짐을 10여리길이나 함께 들어다주었다는 이야기며 또 어느 언덕받이에서 김장배추를 실은 동네사람의 손달구지를 밀어주고 돌아섰다가 또 그런 사람들이 올것만 같아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있었다는 사실에서도 당과 수령을 받들고 사회와 집단을 위한 길에 자기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치고싶어한 그의 진정을 엿볼수 있다.

남들보다 두배, 세배 땀을 바치는 그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적들과의 전투에서 두차례나 부상을 당한 영예군인이라는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때없이 육체를 괴롭히는 고통을 참아가면서 매일같이 무거운 파철을 나르며 먼길을 오간 그가 아픔을 덜기 위해 내의속에 가죽띠로 허리를 조이고 다닌 사실에 대해서도, 저녁이면 집에 돌아와 모진 아픔으로 밤새도록 앓음소리를 낸 사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였다.

언제인가 리설룡동무가 심하게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있는 딸이 부랴부랴 찾아온 일이 있었다.부상입은 상처가 도져 자리에 누웠던 그가 그날만은 아무런 내색없이 밝은 웃음을 지으며 딸을 반겨맞았다.

그 모습을 가슴저리게 바라보던 안해가 딸이 돌아간 다음 물었다.왜 딸한테조차 아픔을 감추는가고…

《내 병이 이렇게 심한줄 알면 딸애가 가만있겠소.혹시 그애가 우리 당조직에라도 찾아가 이야기하면 어쩌겠소.당에 걱정을 끼쳐드려서야 안되지.》

항상 당의 뜻을 안고 성실한 구슬땀을 바쳐가면서도 당에 조금이나마 부담이 될가봐 걱정해온 그였기에 《충성의 일지》에 매일매일의 파철수집실적을 꼬박꼬박 적어넣으면서도 그 어떤 일신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줄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새벽길을 걸으며 모은 파철은 500여t에 달하며 그로 하여 손달구지만 하여도 4번이나 새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남보다 더 많은 땀을 바치라고 누가 시키지도 당부하지도 않았건만 그의 귀전에는 언제나 자기를 부르는 당의 목소리, 조국의 목소리가 쟁쟁히 들려왔으니 정녕 그것은 순결한 량심과 의리의 인간만이 새겨안을수 있는 뜨거운 심장의 박동소리였다.

당에서 나를 부르고있다!

이 숭고한 자각으로 당을 따르고 받드는 걸음이 잠시라도 떠질세라 스스로 마음속구령을 내린 리설룡동무,

그에게 있어서 자나깨나 당의 뜻을 충직하게 받들며 크든작든 나라에 보탬을 주는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고귀한 영예, 더없는 행복이였다.

 

또다시 2만일전투에로!

 

《충성의 일지》를 쓰기 시작한지 여러해가 지나 리설룡동무는 년로보장을 받았다.하지만 그의 충성과 애국의 행로는 계속되였다.

그가 남긴 《충성의 일지》가운데는 이런 내용이 있다.

《1993년 8월 13일.

오늘부터 목표는 2만일전투이다.

2, 000일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로 힘차게 나아가리라.》

전체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높은 정치적열의와 크나큰 로력적성과속에 공화국창건 40돐을 승리자의 대축전으로 맞이하였을 때 리설룡동무는 스스로 정한 200일전투과업을 기어이 수행한 기쁨에 휩싸여있었다.허나 그는 결코 하나의 승리의 봉우리우에 올랐다고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당의 뜻대로 충성의 200일을 2, 000일로 이어가리라 굳게 결의다지고 다시 마음의 신들메를 든든히 조였으며 하여 2, 000일전투승리라는 가슴벅찬 순간을 맞이한것이다.그리고는 또다시 2만일전투에 나선 리설룡동무,

