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8월 22일 로동신문

 

영웅집의 후손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비행기사냥군조원이였던 공화국영웅 리봉수동지의

아들 리광진동무와 그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전승세대 후손들의 영예로운 사명은 위대한 수령, 위대한 당의 령도밑에 창조된 위대한 승리전통과 영웅정신을 빛나게 계승하여 선렬들이 지켜내고 일떠세운 이 나라를 더 강대하게 하고 끝없이 번영하게 하는것입니다.》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1950년대 영웅전사들속에는 비행기사냥군조운동을 힘있게 벌릴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받들고 한주일동안에 4대의 적기를 격추시켜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은 리봉수동지도 있다.

가렬처절한 전화의 나날 그는 비록 원쑤와의 판가리결전에서 희생되였지만 영웅의 심장속에 간직되여있던 조국수호정신은 오늘도 그 후대들의 가슴속에 그대로 살아높뛰고있다.

순천시 순금동 123인민반에서 살고있는 영웅의 맏아들인 리광진동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생을 혁명의 군복을 입고 조국과 인민을 보위하였으며 아들딸 세 남매도 조국보위초소에 내세웠다.그리고 제대된 후에도 자식들과 함께 사회와 집단을 위한 좋은 일을 스스로 찾아하여 만사람의 존경을 받고있다.

리광진동무와 그의 가정이 걸어온 애국헌신의 자욱자욱은 우리 세대가 전승세대의 넋과 정신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대답으로 된다.

 

아버지와 함께 걷는 길

 

우리의 이야기는 전승의 환희가 온 나라를 휩쓸던 1953년 여름, 구장군의 어느한 탄광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는 산기슭의 작은 학교에서 하루수업이 끝나면 늘 제일먼저 마을앞 동구길로 달려가군 하는 한 나어린 학생이 있었다.그는 9살 난 리광진동무였다.

동구길은 전선에 나갔던 그리운 사람들을 맞이하는 마을사람들의 기쁨과 감격으로 매일과 같이 벅적 끓었다.눈물없이 볼수 없는 그 광경을 바라볼 때마다 리광진동무는 2년전 잊지 못할 그날의 추억을 머리속에 떠올리군 하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으로 가슴에 영웅메달을 번쩍이며 고향에 찾아왔던 아버지,

미국놈비행기를 쏴떨군 영웅이라고 저저마다 꽃다발을 안겨주고 목말을 태우며 얼마나 온 마을이 들썩이였던가.

그날처럼 비행기사냥군영웅이 돌아왔다고 마을사람모두가 떨쳐나 명절처럼 흥성일것을 생각하니 왜서인지 온종일 서있어도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그런데 열흘이 지나가고 한달이 넘도록 아버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웬 낯모를 인민군군관이 찾아와 그의 가슴에 영웅메달을 달아주며 말했다.

《이제부터 네가 이 금별메달을 간수하거라.》

썩 후에야 그는 아버지가 전승의 날을 보지 못하고 가렬한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모든 사연을 다 알려주고난 어머니는 나어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당부하였다.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너도 어서 커서 영웅인 아버지처럼 이 나라를 받드는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그로부터 얼마 안있어 리광진동무는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하였다.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한몸바친 혁명렬사들의 유자녀들과 함께 배움의 나래를 활짝 펼치도록 해주신 어버이수령님의 하늘같은 사랑과 믿음을 생각할수록 나어린 리광진동무의 가슴속에는 학습과 조직생활을 잘하여 군복을 입고 아버지의 원쑤를 갚으려는 결심이 굳게 자리잡았다.하여 그는 18살 애젊은 나이에 조선로동당원의 값높은 영예를 지니고 아버지가 섰던 최전연초소로 달려나갔다.

전화의 포연내가 그대로 배여있는듯싶은 영예로운 군기앞에서 그는 굳게 맹세다졌다.

(아버지의 넋을 이어 조국과 인민을 위한 복무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겠습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한 복무의 길, 허나 그길은 말처럼 쉽게 갈수 있는 길이 아니였다.

때로는 훈련길에 지쳐 쓰러진적도 있었고 때로는 자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음속동요를 일으킨적도 있었다.그때마다 그는 소중히 간직한 아버지의 영웅메달을 쓸어보며 힘과 용기를 가다듬군 하였다.그렇게 그는 수십년간 성실한 복무의 자욱을 새겨왔다.

그러던 그가 어느한 중요대상건설에 참가하였을 때였다.하루는 부대지휘관이 그가 일하는 곳으로 오더니 이제는 나이도 많은데 제대되여야 하지 않겠는가고 묻는것이였다.그날 그는 밤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끝내 자리를 차고 일어난 그는 늘 수첩갈피에 넣어 가지고다니던 아버지의 사진을 꺼내보았다.사진을 보느라니 언제인가 어머니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과거사가 새삼스럽게 돌이켜졌다.

