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1월 21일 로동신문

 

론설

사적소유에 기초한 불평등과 특권이
합법화된 반인민적인 사회

 

불평등과 특권이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매 사람들의 존엄과 가치가 존중될수 없고 사람들사이에 불신과 반목, 증오와 적대의 관계가 산생되여 사회를 분렬시키고 파멸에로 몰아가게 된다.

그런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사회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자본주의제도는 소수 특권계급을 위한 제도이며 근로대중에게 무권리와 빈궁을 가져다주는 반인민적제도입니다.》

자본주의는 사적소유에 기초하고 불평등을 전제로 하고있는 사회이다.

사적소유는 사회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으로 갈라놓는다.따라서 심각한 계급적대립과 사회적불평등을 초래한다.

생산수단을 소유한자들은 무제한한 특권을 행사하며 근로대중의 자주적인 요구를 횡포하게 유린한다.반면에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근로대중은 아무런 권리도 행사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근로자들이 주권행사에서 제외되고있는것만 놓고보아도 그렇다.

자본가계급은 자기의 정치적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근로대중에게 그 어떤 자유와 민주주의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들을 정치생활에서 극력 배제한다.

우선 재산, 지식정도, 거주기간 등을 구실로 한 각종 제한조치들에 의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선거에서 제외된다.

또한 선거전자체가 돈뿌리기경쟁인것으로 하여 근로자들이 여기에 참가할수 없다.자본주의나라에서 당선되자면 선거경쟁본부를 꾸리고 선거구들을 돌면서 연설을 하며 TV나 신문, 잡지에 선거광고를 내는 등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야 하는데 여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결국 자본주의나라들에서의 선거는 권력쟁탈을 위한 특권계층의 경쟁에 불과하다.

말로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있는듯이 광고하고있지만 실지는 막대한 재부를 틀어쥔 소수의 계층만이 정치적특권을 누리고있다.

자본주의나라들에서의 선거는 이처럼 근로대중에게 정치적자유와 권리를 주기 위한것이 아니라 독점자본가들의 정치적지배를 강화하기 위한것이다.

광범한 근로대중이 부르죠아정치에 등을 돌려대고있는것은 당연하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근로대중에 대한 착취와 략탈도 사적소유제도에 의해 합법화되고있다.

사적소유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수단을 독점한 착취계급과 자기 로동력에만 의거하여 생존을 유지해나가야 하는 피착취계급사이에 평등이 이루어질수 없다는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자본가들은 근로대중을 물질적생산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그들의 로동력을 상품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국가가 실시하는 경제정책들과 경제분야의 법규범들은 모두 사적소유제도를 옹호유지하기 위한것으로서 자본가들로 하여금 근로대중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여 높은 리윤을 얻을수 있는 온갖 조건을 마련해준다.

생산수단과 물질적재부를 장악한 자본가계급은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통하여 끊임없이 리윤을 늘이고있다.

근로대중이 뼈빠지게 일하여 아무리 많은 생산물을 창조해도 그것은 모두 생산수단을 차지한 소수 특권계층에게 집중된다.

지어 과학기술성과들마저 점유되여 사회의 량극화를 해소하는것이 아니라 빈부차이를 더욱 극대화하는 결과만을 가져오고있다.

빈부의 차이는 극한점에 이르러 자본주의는 력사상 최악의 불평등사회로 악명을 떨치고있다.

한줌도 못되는 부유계층들이 무제한한 특권을 누릴 때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초보적인 자유와 민주주의마저 짓밟힌채 사회적불평등의 희생물이 되여 신음하고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소수만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다수는 빈궁에 시달리고있으며 소수만이 특권을 행사하고 다수는 아무런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고있다.

어느 한 자본주의나라의 대도시에는 강을 경계로 완전히 판이한 두개의 구역이 공존하고있다.

한 구역은 경제의 명맥을 틀어쥐고있는 특권족속들이 살며 쾌락을 즐기고있는 곳이다.이자들은 요란한 집들에서 살면서 거리에 늘어선 값비싼 식당들에서 매일 밤 거액의 돈을 탕진하고있다.이 호화구역에 자리잡은 류행복상점, 보석상점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부자들로 붐비고있다.

