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11월 12일 로동신문

 

녀성특류영예군인이 수여받은 5개의 국기훈장

수십년세월 애국의 참된 삶을 수놓아가고있는
락랑구역 통일거리2동 33인민반 윤정희동무에 대한 이야기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력사적인 시정연설을 높이 받들고 온 나라 인민이 애국의 마음을 가다듬으며 사회주의의 더 밝은 래일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고있는 오늘 우리는 한 녀성특류영예군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게 된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나는 무엇을 바쳤는가라는 물음에 늘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애국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락랑구역 통일거리2동 33인민반에 사는 윤정희동무는 다른 사람의 방조가 없이는 마음대로 돌아누울수도 없는 불편한 몸이지만 수십년세월 전국각지의 사회주의대건설장들을 찾아 심금을 울리는 시랑송과 선동으로 건설자들을 고무추동하고있다.

나라에서는 그의 공로를 값높이 평가하여 높은 국가수훈을 거듭 안겨주었다.

평범한 녀성특류영예군인이 받아안은 5개의 국기훈장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애국의 길을 끝까지 걸을수 있으며 나라의 은덕을 순간도 잊지 않고 자나깨나 보답의 일념으로 심장을 불태우는 참된 공민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다시금 깊이 새겨주고있다.

 

세번째 선택

 

천추골변형, 골반골골절, 로동능력상실…

이것은 20여년전 군사임무수행중 뜻밖의 부상을 당하고 영예군인이 되여 고향에 돌아온 20살 꽃나이의 윤정희동무가 받은 가혹한 선고였다.

윤정희동무의 가슴은 찢기는듯 아팠다.

방안의 한 벽에 걸려있는 군복을 바라보느라니 눈물이 걷잡을새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할것인가.)

이것은 부상당한 첫날부터 그의 머리속에서 수백, 수천번도 더 고패친 생각이였다.그는 자기가 영예군인이 되여 돌아온 그날부터 늘 곁에서 떠날줄 모르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석쉼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정희야, 난 네가 이번에도 옳은 결심을 내리리라고 믿는다.너야 늘 스스로 장한 결심을 내리군 하지 않았느냐.》

사실이 그러했다.

중학교졸업을 앞두었을 때에도 그는 그처럼 열렬히 희망했던 대학으로가 아니라 대동강구역도시시설관리소(당시)로 탄원했다.교원들과 학급동무들모두가 놀랐다.그도그럴것이 윤정희동무가 하얀 위생복을 입은 의사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고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원이 되고싶어했다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시적인 흥분때문에 인생길을 멀리 에돌수 있다며 제나름의 충고를 주기도 했다.하지만 그는 어렵고 힘든 초소는 응당 청년들이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고 대답했다.

그의 부모도 우리 맏딸이 장한 결심을 했다며 적극 지지해주었다.

인생길은 선택의 련속이라고도 한다.자신의 리익과 사회와 집단의 리익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삶의 가치와 생의 보람이 결정된다.윤정희동무는 자기에게 차례진 향유의 권리보다 조국앞에 지닌 헌신의 의무를 먼저 생각했다.

이렇게 그는 대학이 아니라 누구나 선듯 가기를 저어하는 대동강구역도시시설관리소에 달려가 도로관리원이 되였다.

그의 가슴속에는 학창시절 철따라 새 교복을 안겨주고 온갖 사랑을 부어주는 나라의 은덕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싶은 강렬한 열망이 자리잡고있었다.

보람찬 로동의 날과 달이 흘렀다.자기의 땀과 열정이 스민 거리에 인민의 행복이 넘쳐나는것을 볼 때마다 자기 직업에 대한 긍지로 가슴이 부풀었다.

그후 그로 하여금 또다시 새로운 결심을 내리도록 한 계기가 있었다.주체82(1993)년 3월 전국, 전민, 전군이 준전시상태로 넘어갈데 대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이 하달되였던것이다.

온 나라가 원쑤격멸의 의지로 용암마냥 끓어번졌다.많은 사람들이 인민군대입대와 복대를 탄원했다.윤정희동무의 심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두번째로 결심을 내렸다.조국이 자기를 부른다는 자각, 조국보위는 공민의 신성한 의무라는 사명감을 안고 그는 용약 군복을 입고 초소로 떠나갔던것이다.그런데 하반신마비의 몸이 되여 돌아올줄이야…

윤정희동무는 분하고 억한 심정을 누를길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불구가 된 자기 일신상의 장래에 대한 우려때문이 아니였다.나라에 보탬을 주지 못할지언정 평생 조국의 짐이 되여 살아야 한다는 안타까움때문이였다.이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또다시 귀전을 울리였다.

