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1월 21일 《우리 민족끼리》
[좌담회] 절대로 합리화될수 없는 령토강탈책동
출연자: 조국통일연구원 실장, 《우리 민족끼리》편집국 론설원, 기자
기자: 최근 일본반동들이 새해에 들어서기 바쁘게 《독도령유권》을 주장하는 놀음에 계속 매달리고있다. 지난 17일에도 일본외상은 국회외교연설이라는것을 통해 《독도는 력사적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국제법상으로도 일본고유의 령토》라느니, 《이 기본적인 립장에 립각하여 강경하게 대응하겠다.》느니 하며 독도강탈야망을 더욱 로골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이보다 앞서 지난 16일에는 일본기상청이 홈페지를 통하여 독도가 일본령토인것처럼 되여있는 지도를 공개하는 망동을 부렸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 우리 겨레와 국제사회는 일본의 파렴치하고 날강도적인 행위에 치솟는 격분을 금치 못해하고있으며 일본이 당장 독도와 관련한 거짓여론전과 부당한 행태를 중지하고 조선민족앞에 사죄할것을 강력히 요구하고있다. 그럼 오늘 시간에는 일본반동들의 《독도령유권》주장이 얼마나 허황하고 부당한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론설원: 력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법적으로 볼 때 독도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령토라는것은 세상이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력사적으로 볼 때 독도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들은 바로 고대조선사람들이다. 고대조선사람들은 울릉도에 건너가 원시림을 찍어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 한편 봄, 여름, 가을에는 독도에 건너가 물고기잡이를 하면서 그곳에도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기자: 삼국시기에도 우리 조선사람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적극 진출하여 활동하지 않았는가? 론설원: 그렇다. 5세기말∼6세기초에 울릉도와 독도는 고구려사람들의 거주지이자 활무대였다. 그리고 512년에 우산국이 신라에 편입된 후 울릉도, 독도주민들은 주로 신라사람들로 꾸려졌다. 그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도 일본과 사신왕래와 문화교류를 많이 가지였는데 발해의 사신들과 상인들은 많은 경우 울릉도와 독도를 거쳐서 일본렬도로 건너가군 하였다. 기자: 삼국시기를 거쳐 고려시기에 와서도 독도는 우리 조선사람들이 관할했다고 알고있는데. 실장: 물론이다. 12세기 중엽이후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고려의 울진현에 소속되였다. 그리고 울릉도에 살면서 독도에 자주 건너가 물고기잡이를 한 사람들 역시 우리 조선사람들이였다.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봉건왕조도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주권을 시종일관 행사해왔다. 기자: 이것만 보아도 독도가 명백히 우리 민족의 령토라는것을 잘 알수 있다. 독도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령토라는데 대해서는 일본정부도 수백년전부터 인정하지 않았는가. 실장: 그렇다. 1696년 1월 당시 도꾸가와막부는 독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정을 내렸다. …독도는 조선에서 40리(조선의 리로 400리)정도 떨어져있고 일본으로부터는 160리(조선의 리로 1 600리) 떨어져있기때문에 일찌기 그 나라 땅이라는것이 의심할바 없을것 같다. 요나고의 어민들이 그 섬에 고기잡이를 하겠다고 청원하기에 허락한것이지 당초에 이 섬을 저 나라에서 빼앗은것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고기잡이를 하는것을 금지해야 할뿐이다. 이에 대하여 조선정부에 알려줄것이다. … 이 결정은 일본이 발행한 도서 《조선통교대기》 8권과 일본《공문록》 내무성부 1권에 명백히 밝혀져있다. 이 결정에 따라 막부정부는 울릉도수역에서 일본인들의 어업과 목재채벌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으며 1699년에는 일본과 조선봉건정부사이 문서를 교환하고 울릉도, 독도에 대한 일본인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것은 일본의 막부정부가 독도가 저들의 령토가 아니라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명백히 인정하고 조선봉건정부에 확약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론설원: 막부정부의 뒤를 이은 《명치정부》도 독도에 대한 조선령유권을 명백히 인정했다. 