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8월 16일 《통일신보》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
8월 15일. 우리 겨레가 악독한 일제의 식민지기반에서 해방되여 자유와 독립을 쟁취한 이 뜻깊은 민족적명절에 더욱 깊이 새겨안군 하는 력사의 진리가 있다. 국력이 약하면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당하게 된다는것, 힘이 강해야 나라와 인민의 운명을 지킬수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나라의 힘.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것인가 하는것을 우리 겨레가 더욱 뼈저리게 체험한것은 섬나라오랑캐들에게 나라를 송두리채 빼앗길 때였다. 1905년, 《을사5조약》의 날조, 그것은 약소민족이 당한 가슴아픈 치욕이고 비극이였다. 일제는 황궁을 무력으로 겹겹이 포위하고 황제와 조선봉건정부의 대신들을 총칼로 위협하며 망국조약을 강박했다. 반대하는 대신들은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고종황제가 《조약》날조를 끝까지 반대하며 《백성들의 의향》을 물어야 한다고 하자 《헌법정치》가 아닌 《군주전제국》에서 《백성의 의향은 기괴천만한 일》이라고 무조건적인 순종만을 강요했다. 그리고 최고주권자인 황제의 비준도 옥새날인도 없는 조약문서를 《조약》이라며 세상에 공포했다. 망국은 누구도 원치 않았으나 그것은 국력이 약한 조선민족이 당한 슬픈 운명이였다. 1905년에 이르러 일본은 6 000t급이상의 최신군함만도 12척에 현대적무장을 갖춘 20만명의 륙군상비무력을 가지고있었다. 이 방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일본은 조선봉건정부에 망국조약을 강요하려고 로일전쟁에 투입했던 저들의 기본병력을 서울에 끌어들였다. 당시 서울에는 일본군의 보병 3만명, 기병 800명, 포병 5 000명이 투입되였다. 이에 비해 조선군대의 병력수는 서울에 2개 련대 5 000명과 지방에 8개 대대 약 2 000명을 합쳐 7 000명정도에 불과했다. 이것은 한개 사단의 병력에도 미치지 못하는것이였다. 군대의 기본무장장비도 창과 활, 화승대였다. 20만명 대 7 000명. 대포 대 화승총. 이것이 1905년 당시 일본과 조선의 군력실태였다. 이런 군력으로 어떻게 나라를 지켜낼수 있었겠는가. 20세기초 망국조선이 터뜨린 원한의 통곡소리는 힘이 없어 한순간에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노의 신세가 된 겨레의 곡성이고 피눈물이였다. 하기에 피어린 항일대전으로 나라의 해방을 이룩하신 이뿐이 아니다. 미국의 침략책동이 로골화되고 현대수정주의자들이 《평화적공존》을 떠들고있던 때에도 군력이 약하면 나라를 지킬수 없기에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시킬데 대한 지금도 고난의 행군, 강행군의 준엄한 시련의 나날 군력강화의 멀고 험한 길을 앞장에서 헤쳐가시며 우리가 왜 이 길을 걸어왔는가를 후대들도
알게 될것이라고 하시며 선군의 길을 걷고걸으시던 오늘 공화국은 또 한분의 공화국의 군대는 가공할 타격력,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춘 세계적인 강군으로 자라났다. 오늘도 사람들은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눈부신 불줄기를 내뿜으며 만리창공으로 힘차게 솟구쳐오르던 신형대륙간탄도미싸일 《화성포-17》형의 장쾌한 모습을 눈앞에 떠올리고있다. 지난 4월 25일 심야열병식장을 누비던 철의 흐름은 또 얼마나 장쾌한것인가. 강대한 공화국의 존엄과 사상초유의 힘을 한가슴에 안아보던
력사의 그 순간에 온 나라 인민은 우리 국가의 강대한 힘을 마련해주신 우리의 존엄을 짓밟는것을 절대로 용서치 않을것이라고 선언하시며 무적필승의 국력을 떠올리시기 위해 산악같은 파도가 요동치는 캄캄한 바다길을
한치한치 뚫고가시였고 허리치는 바다물속에도 남먼저 들어서시였으며 위험천만한 화선에도 서슴없이 나서신 예나 지금이나 조선의 지정학적위치는 변함이 없다. 땅도 그 땅이고 인민도 그 인민의 후손이다. 그러나 오늘의 조선은 한세기전의 조선이 아니다. 그 어떤 침략세력도 감히 넘볼수 없는 나라, 넘본다면 그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어야 하는 천하무적의 강국이다. 바로 이런 강대한 나라를 우뚝 세워주신것이야말로 본사기자 유 금 주 출처 : 통일신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