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9월 17일 로동신문
우리 세대의 삶의 거울, 귀중한 본보기 애국심이 자력갱생을 낳는다 증산경쟁운동의 선구자 김회일동지의 생을 돌이켜보며
오늘 불타는 애국심을 안고 부강조국을 받들어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하는것은 이 나라 공민의 참된 본분으로 되고있다. 항일의 혈전장에서 창조된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더욱 억척같이 벼려 후대들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물려준 우리의 전세대들의 전렬에는 건국의 첫 기슭에서 맨손으로 쇠물을 뽑고 기대를 돌리고 기적소리를 울린 새 조선의 로동계급이 서있다.그들가운데 증산경쟁운동의 선구자 김회일동지도 있다.
《우리는 새세대들도 당과
일제놈들은 저들이 패망하자 도망치기에 앞서 우리 나라의 산업시설을 닥치는대로 파괴하였다.철도운수부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던 정주기관구(당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놈들은 중요한 물자들과 특히 기술문건들을 모조리 소각하기 위하여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바로 그러한 때 기관구종업원들은 놈들의 책동을 짓부시기 위하여 자치회를 조직하였다.그들가운데 당시 기관사였던 김회일동지도 있었다. 그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없었다.무엇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기관구를 지키고 철도를 지키는 길에 나서게 하였던가. 가난한 농사군의 아들로 태여난 김회일동지는 어려서부터 기적소리에 정들었다.그는 철없던 시절 기적소리가 울리면 대문을 박차고 철길로 뛰쳐나가 기차의 긴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팔목이 시도록 손을 젓군 하였다. 그의 가슴속에는 기관사가 될 푸른 꿈이 소리없이 깃들었다.기관조사가 된 김회일동지는 힘껏 일하였다.하루빨리 기관사가 되려는 열망은 그로 하여금 달리는 기관차의 화구에 석탄을 퍼넣는 고된 일도 성수가 나서 하게 하였다.그는 짬짬이 기술을 배워 끝내 기관사가 되였다. 바라던대로 기관사가 되였건만 그의 가슴에는 기쁨대신 슬픔이 고였다.나라를 빼앗긴 설음과 날을 따라 더해만 가는 민족적멸시와 천대는 그를 《벙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그가
바로 그래서 원쑤들의 책동으로부터 나라의 동맥인 철도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도 벌렸고 한편으로는 고급기술을 배우는데 열중하였다. 해방된 이듬해 봄 정주기관구를 책임지고 일하게 된 김회일동지는 더욱 분발하였다.그는 기관구의 책임자였지만 어느 하루도 기름투성이가 된 작업복을 벗어본적이 없었다.그의 손에는 언제나 검차마치가 들려있었다.그는 늘 종업원들이 힘들어하는 일을 솔선 맡아 해제끼였다. 하루에도 각 직장을 몇차례나 순회하는것을 생활화한 그는 종업원들이 쉬는 시간에 기관구구내를 일일이 돌아보며 사업계획을 세우군 하였다.
그러던 주체35(1946)년 10월 그는
모든것을 제힘으로!
해방된 조국이 나아갈 길, 우리 인민이 잘살수 있는 길을 밝혀주시는
나라의 동맥인 철도의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인민경제발전에 커다란 지장을 주게 되며 결국 부강한 나라를 건설할수 없게 된다. 기관구로 돌아온 그는 종업원들을 자체의 힘으로 기관차들을 살리고 운영하기 위한 투쟁에 불러일으켰다. 그때 그들앞에 나선 가장 큰 애로는 역시 기술문제였다.파괴된 기관차를 수리하자면 높은 기술이 요구되는데 당시 기관구에는 대수리를 할수 있는 기능공이 한명도 없었고 설비와 자재도 부족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김회일동지는 기관차수리와 함께 연료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도 힘있게 벌렸다.그는 안주탄광(당시)의 유연탄으로 기관차를 움직일것을 결심하였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안주탄은 질이 나빠 기관차연료로 쓸수 없다고 하였지만 연료를 해결할 방도는 그 길밖에 없었다. 1946년 12월 어느날 그는 채탄돌격대를 무어가지고 안주탄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말이 탄광이지 동발 한대 성한것이 없고 오소리굴같은 갱안에서는 석수가 쏟아져 여간 스산하지 않았다.그러나 채탄돌격대는 갱안에 서슴없이 들어가 탄을 캐냈으며 그것을 한짐, 두짐 져내다가 가루를 내여 알탄을 빚었다. 얼마후 그들은 17t의 알탄을 기관차에 싣고 시운전의 길에 올랐다. 그때의 심정에 대하여 김회일동지는 후날 이렇게 회상하였다. 《기관사와 함께 기관차에 오른 나의 가슴은 조마조마하였다.그러나 우리의 탄으로 기관차를 움직일수 있으며 또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한삽두삽 석탄을 화실에 퍼넣었다. 렬차는 드디여 평양역에 정시로 들어섰다.성공이였다.
이것은
김회일동지는 그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많은 종업원들로 채탄돌격대를 무어 안주탄광에 파견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조국의 동맥을 살리기 위한 그들의 애국적투쟁에 고무되여 탄부들도 일떠섰다. 채탄돌격대원들과 탄부들의 헌신적인 투쟁으로 석탄생산에서는 기적과 혁신이 일어났다.그전에는 하루에 30~60t밖에 생산하지 못하던 이 탄광에서 하루평균 300t생산목표를 돌파하였으며 1947년 1월 17일에는 380t까지 생산하는 기록을 세웠다.결과 철도운수부문에 조성되였던 연료난은 점차 풀리고 전반적철도운행을 정상화할수 있는 전망이 열리게 되였다.
당시 출판보도물들에는 김회일채탄돌격대를 따라배울데 대한 기사들이 련이어 소개되였다.
온 나라가 김회일운동에 떨쳐나섰다.특히 철도운수부문 일군들과 종업원들은 제2, 제3의 김회일이 되여 철도부흥에 있는 힘, 있는 기술을 다 바칠 결의드높이 애국운동을 힘차게 벌렸다.
참으로 김회일동지는 해방직후 불타는 애국심을 안고 오로지
지금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속에서 투쟁하고있다.그러나 그 애로와 난관이 아무리 크다 한들 일제놈들이 모조리 파괴해버린 빈터우에서 새 나라를 일떠세워야 했던 그때의 간고함에야 어찌 비할수 있겠는가.
당중앙위원회 제8기 제3차전원회의에서
모두다 혁명의 전세대들처럼 어떤 시련속에서도
본사기자 김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