일본내무성이 1877년에 전국적인 지리조사를 진행할 때 시마네현에서 제기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5개월동안 검토, 조사하고 그 결과를 최고정부기관인 태정관에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과 관계없는것으로 할데 대한 지령서를 내무성과 시마네현에 내려보냈다. 이것은 일본정부가 독도는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인정한 위력한 근거로 된다. 뿐만아니라 일본륙군성과 해군성도 1875년과 1876년에 각각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인정했다. 기자: 제2차 세계대전이후 20세기중엽까지도 일본이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았는가. 실장: 그렇다. 일본은 1951년 2월 13일 《대장성령 4호》와 6월 6일 《총리부령 24호》에서 독도를 일본의 부속섬에서 제외한다는것을 공포하였다. 그후 일본은 1960년과 1968년에 이 두개의 법령을 개정하였는데 그때에도 독도를 일본의 부속섬에서 제외한다는 조항만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일본내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총리부》와 《대장성》이 독도가 저들의 령토에 속하지 않는다고 규정한것은 일본이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국내법으로 고착시켰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기자: 일본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오래전부터 인정하고있다고 보는데. 론설원: 물론이다. 19세기중엽 유럽인들이 제작한 옛 해도들을 보면 그들이 머물렀던 매개 나라의 바다와 섬들이 자세히 그려져있고 령유권도 정확히 표기되여있다. 그 해도들의 대부분이 독도를 조선의 섬으로 표기하고있다. 이에 대해서는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가지고있는 옛지도들이 위력한 증거이다. 특히 1857년과 1882년 로씨야해군이 만든 해도인 《조선동해안도》에는 독도의 동도와 서도에 대한 령유권이 조선에 있다는것을 명백히 표시하였다. 이것은 유럽인들까지도 이미 19세기부터 독도가 일본이 아니라 조선의 섬이라는것을 인정하고있었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기자: 이상의 자료들만 가지고도 독도가 우리 민족 고유의 땅이라는것을 충분히 알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일본당국이 독도를 저들의 땅이라고 생떼를 쓰는것이야말로 참으로 뻔뻔스럽고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러면 일본당국이 왜 그처럼 집요하게 《독도령유권》을 주장하는가 하는것이다. 실장: 그것은 우선 조선반도재침의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자는데 있다. 조선반도를 집어삼키고 나아가서 《대동아공영권》의 옛 야망을 실현하려는 일본의 흉심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것이 없다. 독도를 타고앉은 다음 그 섬을 전초기지로 하여 울릉도를 손에 넣고 나아가서는 조선반도에 대한 재침야욕을 기어코 실현하자는것이 일본반동들의 변함없는 야심이다. 바로 이로부터 일본반동들은 아무런 과학적근거도 없는 《독도령유권》을 계속 주장해서 국제사회에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각인시키고 일단 유사시 독도강탈의 명분을 쌓으려고 꾀하고있다. 기자: 일본이 《독도령유권》을 주장하는데는 다른 목적도 있지 않는가. 실장: 다른 하나의 목적은 일본이 독도주변과 조선동해에 엄청나게 매장되여있는 수산자원, 광물자원에 강한 눈독을 들이고있는것과 관련된다.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독도를 비롯한 조선동해에는 무려 600여종의 물고기와 낙지, 문어와 같은 두족류, 그리고 조개, 소라, 털게, 왕새우, 해삼, 성게와 같은 고급어족들이 대단히 많다. 조선동해에는 표사광물자원, 자생광물자원, 기반암광물자원 등 광물자원도 매우 풍부하다. 특히 독도주변수역에는 21세기의 대표적인 에네르기자원으로 꼽히는 메탄수화물이 얼음결정상태로 굉장한 량이 매장되여있다. 한마디로 독도는 세계에서 아직 개척되지 않은 《자원보물고》라고 말할수 있다. 바로 이런 무진장한 자원에 눈독을 들이고 지금 일본반동들이 계속 《독도령유권》주장을 들고나오며 억지를 부리고있는것이다. 기자: 정말 독도강탈책동에 미쳐날뛰는 일본의 그 음흉한 목적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되였다. 일본의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령토강탈행위가 북과 남, 해외 전체 조선민족의 치솟는 격분을 자아내고있는것은 너무도 응당한것이다. 오늘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우리 겨레는 일본반동들의 령토강탈책동에 각성을 높이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단호하게 짓부셔나가야 할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