《정희야,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불구가 되는것이 아니라 투쟁을 위한 삶, 조국을 위한 삶을 포기하는것이란다.우리 구역에 영예군인경제선동대가 있는데 너도 거기에 나가보지 않겠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윤정희동무는 한순간 주저하였다.내가 이 몸으로 육체가 성한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을 꽤 해낼수 있을가.

그는 머리맡에 놓았던 병사시절의 수첩을 펼쳤다.

거기에는 자기가 부상을 당한 날부터 알게 된 잊지 못할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병원에 입원해있은 수백일동안 자기의 몸에 흘러든 약들의 수량도 구체적으로 씌여있었다.후날 순간이라도 나약해질 때면 당과 조국의 은덕을 알고 일떠서자고 한자두자 눈물을 삼키며 적어넣은것이였다.

수첩의 갈피마다에 깨알같이 박혀있는 이름들과 수자들앞에서 그는 자기가 결코 쓰러질수도 물러설수도 없는 몸임을 의식하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렸다.이것은 영예군인 윤정희동무가 내짚은 보답의 세번째 걸음이였고 스스로 한 량심의 세번째 선택이였다.

(나에게는 아직 성한 두팔이 있다.그리고 청춘의 심장이 고동치고있다.저 영예군인메달이 빛나게 순간순간을 내 보람있게 살리라.)

 

애국의 길은 심장으로 간다

 

과연 무슨 힘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특류영예군인이 수십년세월 자기가 선택한 삶의 궤도에서 단 한치의 탈선도 모르고 꿋꿋이 달려올수 있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윤정희동무가 애용하는 3권의 부피두툼한 전투기록장에 력력히 어려있다.

전투기록장, 비록 울부짖는 총포성은 들리지 않아도 그는 자기의 경제선동대활동정형을 기록한 책의 뚜껑에 전투기록장이라고 새겨넣었다.

그 첫페지에는 이런 맹세문이 씌여있다.

《…꿈결에도 애국의 길에서 순직할 일념으로 가슴을 불태워가며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 의 노래높이 장군님께서 인민생활문제를 걱정하시면 한대의 방직기가 되고 석탄문제를 걱정하시면 이 한몸 채탄기가 되고 전기문제를 걱정하시면 한몸이 그대로 타빈이 되겠다.…》

조국을 받드는 복무의 길, 애국의 길을 병사의 보폭으로 변함없이 걸어갈 신념의 맹세가 맥박치는 이 글은 그가 첫 경제선동을 떠나면서 적은것이다.

《주체85(1996)년 5월 20일

락랑구역 락랑협동농장 제1작업반 모내기전투장에서 2차에 걸쳐 경제선동 진행.》

《주체97(2008)년 1월 1일

동평양화력발전소 타빈직장에서 경제선동 진행.》

《주체99(2010)년 11월 29일

희천발전소건설장 지원 및 경제선동 진행.》…

비록 한두줄밖에 되지 않는 전투기록들이지만 여기에는 가슴뜨거운 사연들이 깃들어있다.

윤정희동무가 경제선동을 시작한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아침이였다.

어머니는 밤새 앓음소리를 내며 잠 못이룬 딸에 대한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사실 윤정희동무의 하반신에는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여러 군데 있었다.피고름이 고여있는 상처로 땀방울들이 스며들 때의 아픔을 이겨내느라 입술을 앙다물던 딸의 모습을 한두번만 보지 않았던것이다.그러나 윤정희동무는 머리를 흔들었다.

《힘들다고 자기가 맡은 임무를 도중에 줴버린다면 병사라고 말할수 있겠나요.어머니, 절 포전에 데려다주세요.나라의 긴장한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고싶어요.》

그는 어머니와 함께 경제선동의 길에 또다시 나섰다.

그가 이렇게 모진 아픔을 강잉히 이겨내며 경제선동의 길에 오르던 날이 그 얼마였던가.

영예군인경제선동대가 가는 곳마다에서 혁신의 불길이 세차게 타번졌다.사람들은 영예군인들의 불굴의 투쟁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윤정희동무는 가슴벌게 받아안는 꽃다발을 바라보며 생의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생활이란 결코 단순한것이 아니다.복잡다단한 생활에는 모진 슬픔도 있었다.

