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8월 17일 로동신문

 

광명과 암흑의 두 세계에서 찾은 진리

한 로과학자의 자서전을 펼쳐보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모두가 사회주의 내 조국을 어머니품이라고 노래부른다.

사회주의는 과연 무엇이기에 우리 인민이 그처럼 애틋한 정을 안고 끝없이 사랑하는것이며 자기의 생명으로, 생활로 굳건히 간직하고있는것인가.

우리는 그 대답을 광명과 암흑의 두 세계, 두 생활을 체험한 평양의학대학 연구사 박사 부교수 리영은선생의 자서전을 통해서도 찾게 된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국은 단순히 나서자란 나라나 고향이 아니라 사람들의 참된 삶이 있고 후손만대의 행복이 담보되는 곳이라야 합니다.》

《붕-》

배는 일본의 니이가다항을 서서히 떠났다.조국의 품에 안기는 재일동포들을 태운 첫 귀국선의 고동소리가 이역의 부두가에 우렁차게 울려퍼지였다.

조국은 저 멀리 아득한 수평선너머에 있었건만 흥분된 마음들은 벌써부터 키돋움을 하고있었다.

하지만 멀어져가는 부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어린 영은은 불안감을 털어버릴수 없었다.자기들이 살던 야마구찌현으로부터 귀국선이 정박해있는 니이가다항까지 오는 과정에 겪은 경악할 일들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리였다.

철길우에 드러누워 귀국하려는 사람들이 탄 렬차를 저지시키려고 날뛰던 일본우익반동들, 차창밖에 손을 내밀고있던 동포어린이를 랍치하는 망동도 서슴지 않은 무뢰한들, 그놈들은 왜 우리가 조국으로 가는 길을 그토록 악을 쓰며 가로막는것일가.

그는 총련 야마구찌현본부 위원장으로 사업하던 아버지에게 느닷없이 물었다.

《아버지, 조국에 가면 잘살수 있나요?》

항시적인 굶주림에 시달려, 극심한 가난에 찌들려 파리해진 막내딸을 이윽토록 바라보던 아버지는 나직이 말하였다.

《우리 조국은 아직 전쟁의 상처를 채 가시지 못했단다.그래서 곤난한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한다.하지만 그곳에는 나라를 찾아주시고 민족의 운명을 지켜주신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신다.그분의 품에 안겨야만 사람답게 살수 있고 너희들의 꿈도 실현될수 있다.》

그날 아버지는 추억하기조차 가슴저미여 좀처럼 입밖에 내지 않던 가정의 불우한 과거사를 어린 딸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동생과 함께 류랑걸식하던 영은의 아버지는 일제의 마수에 걸려 혹가이도의 한 탄광으로 끌려갔다.

여기서 그는 하루 16~18시간 마소처럼 혹사당하고는 겨우 서너시간 통나무를 베개로 삼아 쪽잠에 들군 하였다.어뜩새벽이면 감독놈들이 몽둥이로 그 《베개》를 사납게 두드리군 하였다.소스라치듯 놀라 깨여난 사람들은 보리밥 한덩이와 소금국 한사발로 끼니를 에우고는 또다시 고역장으로 내몰리우군 하였다.

굶어죽고 지쳐죽고 맞아죽고 병들어죽고 갱이 무너져 죽는 그 생지옥에서 영은의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탈출하였다.사나운 눈보라가 태질하던 음산한 겨울밤 수십명이 함께 도망쳤지만 피골이 상접한 허기진 몸으로 얼음장이 둥둥 떠다니고 파도가 세찬 해협을 헤염쳐건너오다나니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두명이였다.

어린 영은이 볼 때마다 몸서리치군 하던 아버지몸의 끔찍한 상처자리는 그때의 모진 고생이 남긴 원한의 흔적이였다.

고향으로,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고역장에서 뛰쳐나왔지만 력사에 기록된 그 끔찍한 간또대학살참변을 겪게 되리라고 어이 상상이나 했으랴.혹가이도에서 탈출할 때 함께 살아남은 동료가 일제놈들에게 참혹하게 학살당하는것을 본 그의 가슴에는 피멍이 들었다.

아, 이것이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백성의 숙명이란 말인가.

영은의 아버지는 울분으로 몸부림쳤다.

원한의 세월은 드디여 끝장나고 조국이 해방되였다.동포들과 함께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해방 만세!》의 환호성을 목청껏 터친 영은의 아버지는 야마구찌현에서 선참으로 애국운동의 봉화를 추켜들었다.

재일조선인들의 애국열의가 높아가는것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일본반동들은 모략사건을 조작하고 영은의 아버지를 철창속으로 끌어갔다.

악착한 놈들은 그것도 성차지 않아 그의 집에 불을 질렀다.그때 방안에 갇혀있던 영은의 언니가 화상을 입고 앞을 못보게 되였다.

