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8월 30일 로동신문
모두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들처럼 살며 투쟁하자! 전망봉의 잣나무숲이 전하는 충성과 애국의 이야기 희천시혁명사적지관리소 관리원 량형순동무
《우리는 천만년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전망봉, 지도에도 표기되여있지 않고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희천시의 높지 않은 봉우리이다.여기에는
반세기가 넘는 오랜 세월 그는 충성과 애국의 한마음으로 사적지주변을 수림화, 원림화하였으며 수많은 당원들과 근로자들, 청소년학생들을 우리 당의 혁명전통으로 무장시키는데 이바지하였다. 홍안의 청춘시절부터 고령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혁명사적사업에 심혼을 쏟아붓고있는 그의 불같은 모습은 우리모두에게 당의 령도업적이 어떻게 지켜지고 빛나는가를 말없이 새겨주고있다.
스스로 받아안은 량심의 과업
량형순동무가 전망봉과 인연을 맺은것은 지금으로부터 53년전인 주체58(1969)년 11월말이였다. 희천시를 나라의 튼튼한 기계공업기지, 전자공업기지로 발전시킬데 대한
한참만에야 령마루에 다달으니 층암절벽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청천강을 끼고 널직하게 들어앉은 희천시의 전경이 한눈에 안겨왔다.그 모습에 심취되여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는데 길가던 한 로인이 그에게 말을 건늬였다. 《아마도 우리 희천에 처음 오는 모양이구만.이 봉우리를 그전에는 자살봉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전망봉이라고 부른다오.》 너무도 놀라운 이야기에 량형순동무는 그 사연을 물었다.
주체53(1964)년 4월 23일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던
이런 이야기를 듣고난 량형순동무의 가슴은 세찬 흥분으로 높뛰기 시작했다. 어제날 원한의 대명사로부터 희망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전망봉!
이 봉우리야말로
(이제부터라도 전망봉에 나무를 심어 당의 령도업적을 빛내이자.이것은 다름아닌 내가 할 일이다.)
한번 넘은 령길에서도 당의 령도업적을 빛내일 한마음으로 심장을 불태운 량형순동무, 그는 군사복무의 나날
다음날 공장일이 끝나자 그는 잣나무를 안고 전망봉에 올랐다.그가 뭘하는가 하여 지켜보던 주변마을사람들이 여기는 온통 석비레와 바위층이다보니 풀도 자라기 힘들어한다고, 자기들도 여러번 애써봤지만 결국은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고 한숨을 지었다. 그러나 량형순동무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산을 통채로 갈아엎어서라도, 이 한몸 흙이 되여서라도 력사의 이 봉우리에 푸른 숲을 펼쳐놓으리라.) 이때부터 그에게는 여가시간이면 전망봉과 그 주변산들에 정성껏 나무를 심고 자래우는 일과가 생겨나게 되였다.바위를 까내여 구뎅이를 깊숙이 파는가 하면 여러곳을 훑으며 흙과 부식토를 얻어 등짐으로 져나르는 그의 잔등에는 떡살이 졌다.
그러다나니 남들보다 휴식시간은 짧아졌고 옷은 늘 땀에 젖어있었지만 그것으로 하여 공장일에 지장을 준적은 한번도 없었다.
얼마후부터 그에게는 공장의 보배라는 부름과 함께 전망봉총각이라는 류다른 별호가 붙게 되였다. 어느날 량형순동무는 군대때 입은 부상이 도져 황해남도의 어느한 료양소에 치료를 가게 되였다.그 소식을 알고 고향의 어머니가 그곳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땅거미가 지도록 아들을 만날수 없었다.관리원들이 말하기를 아침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면서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것이였다.그런데 밤이 퍽 깊어서야 나무모짐을 등에 진 량형순동무가 지팽이를 짚고 료양소로 들어서는것이 아닌가.그 광경앞에서 어머니는 눈물이 왈칵 솟구쳐올랐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어머니는 말하였다. 《장하다, 내 아들아!》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바위산에 나무가 뿌리내리는 기적을 안아왔다.그가 전망봉에 나무를 심기 시작해서 2년만에 열세번째로 떠다심은 나무들이 살아났던것이다.그날 량형순동무는 평양하늘을 우러러 마음속으로 조용히 아뢰였다.