사람의 한생의 나날과 거의 맞먹는 2만일전투를 예순살도 퍽 지난 나이에 시작한 그 자체가 참으로 놀랍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용단을 내리게 하였는가.가슴속 깊은 곳에서 퍼내고퍼내여도 조금도 줄지 않고 도리여 용용히 솟구치는 수령에 대한 열화같은 흠모심이였다.무한한 충성심은 앞날에 대한 신심과 락관을 주고 로당익장하여 더 많은 일을 하려는 강렬한 지향과 배짱을 안겨주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나이가 들수록 당과 조국, 사회와 집단을 위한 많은 일감을 맡아안고 헌신하는 그에게 전국공산주의미풍선구자대회에 참가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혁명의 수도 평양에 올라와 꿈결에도 뵙고싶던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은 영광의 그날 리설룡동무는 격정의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그의 가슴속에 더욱 굳건해진것은 오직 하나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그 사랑, 그 은정에 천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불같은 일념이였다.

리설룡동무는 그에 대하여 《충성의 일지》에 이렇게 썼다.

《1993년 12월 10일.

참으로 꿈만같은 영광을 지니고보니 그 사랑, 그 믿음에 보답하기에는 사람의 한생이 너무도 짧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보답에는 한생도 모자란다.그러니 열배, 백배로 분발하여 여생을 보람있게 보내자.》

대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그는 이미전부터 마음써오던 겨울철난방문제와 관련한 연구에 몰두하였다.그가 년로보장을 받은 때로부터 특별히 고심한 문제의 하나가 바로 겨울철이면 아궁에 불이 제대로 들지 않아 고생하는 세대들이 더러 있는것이였다.

보답의 일념으로 가슴 불태우는 리설룡동무의 새로운 고민과 결의도 《충성의 일지》는 빠짐없이 기록하고있다.

《1994년 1월 31일.

예로부터 온돌을 수리하는 사람들을 천하게 여기면서 온돌쟁이, 구들쟁이라고 불러왔다.남의 집 구들바닥이나 들추는 일이 험하기때문일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온돌쟁이가 되련다.지금같이 좋은 세월에 잠시나마 춥게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을 아시면 우리 수령님께서 얼마나 심려하시겠는가.나이가 적지 않은 나로서는 어려운 선택이지만 누구든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이때부터 《충성의 일지》에는 그가 사는 마을의 여러 집의 서로 다른 온돌조건과 그에 맞는 설치방법이 도면과 부호, 각이한 수자들로 새겨지기 시작하였다.어떤 날에는 하루의 기록이 이러한 도면과 부호, 수자들로 꽉 들어차기도 하였다.

온돌수리는 힘겨운 전투였다.이전에는 무거운 파철을 실은 손달구지를 끌며 새벽길을 걸어야 했다면 온돌수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여서부터는 늘 밤을 패며 사색과 탐구를 거듭해야 하였고 남의 집 구들장을 들추면서 매캐한 재먼지도 뒤집어써야 했다.집마당에서 자체로 연구한 토관을 빚다가 부상자리가 도져 신음할 때면 안해인 김정실녀성이 그가 하던 일을 대신하였다.

《제 몸부터 돌봐야 할 사람이 남의 집 온돌때문에 그다지나 극성이니…

그러다 아예 몸져눕겠어요.》

안해가 눈물이 글썽해서 이야기할 때면 그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당에서 나를 공산주의미풍선구자로 내세워주지 않았소.선구자가 앞서나가야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게 아니요.》

그리고는 또다시 일손을 잡았다.그 나날속에는 고심하여 만든 토관을 어깨에 메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불이 잘 드는가고 물은적도 있고 어느 한 후방가족의 집을 찾아 자전거를 타고 20리 밤길을 다녀오다가 넘어져 다리를 상하고 안해를 또다시 울린 저녁도 있었다.

마음속에 자기에 대한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는 사람, 언제나 나라를 위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데서 기쁨을 찾군 하는 그를 사람들은 《공산주의아바이》라고 불렀다.

어느해 추운 겨울날에 있은 일이다.온돌수리를 부탁받은 한 영예군인의 집을 찾아갔는데 주인들이 없었다.알아보니 갑자기 조직된 건강검진때문에 병원에 간것이였다.