그의 가정형편은 더욱 비참해졌다.철창속에 갇힌 아버지를 대신하여 여섯 자식을 먹여살리느라 밤새워 삯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에게서 학비같은것은 도저히 기대할수 없었다.추운 겨울날 영은은 언 손을 호호 불며 손수레를 끌고 탄덩이를 주으러 다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조국에 가면 이역에서 얼어들었던 가슴이 봄날의 눈석이마냥 녹는다고 말하는것이 아닌가.영은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마침내 첫 귀국선이 조국의 기슭에 닻을 내리였다.마중나온 조국인민들도 울고 그립고그립던 조국땅에 돌아온 동포들도 울었다.아버지의 손목에 이끌려 조국땅을 밟던 그날 소녀는 미처 다 알수 없었다.얼마나 따사로운 품에 안기는것인지.

영은의 가정에 평양시 중심부의 해빛밝은 집이 차례졌다.

이불장에 가득찬 이불이며 쌀독에 그득한 백미, 가마에서 뿜어져나오는 후더운 김발…

아늑하고 아담한 살림집에 들어선 영은의 남매는 연방 탄성을 터치였다.

영은의 아버지는 다 자란 자식들을 제일 어렵고 힘든 초소에 세워달라고 간청하였지만 어머니당에서는 그들모두를 대학으로 불러주었다.

일본에서 머리가 좋은것으로 소문났지만 집이 가난한데다가 조선사람이라는 죄 아닌 《죄》까지 들씌워져 대학갈 꿈도 꾸지 못하던 영은의 남매가 줄줄이 대학교정에 들어섰다.

일본에 있을 때 앞 못보는 녀동생에게 돌을 던지며 놀려주는 왜놈새끼들과 맞붙어 매일같이 피투성이되도록 싸우던 맏오빠가 먼저 대학에 갔다.

일본에서 수재로 손꼽히웠지만 대학은 고사하고 험한 토목공사장에서 고역에 시달리다가 손가락까지 잘리웠던 둘째오빠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여 위대한 장군님을 모신 학급에서 공부하는 행운을 지니였다.

일본반동들의 악행으로 두눈을 잃었던 언니도 은혜로운 조국의 품속에서 광명을 되찾고 대학에 입학하였다.

어린 영은도 재능을 활짝 꽃피우게 되였다.일본에서 우리 동포녀성들이 조선치마저고리를 떨쳐입고 환희의 노래춤무대를 펼칠 때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소녀는 소원대로 예술체조를 하게 되였다.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창립되던 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영은의 훈련모습을 보아주시면서 참 잘한다고 치하해주시였다.궁전을 찾으실 때마다 그의 출연을 보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어린 학생인데 참 잘한다고 몹시 대견해하시면서 앞날을 축복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그는 과학탐구의 길에 들어섰다.태양의 은혜로운 해빛은 애국의 씨앗을 움틔우고 꽃피워 열매맺게 해준 사랑의 활력소였다.

어머니조국의 사랑과 은정에 충성으로 보답할 일념으로 가슴 불태우며 리영은선생은 한계단한계단 탐구의 탑을 쌓아나갔다.과학에 한생을 바치려는 사람들은 과학자가 되기 전에 열렬한 애국자가 되여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심장에 새겨안고 그는 우리 나라에 흔한 원료로 효능높은 약품들을 수많이 만들어 환자치료에 이바지하였으며 《다시마박사》라는 정다운 호칭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올린 충성의 편지들을 보아주시고 사랑의 친필을 남기시였다.한생을 변함없이 참된 의학자로 살도록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리영은선생은 이국의 침침한 뒤골목길을 헤매여야 했던 수난의 세월이 돌이켜져 눈시울이 축축히 젖어들었다.그가 살던 자본주의이역은 거리에 불빛이 현란하여도 인간의 마음속에 빛이 없는 암흑의 나락이였다.

인생의 계단을 오르고오르며 받아안은 그 사랑, 그 은혜에 보답할 일념이 더더욱 불타올라 그는 오늘도 젊은 과학자들 못지 않게 과학탐구에 열정을 기울이고있다.

젊은 시절 동서해의 수천리 바다기슭을 편답하며 연구사업을 하던 그 걸음으로 최근년간에는 높고낮은 산발들을 넘나들며 쓸모없이 버려지던 버럭으로부터 효능높은 약품을 만들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리영은선생은 자주 생각한다.어머니조국의 은혜로운 품이 아니였다면 어찌 오늘의 내가 있을수 있겠는가고.조국의 품속에서 름름하게 성장한 자식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은 더욱 깊어진다고 한다.

광명과 암흑의 두 세계를 체험하면서 로과학자가 사무치게 새긴 진리는 위대한 사랑의 해빛으로 천만사람들의 삶을 행복의 열매로 주렁지우는 곳이 바로 사회주의 내 조국이라는 그것이다.

이것은 비단 그만이 아니라 태양의 품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의 심장의 웨침이다.

글 본사기자 허영민
사진 본사기자 한광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