다른 구역은 근로대중이 극도의 빈궁속에 허덕이는 곳이다.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있으며 거리에 차넘치는 방랑자들은 감옥에 들어가 죄수밥이라도 정상적으로 먹는것을 다행한 일로 간주하고있다.

한쪽에서는 부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고급주택들에서 애완용동물들을 끼고 호화생활을 하고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대를 두고서도 빈곤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수 없는 사람들이 간신히 연명하고있는것이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희망이란것을 전혀 찾아볼수 없다.경제가 장성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빈민들만이 모여사는 지역사회에 아무런 혜택도 가져다주지 못하며 오히려 빈부격차만 커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있다.그래서 이 두 구역사이를 오가는것은 상상 못할 호화의 세계로부터 끔찍한 빈궁의 세계로 려행하는것과 같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하면서 이 나라의 한 연구기관은 개인의 빈부, 직업의 유무와 관련한 정보는 모두 우편번호에 반영되여있다고 밝히였다.즉 우편번호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이 사는 지역들이 갈라져있다는것이다.

그러면서 태여나자마자 맞다들리게 되는 불평등현상과 빈부격차는 이웃한 지역사회들간의 이런 선명한 차이를 통해 알수 있다고 개탄하였다.

특권은 더욱더 특권을 옹호하는데 리용되고 빈곤은 시종일관 빈곤을 낳아 《계급의 곬》이 날로 깊어지고있다는것이다.

세계에 자본주의진렬장으로 알려져있는 어느 한 도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도처에 장식등이 번쩍이고 초고층건물들이 밀집된 지상과는 달리 지하에는 너무도 판이한 세계가 펼쳐져있다.

불과 몇m우의 지상에서는 하루밤사이에도 거액의 돈이 왔다갔다하지만 지하에서는 집없는 사람들이 판종이로 만든 관같은데서 자고있다.

역한 냄새가 나는 이 어지러운 지하굴에서 사는 빈민들은 강물이 불어나면 모든것이 잠기게 되기때문에 어느 하루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한 외신은 자본주의사회에서 부단히 심화되고있는 빈부격차의 《대변인》이라고 칭하였다.

바로 이것이 사회적불평등이 낳은 두 세계의 대조적인 모습이다.

허리가 꺾어질 정도로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수 없고 설음의 피눈물을 삼켜야 하는것이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근로대중이다.

부르죠아변호론자들이 입버릇처럼 떠드는 《물질적번영》은 한줌도 못되는 부자들에게만 해당될뿐 절대다수의 피압박인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다를바 없다.

사적소유에 기초하고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참다운 자유와 민주주의, 만민평등이란 결코 있을수 없다.

부익부, 빈익빈의 량극분화가 극도에 이른 자본주의는 지금 커다란 사회적위기에 직면하고있다.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경제생활에서의 차이를 조장, 증대시키는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것으로 하여 해결할수 없는 내부모순을 안고있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첨예화된적은 일찌기 없었다.

극소수 특권계층과 근로대중사이의 모순과 대립은 반드시 대대적인 사회적폭발을 가져올것이며 자본주의사회는 수습할수 없는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헤여나오지 못할것이다.

재부와 권력을 독차지한 극소수의 착취자, 억압자들이 무제한한 특권을 누리며 근로대중의 존엄과 권리를 무참히 짓밟고 실업과 빈궁만을 강요하는 비인간적이고 반인민적인 사회는 인민의 버림을 받기마련이며 그런 사회가 사멸되는것은 피할수 없는 법칙이다.

사회적인간의 존엄과 인격을 빛내이며 서로 화목하고 정을 나누면서 단란하고 행복하게 살아나가려는것은 인민대중의 본성적요구이다.

이러한 집단주의적요구는 오직 근로인민이 모든것의 주인으로 되여있는 사회주의사회에서만 참답게 실현될수 있다.

인민대중이 생산수단을 비롯하여 모든것의 주인으로 되여있는 사회주의사회에서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하나를 위하는 집단주의사상이 유일적으로 지배하게 되며 사회적불평등을 낳을수 있는 온갖 조건이 없어지게 된다.

사회주의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공통된 지향을 안고 공동의 노력으로 끊임없이 전진해나가는 가장 정의롭고 생활력있는 사회이다.

사회주의에로 나아가는 길만이 인민대중의 자주적리상을 실현하는 길이다.

허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