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9월 15일 로동신문
음악예술로 만수대예술단 고문이였던 박영순동지의 한생을 더듬어
노래와 함께 승리하며 전진하여온 우리 혁명의 로정에는 천만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음악포성으로
《문학예술부문 일군들과 창작가, 예술인들은 명작창작으로
당의 기초축성시기부터
재능있는 예술인이기 전에
충성의 노래를 낳은 샘
참다운 충실성은
그 숭고한 세계에서 충신의 첫걸음이 시작되는것이며 생명이 다할 때까지 변함을 모르는 일편단심이 량심으로, 도덕의리로, 신념으로 다져지는것이다.
국립가무단(당시)의 성악배우였던 박영순동지는 만수대예술단의 전신인 국가중창단의 한 성원으로 선발되게 되였다.
당시 국가중창단은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우리의 문학예술을 대표하는 예술단체, 본보기단체를 조직하실 구상을 안으신
주체58(1969)년 10월 6일 국가중창단에 나오신
절세위인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주체음악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보람찬 길을 걷게 된 박영순동지의 감격과 환희는 그 무엇에도 비길데 없었다. 비범한 예지와 특출한 음악실력, 만사람의 마음을 한순간에 끌어당기는 친화력과 전사들에 대한 불같은 사랑…
거의 매일이다싶이
1970년대 중엽 만수대예술단의 창작가, 예술인들이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대한 방문공연을 진행할 때였다.
공연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꽃다발속에 묻혀있을 때에도, 깊은 밤 이국의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볼 때에도 박영순동지는
정다운 그 품으로 천리이든 만리이든 한달음에 달려가 안기고싶을 때마다 머나먼 조국의 하늘가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속말로
그는 매일과 같이
《1974.10.28.월요일.알제리에서 첫 관통련습.
…친애하는
외국방문공연의 나날 그는 남성중창조 성원들에게 《우리의 임무는 첫째도 둘째도
이런 그였기에
그 나날 박영순동지의 가슴속에는 하나의 절절한 소원이 자리잡았다.
절세위인의 품속에서 성장의 걸음마를 떼던 순간부터 심장에 끓는 매혹과 흠모의 불덩이를 세상에 터치고싶은 열망은 자나깨나 그의 심신을 달아오르게 하였다.
1970년대는
오늘도 우리 인민은 노을이 피여나는 이른아침에 인자하신 그 미소를 생각합니다라는 노래의 구절을 뜨거운 감회와 격정속에 부르군 한다.
늘 봐야 말이 적고 일밖에 모르는 그였지만 가슴속에는 그렇듯 용암처럼 뜨거운것이 끓어번지고있었다.
주체68(1979)년 2월 17일 만수대예술극장에서는
노래를 고치라고 거듭 강조하시는 그이앞에서 바재이고 또 바재이던 박영순동지는 마침내 용기를 내여 4월 15일까지는 아직 날자가 있는데 저희들이 지혜를 모아 그때까지 4월의 명절을 축하하는 노래를 새로 지으면 안되겠습니까, 미력하지만 제가 다시 가사를 써보겠습니다라고 간절히 말씀올리였다.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던
이때부터 박영순동지는 전심전력하여 새 노래창작에 달라붙었다.
마침내 4월이 왔을 때
한손에 가사와 악보를 드시고 열광적으로 설레이는 합창대를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더니 노래가 끝나자 숙연히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새로 지은 노래가 아주 좋다고 평가하시였다.
박영순동지는 작가가 아니였다.가사를 써야 하는 어떤 의무나 책임도 없는 성악가였지만 또 한분의 절세위인을 높이 모신 민족의 영광과 행운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소리높이 노래하는것을 혁명적예술인으로서의 응당한 도리로, 사명으로 간주하였기에 스스로 붓을 잡고
박영순동지는 가요
한생을 바쳐
이것이 박영순동지의 흔들림없는 신조였고 원칙이였다. 유능한 배우이기 전에 열혈충신이였던 박영순동지의 노래는 능숙한 연기와 예술적기량에 앞서 혁명적예술인으로서의 숭고한 사명감을 간직한 충성의 심장에서부터 샘솟아올랐던것이다.
1920년대 우리 혁명의 첫 기슭에서
그는 오늘도 7련대의 대오에 서있다
변함없이, 끝까지 가야 하는것이 충성의 길이다. 박영순동지가 한생 드팀없이 걸어온 그 길은 후대들에게 참다운 충실성이란 어떤것인가를, 혁명적예술인의 제일생명은 과연 무엇인가를 말해주고있다.
