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5월 6일 로동신문

 

성실한 인간의 삶은 누구나 잊지 못한다

안주시 상서협동농장 제4작업반 반장이였던
심일우동무에 대한 이야기

 

《…앞에서도 많이 이야기했지만 그는 참으로 성실한 인간이였습니다.그래서 더더욱 온 농장이 그를 잊지 못하는것이구요.》

알곡증산을 위해 아글타글 노력하다가 지난 1월 포전에서 생을 마친 안주시 상서협동농장 제4작업반 반장이였던 심일우동무에 대하여 리당일군은 이런 말로 이야기끝을 맺었다.

하지만 우리는 쉬이 취재수첩을 덮을수 없었다.나라의 쌀독을 채우기 위해 한생을 피타게, 성실하게 살아온 한 농촌초급일군의 헌신적인 모습이 눈앞에 계속 밟혀왔기때문이였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자기 일터, 자기 초소를 사랑하고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유명무명의 애국자들에 의하여 나라가 부강해지고 사회주의락원이 일떠서게 되는것입니다.》

지난 1월 새해의 첫아침 안주시로 향한 도로를 따라 한대의 뜨락또르가 기세좋게 달리고있었다.뜨락또르에는 심일우동무가 타고있었다.

작업반포전들의 지력개선에 도움이 될수 있는 도시진거름을 마련하기 위해 가는 길이였다.

그날 아침 밥술을 놓자마자 서둘러 토방에 걸터앉아 신발끈을 매는 그에게 안해는 몹시 서운한 어조로 물었다.

《오늘은 새해 첫날인데 꼭 일을 나가야 하나요?》

그 말에 심일우동무는 빙긋이 웃어보일뿐이였다.

그라고 왜 명절날만이라도 가족들과 함께 쉬고싶은 생각이 없었겠는가.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대부분이 비탈밭인 작업반포전들에 자급비료를 듬뿍 내지 못한다면 한해 농사의 성과를 기대할수 없기때문이였다.그래서 양력설명절의 하루도 그는 거름운반에 바쳤다.그는 30여년세월을 하루와 같이 그렇게 척박한 포전을 살붙이처럼 여기며 깨끗한 량심을 묻어왔다.

사실 그는 10여년전에 뜻밖의 일로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이였다.그때 그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병원으로 실려가게 되자 농장사람들은 그의 건강이 회복되자면 적어도 몇달은 잘 걸릴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한달도 채 못되여 쌍지팽이를 짚고 자기 작업반 3분조포전에 나타날줄이야.

반원들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하지만 그 놀라움은 인차 자책으로 뒤바뀌였다.

작업반적으로도 그중 지력이 낮은 포전이여서 늘 근심을 놓지 못하던 그곳에서 심일우동무가 불편한 몸으로 김을 매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지난 시기와는 판다르게 매우 천천히, 힘겹게 움직이는 그를 보고 3분조원들은 사정하다싶이 말하였다.

제발 돌아가달라고, 그리고 차라리 정신이 번쩍 들게 욕이라도 콱 해달라고.

하지만 그는 포전의 김을 말끔히 다 매고서야 절절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동무들도 잊지 않았겠지.물이 없어 농사를 짓기 힘들어하는 우리 농장의 실태를 아신 어버이수령님께서 대포로 참새를 쏘는 격이지만 물을 끌어주자고 하시며 베풀어주신 뜨거운 그 사랑을 말이요.우리 상서리농민들을 위해 그리도 마음쓰시던 수령님의 로고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김 한포기인들 놓칠수 있겠소.…》

이렇듯 언제나 당의 은덕을 가슴깊이 새기고 보답의 한마음만을 안고 산 심일우동무였기에 그에게는 자기를 위한 일이란 없었다.

어느해 큰비가 온 후에 있은 일이다.무더기비에 의해 손상된 집을 수리할념도 하지 않고 늘 밭에서 사는 작업반장을 보다 못해 어느날 몇몇 작업반원들이 짬을 내여 그의 집수리에 달라붙었다.그런데 그날 영농물자구입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갔던 심일우동무가 어떻게 알았는지 숨이 턱에 닿아 달려왔다.

《농사군이야 포전에 있어야지.그럴새면 김이라도 한대 더 매라구.》

자기들의 등을 떠밀어 포전으로 보내는 그를 바라보는 농장원들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실 작업반원들은 가정에서 급한 일이 제기되면 그것이 크든작든 또 새벽이든 명절날이든 제일먼저 심일우동무를 찾았다.그때마다 제 집일보다 더 안타까와하며 아글타글 애쓰는 그의 모습은 어찌 보면 집안의 아버지같기도 하고 어머니같기도 하여 절로 눈시울이 붉어지군 하던 작업반원들이였다.

