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5월 3일 《통일신보》
민족대단합의 성지 평양
예로부터 자연경치가 한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평양은 우리 인민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 슬기와 재능을 자랑하는 력사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있다. 이런 평양이 오늘은 남조선인민들과 해외동포들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고 민족의 창창한 래일을 약속해주는 희망의 등대, 온 겨레를 한품에 안아주는 민족대단합의 성지로 불리우고있다. 지금으로부터 74년전 나라가 해방되여 세번째 봄을 맞이한 평양은 여느때없이 흥성이였다. 전국각지에서 수백명의 사람들이 력사적인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으로 구름처럼 모여왔던것이다. 회의참가자수는 695명으로서 1 000여만명의 당원과 맹원을 가진 북과 남의 56개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였다. 이처럼 각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온것은 결코 평양의 력사가 오래고 인구가 많아서도 아니며 평양의 경치가 류달리 아름다와서도 아니였다. 바로 평양에 우리 민족을 구원해주시고 민족이 나아갈 앞길을 환히 밝혀주시는 당시로 말하면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단선단정》조작책동으로 민족분렬이 고정화될 위험이 조성되던 엄중한 시기였다.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의 위기가 첨예한 국면에 이르고 우리 민족이 통일이냐, 분렬이냐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였던 바로 그때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남북련석회의소집을 발기하시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이끄신분은 그 어떤 주의주장이나 재산의 유무, 출신성분과 경력, 과거의 행적에 앞서 애국의 마음을 귀중히 여기신분이 그가운데는 이런 사실도 있다. 주체37(1948)년 3월 어느날 남북련석회의준비와 관련하여 바쁘신 시간을 보내고계시던 그만이 아니였다. 당시 련석회의에 참가하였던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엄항섭, 조완구, 김월송 등 당대의 민족주의거두모두가 이때부터 평양은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민족대단합의 성지로 굳게 자리잡게 되였다. 돌이켜보면 독창적인 민족대단결사상을 내놓으시고 그것을 조국의 해방과 새 조국건설, 나라의 통일을 위한 투쟁의 전 력사적로정에 훌륭히
구현하신분은 항일무장투쟁시기 해방후에는 또 이런 평양으로 겨레의 마음들이 쏠리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것은 너무나도 응당한것이였다. 이렇게 시작된 민족대단합의 력사는 년대와 년대, 세기와 세기를 넘어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였던 김규식, 최동오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이 조국해방전쟁의 엄혹한 시기 주저없이 북행길에 올랐고 그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양을 찾아왔는지 모른다. 한때 반공의 길을 걸었던 최덕신, 최홍희와 같은 사람들도 평양은 이들모두를 따뜻이 품에 안아주었고 평양에서 그들은 인생의 새봄을 맞이하였다. 력사적인 6. 15북남공동선언발표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양을 찾아왔던가. 지금도 사람들은 평양의 경치좋은 5월1일경기장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보며 기뻐하던 남조선 각계층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그것을 보면서 온 겨레는 우리 민족이야말로 갈라져 살수 없는 하나의 민족이며 민족대단결이자 곧 조국통일임을 페부로 절감하였다. 평양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에 자기를 바친 사람들에게 영생의 삶을 안겨주는 곳이다. 평양시교외에는 신미리애국렬사릉이 있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숨을 죽이고 나는것만 같고 들어서면 저도 모르게 숭엄한 감정에 휩싸이게 하는 곳, 바로 여기에 조국의 해방과 부강독립,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삶을 빛내인 애국렬사들이 묻혀있다. 한덕수, 최덕신, 최홍희, 오익제, 류미영, 비전향장기수들… 출신과 나이, 살아온 경력은 서로 달라도 그들모두를 품에 안아 죽어서도 영생하는 삶을 안겨준 조국이다. 진정 본사기자 박 철 남 출처 : 통일신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