우리 혁명이 류례없는 난국을 헤쳐나가던 고난의 행군, 강행군시기에도 박영순동지는 어제날의 남성중창조 조장으로서, 만수대정신의 창조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
피눈물의 1994년을 보내면서 박영순동지의 가슴속에는 철석같이 굳어진 신념이 있었다.이제는 한분밖에 안 계시는 그이, 조국의 운명이고 미래이신
자주적인 근위병이 되느냐, 제국주의자들의 노예가 되느냐 하는 엄혹한 력사의 갈림길에서
그 열혈의 심장들을 향해 온 나라가 성새, 방패가 되여
1930년대 류례없는 고난의 행군길에서
혁명의 가장 어려운 시기 사령부의 안녕을 지켜 한목숨을 내댄 오중흡동지와 항일의 7련대를 마음속에 그려보며 그 대오에 자신을 세워보군 한 박영순동지였다.바로 그날의 결사의 정신이 오늘의 행군길에 차넘쳐야 한다는 억척의 신념이 박영순동지의 창작적열정을 북돋아주었다. 이렇게 되여 오늘도 우리 인민과 인민군장병들이 부르고 또 부르는 노래 《오늘도 7련대는 우리앞에 있어라》가 류례없이 간고하였던 시기인 주체84(1995)년에 태여났다.
그것은 한 예술인의 손끝에서가 아니라 충신의 심장에서 높뛰는 피방울이 그대로 가사가 되고 그 박동이 운률로 이어진 불같은 충성의 고귀한 결정체였다.단지 한편의 가사가 아니라 조국과 인민의 운명이
그것은 또한 혁명앞에 어려운 시련과 난관이 겹쳐들 때 우리 예술인들이 서야 할 자리는 과연 어디이며 조국과 인민에게 바칠수 있는 가장 고결한 충성의 열매가 어떤것인가를 말해주는 하나의 제강과도 같은것이였다.
박영순동지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자기
주체98(2009)년 4월 4일이였다.이날 만수대예술단 삼지연악단의 공연을 보아주신
그날의 뜻깊은 좌석은 정녕 박영순동지에게 있어서 한생토록 못 잊을 영광의 시각이였다.
《발걸음》의 노래와 함께 우리 인민들속에 전설처럼 전해지던 그이의 이야기가 한꺼번에 떠오르며 박영순동지의 온몸은 세찬 격정으로 달아올랐다.
밝은 미소를 보내주시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책상을 마주하고 앉은 박영순동지는
또박또박 깨끗이 정서하여놓았다가는 또다시 지우고 고치고…
꿈속에서조차 사색을 멈추지 않고 자다가도 일어나 열정의 붓을 달리며 심혈을 기울이는 박영순동지의 모습은 그대로
해방전 소년로동으로 고달픈 하루해를 지우던 때에는 죽이라도 한번 배부르게 먹어보는것이 소원이였고 전후 야금로동자시절에는 소박한 자작시가 출판물에 실리는 때가 제일 기뻤던 박영순동지였다.그런 그가
70고령의 고문이 정력을 다하여 다듬고 또 다듬어나가던 노래, 그것은
30대 초엽부터 수백차례 절세위인들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우리 당의 주체적문학예술사상을 충직하게 받들어온 전사,
그가 걸은 한생의 자욱자욱이 선률이 되고 리듬이 되여 남겨진 노래들은 그 얼마인가.
《사회주의 우리 조국 빛내여가세》,
박영순동지가 남긴 노래들은 그 어떤 값진 재부에도 비할수 없는 귀중한 유산으로 되여 후대들의 가슴마다에 깊은 뜻을 새겨주고있다. 죽어서도 영생하는 충신의 삶, 그 숭고한 메아리는 박영순동지의 생애의 갈피갈피에 새겨진 감동깊은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전하고있다.
자나깨나
《영생하는 삶을 위하여.
…
무의미하게 100년을 사느니보다 단 하루를 살아도 자기 당과 자기
이것이
바로 이렇게 한생을 산 그였다.
그 영광스러운 자욱으로 하여 박영순동지의 생이 그토록 빛나는것이며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는것이다.
하기에 박영순동지는 오늘도 오중흡7련대의 대오에 서있다.열혈충신들의 대오에 영원한 삶의 자리를 정하고 천만인민을
당 제8차대회 결정을 높이 받들고 문학예술의 모든 전선에서 일대 혁명을 일으켜 주체문학예술의 새로운 개화기를 펼쳐야 하는 어렵고도 중대한 임무앞에서 우리의 창작가, 예술인들은 누구나 되새겨보아야 할것이다. 1970년대 문예인들처럼 충성의 일념으로 심장을 불태우며 시대가 부여한 혁명적예술인의 사명을 다해나가고있는가.
누구나 예술가이기 전에 참된 혁명전사로 산 박영순동지의 생애를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보며 한편의 글을 써도, 노래 한곡을 불러도
오늘도 영생하는 충신의 넋이
… 주체위업 받드는 일심단결의 대오에 백전백승 힘을 준 혁명의 영원한 7련대 내 나라 내 조국 부강을 지켜가며 오늘도 7련대 우리앞에 있어라 본사기자 김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