《주체86(1997)년 7월 27일

평양의암고등중학교 학생들과 상봉모임 진행.》

오늘도 그는 이날에 있은 상봉모임을 잊지 못하고있다.

명절날이라고는 하지만 가정의 분위기는 추연했다.군사복무를 하던 그의 남동생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받은 때로부터 어느 정도 시일이 흘렀지만 아직 슬픔은 채 가셔지지 않았다.

조선인민군입대증들을 바라보며 윤정희동무는 어깨를 들먹이였다.

벽에는 한해전 언니가 지켜섰던 초소로 달려나간 셋째동생의것까지 3개의 입대증이 걸려있었다.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내 동생아, 나를 기다리고있을 학생들이 장차 너의 자리를 메워주는 초병들이 될것이다.)

마을사람들은 혈육을 잃은 아픔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서는 그를 눈물속에 바래워주었다.

이렇게 윤정희동무는 경제선동의 날과 달을 이어갔다.

그로부터 13년후 윤정희동무는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크게 한 일도 없는 영예군인에게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를 안겨준 고마운 조국의 사랑에 보답할 마음 안고 그는 경제선동의 길을 줄기차게 이어갔다.

이 나날 그의 이름은 강원도와 황해남도, 평안북도의 토지정리전투장들과 마식령스키장건설장의 전투원명단에 올랐다.

전투원명단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넣을 때마다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특류영예군인인 그가 집의 침상에 편히 누워지낸다고 하여 탓할 사람은 없다.그러나 그는 늘 불같은 삶을 줄기차게 이어갔다.

나라에서는 불편한 몸으로 사회주의대건설장들을 찾아 경제선동을 진행하는 그의 애국심을 값높이 내세워주었다.

윤정희동무는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은 때로부터 3년후에는 국기훈장 제3급을, 그로부터 2년후에는 국기훈장 제2급을 또 2년후에는 국기훈장 제3급을 수여받았다.지난해 9월 그는 또다시 국기훈장 제3급을 수여받는 영예를 지니였다.

신념이 강한 인간만이 이렇게 삶의 순간순간을 애국으로 수놓아갈수 있는것이다.

지난 7월 어느날 그가 평양시 1만세대 살림집건설장을 찾았을 때였다.

년로보장을 받은 아버지와 함께 현지에 도착한것은 땡볕이 내려쪼이는 한낮이였다.소박한 지원물자를 안겨주고 조용히 돌아서려고 하던 그에게 군인건설자들이 달려와 건설장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서 경제선동을 해달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는 망설이였다.정상사람들이라면 단숨에 올라갈수 있는 건물이였지만 그에게는 도저히 오를수 없는 아득한 곳이였던것이다.바로 그때 군인들이 그가 앉아있는 사륜차를 번쩍 들어올렸다.한층 또 한층 오를수록 군인들의 얼굴에서는 땀이 흐르고 윤정희동무의 두볼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이날 그는 온 건설장을 내려다보면서 마이크를 틀어잡았다.

《군인동지들, 저는 하반신이 마비되였습니다.하지만 영예군인을 보란듯이 내세워주고싶어하는 동지들의 마음에 떠받들려 여기까지 올라왔습니다.…저의 몫까지 합쳐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 기쁨을 드려주십시오.》

이날 그는 마이크를 억세게 틀어잡고 힘있는 경제선동을 벌렸다.

사실 의학계는 이미 수십년전에 그에게 로동능력상실이라는 진단을 내렸다.하지만 그는 성한 사람들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있다.

하다면 그가 무슨 힘으로 애국의 길을 줄기차게 이어갈수 있었는가.

언제인가 윤정희동무는 자기의 건강을 두고 몹시 걱정하는 의료일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애국의 길은 두다리가 아니라 심장으로 가는것이 아닙니까.이 길을 걷는것은 내스스로 심장에 내린 전투명령입니다.》

이 신념은 그에게 있어서 삶의 옳바른 방향각을 가리켜준 생의 라침판이였으며 한번 선택한 애국의 길을 굴함없이, 드팀없이 끝까지 걸어갈수 있게 해준 마음의 기둥이였다.

사람들이여, 우리 잠시 녀성특류영예군인이 이어가는 애국의 길에 자기를 세워보자.그리고 심장에 손을 얹고 대답해보자.

나는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공민의 본분을 다하고있는가.당의 구상을 받들어 자기 한몸을 얼마나 내대고 불태워가는가.

 

온넋으로 부르는 고마움의 노래

 

윤정희동무는 구역의 자랑, 인민반의 자랑으로 되고있다.