그의 두볼을 적신 뜨거운 눈물, 그것은
혁명사적을 빛내이는 길에서 한생을 빛내이려는 그의 지향은 가정을 이룬 후에도, 자식을 가진 아버지가 되여서도 변함이 없었다. 명절날, 휴식일이면 그는 가족을 이끌고 청천강을 건너 전망봉으로 오르군 했다.그럴 때면 부모들의 손목을 잡고 들놀이를 나가는 아이들을 부러움속에 바라보던 자식들이 남들은 이런 날이면 맛있는 음식들을 가지고 유원지로 놀러 가는데 우리는 왜 삽을 들고 산에 일하러 가야 하는가고 묻군 하였다.그러는 자식들에게 그는 이런 길을 많이 걸어야 훌륭한 사람이 될수 있다고 말해주군 했다. 생의 순간순간 참된 마음을 변함없이 간직해온 그였기에 큰물로부터 잣나무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품치는 강물에도 주저없이 뛰여들었고 산불속에서도 전망봉의 푸른 숲을 지켜낼수 있었다.
주체74(1985)년 10월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그때로부터 한해가 지나 전망봉에 혁명사적비가 건립되고 혁명사적지구역으로 정해지였다.그날은 량형순동무에게 있어서 더없이 기쁜 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였다.얼마후 당의 크나큰 믿음에 의하여 량형순동무는 이곳 관리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사적비가 세워지기 근 20년전부터 당의 령도업적을 빛내이는 사업을 량심의 과업으로 스스로 맡아안고 남모르는 애국충정의 땀을 바쳐온 그의 고결한 인생관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량형순동무와 같은 참된 인간들이 간직한
대를 이어 전해가는 관리일지
지금 전망봉에서는 량형순동무와 함께 맏아들인 량혁철동무와 손녀 량효성동무가 사적비를 관리하고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이제는 고색이 짙어진 수십권이나 되는 관리일지를 번져갈수록 전망봉에 바쳐진 그들의 헌신의 땀방울이 어려와 눈길을 뗄수 없다. 그 관리일지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1987년 9월 1일 혁명사적부문에 배치받은 나는 공장일군들과 종업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전망봉으로 향했다.이제는 눈을 감고도 갈수 있는 길이지만 어쩐지 처음 올라가는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당의 신임에 꽤 보답하겠는지 걱정부터 앞선다.지금까지 하루를 시간으로 쪼개며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분초로 쪼개며 살아야 할것같다.》 량형순동무는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신들메를 더 바싹 조여맸다. 그는 높은 정치리론수준과 능란한 강의술, 해박한 지식으로 강의를 통속적이고 생동하게, 진실하고 감명깊게 하기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였다.그 나날에는 혁명사적을 고증할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수백리 눈길을 헤쳐가던 때도 있었고 한문장의 강의안을 만들기 위해 여러권의 도서들을 탐독하면서 한밤을 지새우던 때도 있었다. 그속에서도 그는 사적지의 면모를 꾸리는 사업을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 전망봉기슭에 새로 집을 지은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이른새벽 량형순동무는 삽을 들고 터밭을 갈아엎기 시작했다.늘 집일을 뒤전에 미루어놓고 살던 남편이여서 안해 장기옥동무는 웬일인가 하여 얼른 남새종자를 안고 그의 뒤를 따라섰다.그런데 남편은 남새가 아니라 꽃관목을 심자고 하는것이 아닌가. 어쩌면 집생각을 그렇게 안하는가고 안타까와하는 안해의 손을 꼭 잡으며 량형순동무는 말하였다. 《집일을 도맡아안고 고생하는 당신을 돕지 못해 미안하오.그러나 사적지주변을 잘 꾸리자면 꽃관목을 반드시 심어야 하오.》 이런 그였기에 나라가 어려움을 겪던 고난의 시기에도 쌀배낭이 아니라 나무모를 등에 지고다녔고 배를 곯는 자식들의 가슴아픈 모습을 보면서도 잣종자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지금도 이곳을 찾는 참관자들은 사적비로 향하는 길량옆에 늘어서있는 잣송이모양의 잣나무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흔히 길가의 키낮은 고양나무들을 다듬는 일도 품이 들진대 백수십그루 잣나무들의 가지를 그렇게 다듬자니 거기에 바친 땀과 노력은 과연 얼마일것인가. 사실 량형순동무가 전망봉에 잣나무를 심기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왜 하필이면 늦게 자라는 나무를 심으려고 하는가, 빨리 자라는 나무를 심어야 당대에 덕을 볼게 아닌가고. 그러나 그들은 다는 알수 없었다. 당의 령도업적을 빛내이는 길에서 잣나무처럼 사시장철 변함이 없고 폭풍속에서도 굽힘없이 살려는 그의 고결한 마음을.