지주집머슴으로 소여물을 썰다가 작두날에 손가락을 잘리웠다는 이야기, 탄광에서 왜놈십장놈을 때려눕히고 달아나 산속에서 갖은 고생을 겪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는 이야기, 20살에 난생처음 학교에 입학하여 우리 글을 배웠다는 이야기,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다시는 노예로 살수 없다고 하면서 남먼저 전선으로 탄원하였다는 이야기…

(아버지의 몫까지 합쳐 고마운 나라의 은덕에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보답하리라던 내가 아닌가.그런데 나이가 됐다고 어찌 군복을 벗을수 있겠는가.)

다음날 부대지휘관을 찾아간 그는 이렇게 절절하게 말하였다.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을 받들어 대상건설을 완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군복을 벗지 않으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그달음으로 건설장에 달려나갔다.그로부터 얼마후 그는 중요대상건설에 기여한 공로로 또다시 높은 급의 국가수훈을 받아안게 되였다.

지금도 사람들은 국가적인 명절과 기념일때마다 리광진동무의 군복에 빛나는 많은 훈장과 메달들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해한다.

아버지의 영웅메달밑에 앞가슴이 모자라게 빛나는 훈장과 메달들, 정녕 그것은 전승세대의 위훈을 값높은 애국적삶으로 빛내여가려는 리광진동무의 숭고한 인생관의 발현이였다.

하지만 조국과 인민을 위해 그렇듯 수많은 위훈을 세우고도 그는 조금도 만족을 몰랐다.

제대되여 순천시에 자리잡은 그는 어느날 리수복영웅의 고향집이 있는 금천동을 찾게 되였다.리수복영웅은 비록 18살 꽃나이에 생을 마쳤어도 대를 이어 베풀어지는 어머니당의 사랑과 은정에는 정녕 끝이 없다는 생각으로 그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안해인 림광실녀성에게 말했다.

《여보, 이제 머지않아 순천혁명사적관을 다시 꾸린다누만.나라에서 전화의 영웅들을 그토록 아끼고 내세워주는데 영웅의 자식인 내가 가만있어서야 되겠소.》

그날 밤 그의 집에서는 재봉기소리가 멎을줄 몰랐다.그렇게 밤새워 마련한 지원물자들을 안고 며칠후 그는 안해와 함께 사적관개건보수건설장으로 향하였다.그 나날 그는 지원물자만 넘겨준것이 아니였다.건설자들과 함께 성실한 땀방울도 아낌없이 흘렸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사적관주변원림록화사업을 하는 종업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향나무에 대해 류다른 호기심을 품게 되였다.

사시장철 푸르른 모습으로 이 땅을 아름답게 단장해주는 향나무, 그 향나무를 내 손으로 직접 가꾸어 아버지를 비롯한 전화의 영웅들이 영생의 모습으로 있는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주변에 뿌리내리게 할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이런 생각을 안고 그는 전정가위에 잘리운 향나무가지들을 한가득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그리고 터밭을 갈아엎고 향나무가지들을 삽목하였다.순식간에 양묘장이 되여버린 터밭을 놓고 마을사람들 누구나 놀라와했다.하지만 리광진동무의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넘쳐났다.

그에게 있어서 나무모를 키우는 일이 결코 헐한 일은 아니였다.향나무의 식물학적특성과 재배방법을 잘 모른탓에 숱한 나무모들을 한꺼번에 죽인적도 있었다.사람들이 터밭에 곡식과 남새를 심어가꾸면 살림살이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되겠는데 괜한 고생을 사서 한다고 이야기할 때에도 그는 묵묵히 나무모들을 가꾸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나무모들을 안고 그는 가족과 함께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를 찾았다.그날 정성들여 키운 나무모들을 렬사묘주변에 다 심고난 그는 당의 품속에서 영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마음속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피로써 지킨 이 땅을 우리 후대들이 애국의 땀방울로 성실히 가꾸어가겠습니다.)

그날의 맹세를 가슴깊이 새기고 그는 해마다 수많은 나무모를 키워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와 순천시안의 여러곳에 심고있다.

그가 한생토록 걷는 애국헌신의 길, 정녕 그길은 전승세대의 넋을 꿋꿋이 이어가는 참된 인생의 길이였다.

 

가정의 대는 곧 혁명의 대

 

순천시의 일군들과 순금동의 주민들은 리광진동무의 집을 가리켜 영웅집이라고 정담아 부른다.

영웅집, 바로 여기에는 조국을 위하여 피흘려 싸운 전화의 영웅을 잊지 않고 길이 추억하려는 마을사람들의 진심이 어려있었다.

그렇듯 뜨거운 마음들을 온몸으로 체감할수록 리광진동무는 자식들을 전승세대의 넋을 이어받은 혁명의 참된 계승자들로 키우기 위해 늘 왼심을 썼다.