단순히 그가 영예군인이여서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경제선동을 떠나는 그의 뒤를 따라 출근길에 오르며 일터에서 더 많은 일을 할 결심을 가다듬었고 깊은 밤 그의 집에서 울려나오는 시랑송을 들으며 자기의 하루를 총화해보군 한다.스승과도 같고 인생의 참된 거울과도 같은 윤정희동무를 위한 일이라면 누구나 자기 일처럼 뛰여다닌다.

남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것이 기풍으로 되고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또 하나의 미담을 낳았다.

윤정희동무가 영예군인의 몸으로 경제선동을 시작한 때로부터 몇해후 한 청년이 인생의 영원한 길동무가 될 결심을 안고 찾아왔던것이다.

어느 한 단위에서 일하는 리봉수동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새 가정을 이룬 그들부부에게 사랑의 선물을 보내주시였다.

주체86(1997)년 12월 18일부 《로동신문》에는 평양산원 2부인과 의료일군들의 지극한 정성속에 한 녀성특류영예군인이 귀여운 옥동자를 낳았다는 소식이 실리여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윤정희동무였다.

귀중한 청춘시절에 조국을 위해 한몸 내대였던 영예군인들을 금방석에 떠받들려는 우리 당의 숭고한 뜻은 윤정희동무의 생활속에 가지가지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꽃피웠다.

메아리음향사의 일군들과 종업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아와 친혈육의 심정으로 도와주었다.

생활의 구석구석을 돌봐주는 고마운 사람들의 살뜰한 정을 느낄 때마다 그는 사랑이 공기처럼 흐르는 우리 나라 사회주의대가정에 안겨사는 행복감을 가슴뿌듯이 느끼군 하였다.

그러던 몇해전 어느날 김형직사범대학 원격교육학부의 일군들이 집에 찾아왔다.

《대학생이 되고싶어한다지요.우리 대학의 원격교육체계에 망라되여 공부합시다.》

그가 대학생이 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윤정희동무는 제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는 사람들이 고마와 울었고 이런 아름다운 인간들을 키워준 사회주의조국이 고마와 두볼을 적시였다.

그 감정을 그대로 시어에 담았다.

출판물에 실리여 독자들로부터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시 《나는 영예군인대학생이다》는 이렇게 태여났다.

대학공부는 그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치렬한 전투였다.

어느 하루, 어느 한시각도 고통이 따르지 않는 때가 없었지만 그는 초소의 전우들과 고마운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영예군인들을 적극 우대하고 내세워주는 사회주의조국의 사랑을 되새기며 이를 악물고 콤퓨터를 마주했다.

이렇듯 피타는 정열이 있어 지난해 12월 그는 최우등으로 대학을 졸업할수 있었다.대학의 일군들이 집에 찾아와 그에게 졸업증을 안겨주었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어디 있겠는가.고마운 내 조국을 위해 나의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깡그리 바치리라.)

그의 심장은 이렇게 웨치고있었다.

어려울수록 서로 위해주는 덕과 정, 이것이 아니였더라면 윤정희동무가 어떻게 생활의 세찬 비바람을 이겨내고 오늘까지 줄달음칠수 있었으랴.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는 지난해에 그가 삼가 올린 글작품집 《영원한 축복》을 보아주신데 이어 올해 4월 또다시 글작품집 《영원한 병사의 행군길》을 보아주시는 영광을 베풀어주시였다.

이뿐이 아니다.

지난 7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는 대학을 졸업한 기쁨과 함께 조국을 위해 애국헌신의 자욱을 새겨갈 불같은 결의를 담아 윤정희동무가 삼가 올린 편지도 보아주시였다.


* *


몇달전 윤정희동무의 집에 경사가 났다.만경대혁명학원에 이어 군관학교를 졸업한 아들이 휴가를 받고 온다는 소식이 왔던것이다.

이날 그는 가슴에 훈장을 달고 아들을 마중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과 감동을 금치 못했다.특류영예군인 윤정희동무의 가슴에 빛나는 훈장들을 처음 보았던것이다.

사실 그가 국기훈장 제1급을 비롯한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를 지니였다는데 대하여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자기가 하는 일을 평범한것으로, 복무의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할 영예군인으로서 응당한것으로 여긴 그가 국기훈장들을 수여받던 날들밖에 달지 않았기때문이다.

녀성특류영예군인이 받은 5개의 국기훈장,

그것은 열화같은 애국심이 낳는 인생의 기적을 전하고있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신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