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3월 31일 로동신문
우리 세대의 삶의 거울, 귀중한 본보기 목숨을 바칠지언정 땅은 한치도 묵일수 없다 녀성보잡이운동의 선구자 김락희동지에 대한 이야기
《우리 농업근로자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당과 뜻을 같이하고 사회주의와 운명을 함께 하면서 농촌의 혁명진지를 굳건히 지키고 쌀로써 당과 혁명을 보위해온 충직하고 애국적인 근로자들입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등마루소년빨찌산에서 적후투쟁에 참가하였던 김락희동지는 재진격하는 인민군대를 따라 고향마을에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고향의 풍경은 너무도 참혹하였다. 모범농민이며 리인민위원장이였던 아버지는 원쑤놈들에게 무참히 학살당하였고 마을은 페허나 다름없었다. 원쑤들에 대한 치솟는 복수심을 안고 김락희동지는 리당에 찾아가 군대에 나가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두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오열을 터치는 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리당일군은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후방도 전선이고 우리도 전호에 서있는 병사이다.한알의 쌀이라도 더 많이 내는것이 쓰러진 아버지의 원쑤를 갚는 길이다.… 리당일군의 말을 심장에 쪼아박은 그는 등짐으로 거름을 져나르고 가마니를 털어가며 한알두알 종자도 마련했다.그런데 막상 봄철이 와서 농사를 짓자고보니 밭을 가는것이 문제였다.장정들이 모두 전선으로 떠나가다나니 마을에 남자라고는 늙은이들뿐이였고 거의 모두가 녀성들이였다.누구에게 밭을 갈아달라고 부탁할데도 없었고 그렇다고 농사철이 다가오는데 한정없이 앉아뭉갤수도 없었다.
그무렵
(녀자라고 보잡이가 못된다는 법이야 없지 않은가.) 그는 자기의 생각을 여러 사람에게 비쳐보았다. 하지만 모두가 도리머리를 쳤다. 보잡이라는게 보기에는 쉬워보여도 매우 힘들다는것, 한손으로는 소를 다루면서 다른 한손으로 보탑을 움직이자면 웬간한 남자들도 힘들어한다고 하면서 팔을 내저었다. 어느날 밤 김락희동지는 한 일군의 도움을 받아가며 소를 몰고 보탑을 잡았다.역시 눈에는 익고 손에는 설다고 남정네들이 손쉽게 하는것처럼 느껴지던 밭갈이가 그처럼 힘이 들고 많은 요령과 경험을 동반해야 하는 일인줄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되였다. 이튿날 아침 그는 소를 몰고 또다시 밭으로 나가 보탑을 잡았다.하지만 밤을 새운탓인지 몇발자욱 못가서 숨이 꺽꺽 막히고 팔이 후들후들 떨리였다.그의 온몸은 잠간사이에 물주머니가 되였다.있는 힘을 다해 갈아엎었다는 밭에도 겨우 보습자리만 나있었다.그것을 보니 너무도 안타까와 눈물이 불쑥 솟구쳤다.지친 몸을 가까스로 움직이는 딸의 정상이 너무도 애처로와 그의 어머니도 몇번이나 그만두라고 말리였다.
그때 김락희동지의 눈앞에는 복수를 당부하며 피의 절규를 남긴 아버지의 모습이 안겨왔다.아버지는 그에게 다시는 행복했던 생활을 빼앗길수 없고 노예살이를 강요당할수 없다, 네가 한치의 땅도 묵이지 않고 제때에 갈아엎는것이 우리
목숨을 바칠지언정
이런 각오를 안고 김락희동지는 보탑을 더욱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그는 원쑤놈들의 가슴팍에 복수의 총창을 박는 심정으로 보습날을 힘껏 땅에 박았다.보탑을 억세게 틀어잡고 내려누르니 땅이 량옆으로 쩍쩍 갈라지며 흙밥들이 쌓이기 시작했다.그렇게 애를 쓰며 그는 마침내 500여평이나 되는 논을 혼자힘으로 다 갈아엎게 되였다. 신심이 생긴 김락희동지는 논밭머리에서 처녀들과 마주앉았다.
그의 말을 듣고 처녀들이 강잉히 보탑을 틀어잡았다.뒤이어 아주머니들까지 책상물림인 락희가 논밭을 가는데 우리라고 못하겠는가고 하며 모두 떨쳐나섰다.이렇게 되여 며칠사이에 40여명의 녀성들이 보잡이로 떨쳐나섰으며 녀성들로 무어진 봄밭갈이돌격대까지 조직되였다. 김락희동지는 녀성들의 앞장에서 보탑을 잡고 땅을 억척같이 갈아나갔다.논 4천여평에 대한 세벌갈이를 솜씨있게 진행한 그는 일손이 바쁜 인민군후방가족의 논밭도 도맡아 갈았다. 그의 모범을 따라 다른 녀성들도 한치의 땅이라도 묵일세라 이악하게 밭갈이를 하였다. 놈들의 비행기가 하루에도 몇차례씩 달려들어 논과 밭들에 폭탄을 마구 떨구는 속에서 진행하는 밭갈이는 목숨을 내건 사생결단의 싸움이였다.폭탄이 작렬하는 속에서 달아나는 소를 구원해보겠다고 따라가다가 원쑤들의 기총탄에 맞아 쓰러진 녀인도 있었고 죽어가는 소를 부여잡고 왕왕 울음을 터뜨리는 처녀도 있었으며 파편이 박힌 다리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나오는데도 폭격을 피해 달아나는 소의 고삐를 놓지 않는 녀성도 있었다. 가증스러운 적기의 폭격과 기총사격에 얼마 되지 않는 소들마저 줄어들고 보습들이 파괴되여갔지만 김락희동지와 녀성들은 추호의 동요도 몰랐다.
놈들이 아무리 발악하여도
김락희동지는 이렇게 마을녀성 80여명을 이끌어 보잡이들로 키워냈으며 논에 랭상모를 도입하여 정보당 13t의 벼를 생산함으로써 전시식량을 보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락희동지의 모범은 삽시에 온 나라 농촌에 보급되였으며 수천명의 녀성들이 저저마다 보탑을 잡고 밭갈이에 떨쳐나섰다.
주체41(1952)년 1월
불같은 보답의 일념 안고 그해 가을에 례년에 없는 다수확을 또다시 안아온 김락희동지는 전쟁승리에 다소나마 이바지하고저 많은 량의 량곡을 전선원호미로 바치였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왔다.하지만 당에서 바라는대로 어떻게 하나 다수확의 높은 목표를 점령해나가려는 우리 농업근로자들의 투쟁정신과 기풍은 변함없이 억세게 이어지고있다. 우리 당이 제시한 사회주의농촌건설목표를 빛나게 실현해나갈 드높은 열의를 안고 봄철영농전투에 떨쳐나선 전국의 농업근로자들은 쌀로써 우리 혁명을 보위하고 사회주의를 지켜갈 일념으로 심장의 피를 펄펄 끓이고있다. 목숨을 바칠지언정 한치의 땅도 묵이지 않으려는 결사의 각오를 품고 해마다 다수확을 안아왔던 조국해방전쟁시기 녀성보잡이들의 고귀한 투쟁정신을 따라배워 오늘의 시련과 난관을 웃으며 뚫고헤쳐 사회주의전야에 풍요한 가을을 안아오려는것이 미더운 농업근로자들의 한결같은 지향이며 의지이다. 본사기자 조경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