막내딸 리은경동무가 중학교졸업을 앞두었을 때의 일이다.림광실녀성은 남편이 늘 출장으로 집을 떠나있고 두 아들마저 군대에 나간지라 딸자식만은 어떻게 하나 슬하에 남겨두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생각이 남편의 노여움을 사게 될줄이야.어느날 남달리 고운 목청을 가진 은경이를 성악가로 키웠으면 한다는 안해의 말에 리광진동무는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래도 은경이까지 군복을 입으면 우리 집도 이젠 당당한 군인가정이 되겠구나 하고 은근히 자부하고있었는데…

나라가 어려움을 겪고있는 이때에 조국의 운명을 지켜 쉬임없이 전선길을 이어가시는 우리 장군님곁에 총대를 잡은 자식을 하나라도 더 내세우는게 이 나라 백성의 도리가 아니겠소.》

그는 늘 아버지의 영웅메달앞에 자식들을 세워놓고 말했다.피를 이은 자식이 아니라 뜻을 이은 자식이 되여야 한다고, 혁명의 전세대가 걸어온 생의 흔적우에 조국과 인민을 위해 바치는 생의 흔적을 덧쌓을 때 참된 삶이 빛난다고.

이런 그였기에 그는 군사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두 아들도 편안한 일터로가 아니라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해제끼는 청년돌격대에 입대시켜 백두산기슭으로 떠밀어보냈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어느날 백두산선군청년발전소(당시)건설에 참가하였던 맏아들이 뜻하지 않은 일로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그날 리광진동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비분에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다음날 아침 그는 둘째 아들에게 절절히 말하였다.

《너도 형이 최후의 순간에 남긴 부탁을 전해들었겠지.난 네가 완공된 발전소에 하루빨리 우리 장군님을 모시고싶어한 형님의 뜻을 이어 다시 돌격대에 입대하기를 바란다.》

그때의 당황했던 심정을 둘째 아들 리현철동무는 우리에게 이렇게 터놓았다.

《사실 그때 저는 삼수발전소건설장에서 돌격대생활을 마치고 갓 돌아와 한창 대학입학시험준비를 하고있었습니다.그런데 또다시 발전소건설장으로 떠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보니 좀 서슴어지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조국앞에 시련이 닥쳐왔을 때 주저없이 한몸 내댄 할아버지앞에 부끄럽지 않게 자식들을 키우려고 한생 고심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볼수록 생각을 달리하게 되였습니다.》

가정의 대, 그것은 곧 나라의 대, 혁명의 대이다.매개 가정에서 자식들을 어떻게 교양하는가에 따라 조국의 운명, 혁명의 전도가 좌우된다고 말할수 있다.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리광진동무였기에 손자, 손녀들의 성장에도 부모들이상으로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우리 당의 후대사랑에 의하여 온 나라 학생들이 《민들레》학습장을 받아안았을 때였다.애어린 맏손녀와 둘째 손자가 좋아라 새 학습장들을 펼쳐보다가 문득 학습장표지에 그려진 민들레를 보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민들레가 이렇게 생겼나요?》

철부지어린이들의 천진란만한 물음이였으나 리광진동무의 생각은 깊어졌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민들레》라는 명칭을 노래 《내 나라의 푸른 하늘》의 가사를 읊으면서 지었다고 하시였는데 우리 아이들이 조국에 대한 표상을 안겨주는 민들레도 모르고있다니.)

그날 리광진동무는 손자, 손녀의 손목을 잡고 집문을 나섰다.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이르러서 민들레를 찾아낸 그는 손자, 손녀에게 민들레에 대하여 알기 쉽게 해설해주었다.

다음해 여름 그의 집뜨락에 있는 자그마한 양묘장, 그가 오랜 세월 나무모들을 키워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를 비롯한 여러곳에 보내주군 하는 그 양묘장둘레에는 민들레꽃이 활짝 피여났다.자기 손자, 손녀뿐 아니라 더 많은 아이들에게 민들레에 대한 표상을 안겨주기 위해 리광진동무가 봄에 뿌린 민들레씨앗들에서 새싹이 움트고 노란 꽃들이 피여난것이다.

그는 이렇게 집뜨락에서만도 수많은 민들레씨를 채취하여 여러 학교에 보내주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함께 나무모도 가꾸고 때로는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찾아가 심기도 하면서 나어린 손자, 손녀들의 마음속에는 애국의 마음이 봄싹마냥 움터났다.그 마음을 안고 그애들은 순천시에 현대적인 공장이 건설되던 나날에도 자주 건설자들을 찾아가 성의껏 마련한 지원물자도 안겨주고 노래도 불러주면서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었다.물론 그들곁에는 항상 리광진동무가 있었다.

지금도 국가적인 명절과 기념일이 오면 리광진동무가 사는 집 지붕우에는 공화국기발이 휘날리군 한다.

지난 전승절아침에도 리광진동무는 혁명선렬들의 붉은 피가 스민 공화국기발을 나어린 손자에게 넘겨주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너의 증조할아버지는 이 기발을 지켜 목숨을 바쳤다.그리고 나와 너의 아버지는 이 기발을 빛내이는 길에 깨끗한 량심을 바쳐왔다.이제는 네 차례다.영웅집의 후손답게 이 기발을 대를 이어 휘날려가거라.》

전승세대의 숭고한 넋과 정신은 이렇게 세대와 세대를 이어 꿋꿋이 이어지고있다.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영원한 가풍으로 이어가고있는 이런 애국자가정들이 많아 우리 조국은 그 어떤 천지풍파속에서도 끄떡없이 힘차게 전진하고있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정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