언제인가 한겨울에 심일우동무가 영농자재를 실으러 떠났던 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날 그는 공교롭게도 뜨락또르가 고장나는 바람에 목적지에 채 이르지도 못한채 로상에서 지체하게 되였다.한시바삐 수리를 끝내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일손을 다그쳤건만 생각처럼 일이 잘 진척되지 않았다.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는지.

겨울철의 짧은 해가 기울무렵에야 그는 드디여 수리를 끝냈다.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심한 시장기를 느꼈다.

점심전에 영농자재들을 제꺽 싣고 돌아오리라 마음먹고 아침일찍 길을 떠난데다가 온종일 맵짠 추위가 몰아치는 로상에서 점심까지 건늬며 뜨락또르수리를 하였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그의 생각은 아침에 길을 떠날 때 안해가 주머니에 넣어준 얼마간의 자금에 미치였다.

하지만 그는 그 자금으로 식사까지 건늬면서 작업반농사에 필요한 영농물자를 더 구해가지고 돌아왔다.

그런 일은 한두번이 아니였다.그렇게 자기를 잊고 오직 농사일, 작업반원들밖에 모른 심일우동무였다.

그는 한생 구두를 신어본적이 없었다.늘 땀에 젖어 드바삐 뛰여다닌 그였기에 몇번이고 뒤축을 덧대여 신은 운동화마저 항상 닳아져있었다.

오래동안 시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사업한 그가 회의에 참가하러 갈 때조차도 그런 운동화를 신고다니는것이 마음에 걸려 읍에 나가 구두를 사라고 넣어주었던 얼마간의 자금마저도 영농물자가 되여 돌아왔을 때 그의 안해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겠는가.

심일우동무의 아들 심윤석동무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별로 없었다.이른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야 돌아오군 하던 아버지여서 다 자라도록 식사 한끼 단란하게 함께 해본적 없었고 인상에 남았다면 생활상어려움을 겪는 작업반원들을 위해 자주 어머니와 토론하던 모습뿐이였다.

그러던 심윤석동무가 평소에는 다 몰랐던 아버지에 대하여 깊이 알게 된것은 뜻밖에 아버지를 잃은 직후였다.그날 아버지의 체취가 어려있는 작업반포전을 따라 걷던 그는 거름더미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한 작업반원을 만나게 되였다.

평소에 주인답지 못한 일본새로 하여 자주 비판을 받던 작업반원이였는데 심윤석동무를 보자 금시 울먹이며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내가 임자 아버지속을 끔찍이도 태웠지.지금도 불편한 다리로 포전들을 매일 돌아보던 반장이 문득 여기 올것만 같아서 자리를 못뜨겠구만.내 이제부터는 꼭 자네 아버지처럼 땅에 진심을 묻는 실농군이 되겠네.》

마치 작업반장이였던 아버지에게 말하듯 절절히 심중을 토로하는 그를 보느라니 저도모르게 눈굽이 뜨거워났다.

비단 그 작업반원만이 아니였다.누구를 만나보아도 아버지에 대한 작업반원들의 추억은 눈물겨웠고 아버지처럼 살겠다는 진정어린 목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심윤석동무는 아버지가 30여년세월 바쳐간 땀과 애정이 곳곳마다 스며있는 그 땅을 눈물속에 바라보았다.그러며 맹세다졌다.

(아버지가 온넋을 바쳐 사랑했던 이 땅을 나의 한생 다 바쳐 대를 이어 가꿔가리라.)

사실 심일우동무는 이 땅 그 어디서나 볼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농촌초급일군이였다.그 어떤 놀라운 위훈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영광의 단상에 오른적도 없었고 수십년동안 작업반장사업을 하였어도 자식들을 위해 집안에 눈길을 끌만한 재산을 남긴것도 없다.

하지만 그가 생을 마친 후 사람들 누구나 심일우동무의 가정을 존경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고있다.

정말 훌륭한 남편,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다고.

마디마디 진정이 담겨진 그 목소리들은 우리의 귀전에 이렇게 울려오는듯싶었다.

성실한 인간, 참된 사회주의근로자의 삶은 누구나 잊지 못하는 법이라고, 위훈으로 빛나는 삶도 값높은것이지만 만사람의 가슴속에 인생의 모범, 삶의 거울로 깊이 새겨지는 삶 역시 참으로 값높고 빛나는것이라고.

본사기자 최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