자신보다
량형순동무의 맏아들인 량혁철동무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일을 해보려는 포부를 안고있었다.이런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적지관리원이 된데도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10여년전 여름 어느날 억수로 퍼붓는 소낙비속에서 무너진 도로의 돌각담을 수리하던 량형순동무는 갑자기 불어나는 산골물에 떠밀려 부상을 입고 집에서 치료를 받게 되였다. 이 사실을 알고 량혁철동무의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그날 아버지치료를 잘해달라고 부탁하고난 그들은 이렇게 온 기회에 사적지를 돌아보는것이 어떤가고 량혁철동무에게 물었다.그는 동무들을 사적지로 안내하며 자기가 아는대로 해설해주었다.어릴 때부터 늘 들어온 사적내용인지라 별로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생각외로 그들의 반향은 대단하였다.자기들의 고장에 그렇게 눈물겨운 사연이 깃들어있는줄은 몰랐다고, 앞으로 일을 잘하여 당의 령도업적을 빛내이겠다고 저마다 불같은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량혁철동무는 마음속충격이 컸다. 혁명사적지관리원인 아버지가 하는 일, 그것은 단순히 사적내용을 참관자들에게 알려주고 교양마당이나 쓸며 꽃과 나무를 관리하는것만이 아니였다.우리 당의 불멸의 혁명업적을 대중에게 인식시켜 그들을 견결한 혁명가, 참된 애국자로 준비시키는 중요한 사업임을 가슴치게 깨달았던것이다.하여 그는 아버지처럼 사람들의 가슴속에 혁명의 불, 애국의 불을 지피는 당사상전선의 기수가 될 결심을 품고 전망봉에 삶의 뿌리를 내리였다.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긍지와 자각이 생길 때 일에서 성수가 나는 법이다.량혁철동무는 아버지와 함께 손끝이 닳도록 산비탈의 돌들을 들추어내면서 2 000평이나 되는 양묘장을 만들었고 산불을 미연에 막을수 있는 방화기재들도 자체로 준비하였다. 그 나날 량형순동무가 리용하던 관리일지를 량혁철동무가 이어받게 되였다.거기에는 이런 내용도 적혀있다. 《2013년 1월 1일
새해가족모임에서 아버지는 사적지로 향하는 수백m의 도로를 맡아 관리할것을 제기하였다.나는 그 의견을 적극 지지하였다.물론 그 도로는 우리 담당구간이 아니다.그러나 이제라도 문득 우리
이렇듯 앉으나서나 오직
하기에 오늘은 량형순동무가 걷는 충성과 애국의 길을 그의 손녀인 량효성동무도 이어가고있다. 새소리, 바람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이 한적한 곳에 3대가 한생을 묻어야 하는가고 투정질하며 동무들이 참관하러 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군 하던것도 이제는 어제날의 일로 되였다. 수년세월 전망봉에 청춘의 리상과 포부를 실으며 그도 관리일지에 언제나 변함없을 자기의 심정을 담고있다. 《2022년 7월 29일
오늘 신문과 TV방송을 통해
3대를 이어 당의 령도업적을 빛내여가는 충성스러운 가정의 량심의 기록인 그 관리일지를 보며 우리는 생각했다.
우리 삶의 존재가치와 생의 목적은 이들처럼
량형순동무와 그의 가정은 수십년세월 전망봉과 그 주변산들에 30여만그루의 잣나무와 수종이 좋은 나무들을 심고 가꾸었으며 양묘장에서 생산한 130여만그루의 나무모들을 금수산태양궁전과 희천시의 곳곳에 보내주었다.그 수많은 나무들을 심기 위해 그들이 까낸 바위돌들과 어깨에 피멍이 지도록 져나른 흙과 부식토를 합치면 아마도 하나의 큰산을 이루리라.
혁명의 성산 백두산아래로 련면히 뻗어내린 이 나라의 높고낮은 산발들에는 이렇듯
하여 푸른 잣나무숲 우거진 전망봉만이 아닌 이 나라의 모든 산봉우리들은 절세위인들에 대한 열화같은 흠모심을 전하는 충성의 봉우리로 높이 솟아있는것이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김학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