리설룡동무는 찬바람부는 길가에서 집주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몇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온 집주인들은 그때까지도 자기들을 기다리고있는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온 마을에 공산주의미풍선구자로 알려진 로병아바이가 자기 집 온돌을 봐주려고 년로한 몸으로 오랜 시간 찬바람을 맞으며 서있다니…

며칠후 그의 손길이 닿아 퍼그나 따스해진 아래목을 어루쓸며 영예군인은 눈물을 머금고 말하였다.

《난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나라에서 영예군인이라고 내세워주고 당조직과 이웃들에서 보살펴주고 오늘은 아바이까지 이렇게…》

《그 말이 옳네.우리모두가 복받은 사람들이야.당에서 아끼는 자네같은 사람들을 도와주는것이 나한텐 둘도 없는 락이라네.》

이런 말을 남긴 리설룡동무는 식사라도 한끼 같이하자는 영예군인의 청을 사양하고 집을 나섰다.그에게는 아직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이 많았던것이다.늘 헌신의 일감을 찾는데 습관된 그는 자신부터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에 떠받들리며 살아야 할 전쟁로병이라는데 대하여서는 감감 잊고있었다.

당앞에 스스로 다진 맹세를 실천하기 위한 2만일전투의 하루하루는 이렇게 흘러갔다.이 나날 그는 온돌수리에 대한 연구자료를 전국과학기술축전에 내놓아 1등과 3등의 영예를 지니였으며 새기술도입증도 받아안았다.

이때부터 그는 《공산주의아바이》라는 부름과 《온돌박사》라는 인민이 안겨준 소중한 호칭으로 불리우기 시작했으며 군과 도의 크고작은 공장과 기업소, 인민반들에서 앞을 다투어 그의 《초빙강의》를 요청하였다.

눈코뜰새없이 바쁜 나날은 리설룡동무에게 더없는 인생의 락과 보람을 안겨주었다.

그가 걸어온 인생길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인생의 가치와 행복, 보람과 영광은 동지들과 이웃들, 나라일을 먼저 생각하며 자신을 끝없이 바치고 또 바치는 무한한 헌신에 있다는것을.


* *


리설룡동무는 2만일전투를 다 끝맺지 못하고 우리곁을 떠나갔다.

그러나 그가 걸은 충성의 길, 애국의 길을 오늘은 그의 자손들이 꿋꿋이 이어가고있다.그의 아들딸들과 손자, 손녀들은 아버지, 할아버지가 물려준 《충성의 일지》를 가보로 간직하고 보풀이 일도록 보고 또 보며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 충성다할 맹세를 가다듬고있다.

지나간 년대에 어디서나 볼수 있었던 평범한 공민이 남긴 20권의 《충성의 일지》,

그 불같은 생의 기록은 단순히 그 한사람의 고결한 사상정신적풍모만을 전하고있지 않다.그것은 수령께 무한히 충직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이였던 우리 전세대들의 한결같은 모습이 비낀 하나의 맑은 거울이다.직위는 비록 높지 않고 이름 또한 널리 알려지지 않았어도 수령을 받드는 진심만은 티없이 깨끗하고 열렬하였던 이 나라의 참된 인간들,

참된 량심으로 새긴 애국의 자욱은 지워지지 않는다.빛나는 인생의 고귀한 진리를 가르쳐준 전세대들의 삶은 우리 후대들이 세세년년 따라배우고 전해가야 할 빛나는 모범이다.

온 나라 전체 인민들이여,

경애하는 총비서동지를 그들처럼 충실하게, 그들처럼 열렬하게, 그들처럼 견결하게 받들어나가자!

우리 혁명의 빛나는 년대들을 자랑스럽게 떠올린 전세대들처럼 이 땅의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사상과 령도에 무한히 충실할 때 력사의 온갖 풍파속에서도 당이 결심하고 인민이 바라는 사회주의강국은 반드시 일떠서게 될것이다.

본사기자 림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