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9월 18일 로동신문

 

대중의 추억속에 언제나 살아있는 당일군의 모습

락랑식료공장 초급당비서였던 류광현동무에 대한 이야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일군들은 인민들을 당을 따르는 길에서 사상과 뜻을 함께 하는 진정한 동지로 믿고 군중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여야 하며 인민을 위하여 한몸바쳐 투쟁하여야 합니다.》

당과 인민을 위하여 자신을 깡그리 바쳐야 하는 당일군의 인생은 과연 무엇으로 총화되고 평가되는가.

류광현동무가 락랑식료공장 초급당비서로 사업한지는 3년밖에 되지 않는다.그 길지 않은 나날에 그는 함께 일한 종업원들로부터 《불같은 인간》, 《허물없는 당일군》, 《힘들 때마다 찾게 되는 사람》이라는 친근한 부름과 함께 존경을 받아왔다.

한 당일군의 한생의 무게가 실려있는 이 부름들은 오늘날 시대가 요구하고 인민이 바라는 참된 당일군은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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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랑식료공장 초급당비서 류광현동무는 불치의 병으로 지난 6월 26일 51살을 일기로 동지들의 곁을 떠나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공장일군들과 종업원들은 도저히 믿을수 없어 저저마다 그의 집을 찾아왔다.그는 자기들의 공장, 자신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너무도 훌륭한 당일군이였기에 슬픔도 컸고 추억도 뜨거웠다.

두해전 공장에서는 부족되는 원료로 하여 큰 애로에 부닥치게 되였다.그중에서도 사탕가루보장이 제일 난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풀고 생산을 정상화할수 있겠는가.

누구나 이런 생각을 안고 모대기면서도 이렇다할 묘안을 내놓지 못하고있을 때 하루는 류광현동무가 어느한 식료공장에서 만든 당과류들을 들고 공장일군들앞에 나타났다.그리고는 어서 맛을 보라고 하면서 자기가 먼저 사탕 한알을 입에 닁큼 넣는것이였다.원료문제로 속을 태우던 일군들은 초급당비서의 뜻밖의 행동앞에 마음이 흥그러워져 저마다 당과류봉지에 손을 가져가기 시작했다.맛있게 드는 일군들을 한참 바라보던 그가 누구에게라없이 이렇게 물었다.

《그래 이 사탕의 주원료가 무엇인것같소?》

그의 말대로 맛을 보았더니 물엿으로 만든 사탕이였다.

그제서야 그들은 초급당비서가 왜 자기들에게 당과류를 내놓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였다.그러나 아직 물엿에 의한 당과류생산을 진행해본 경험이 없는 그들인지라 초급당비서의 의도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이때 류광현동무의 낮으나 저력있는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원료의 국산화를 실현하라는것은 당의 뜻이다.나라가 어려운 속에서도 우리 아이들에게, 인민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당과류를 안겨주기 위하여 그토록 마음쓰시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로고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일할 때 못해낼 일이 없다고 본다.

그의 절절한 호소는 일군들에게 인민의 참된 복무자의 자세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를 새겨준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이렇게 되여 공장에서는 기술혁신조가 무어지게 되였다.그 앞장에는 언제나 류광현동무가 있었다.

그들과 함께 그 생산공정을 실현한 식료공장들에서 앞선 방법을 배워오기 위해 밤길도 수없이 걸었다.시험이 실패로 끝날 때도 기술혁신조성원들에게 새힘을 안겨주며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뜬눈으로 새날을 맞았다.

그러던 어느날 류광현동무는 뜻밖의 일로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그런데 며칠후 그가 아픈 다리를 끌며 공장에 나타난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띄여본 공장사람들이 그렇게 무리하다가 영영 지팽이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고 안타깝게 만류했지만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흔연히 말하였다.

《공장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 치료도 잘되거던.물엿문제만 풀리면 다리가 저절로 나을것같소.》

그 진정에 떠받들려 공장에서는 짧은 기간에 부족되는 원료문제를 해결할수 있었으며 얼마후에는 음료생산공정의 현대화도 원만히 진행할수 있었다.

오늘 공장이 생산정상화를 믿음직하게 담보하는 그쯘한 과학기술력량을 갖추게 된것도 당의 인재중시정책을 실천으로 받들어온 류광현동무의 헌신적인 노력을 떠나 생각할수 없다.공장에 파견된 3대혁명소조원들이 가치있는 연구성과들을 내놓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참고문헌들과 자재들을 해결해주던 모습도, 오늘의 시대에는 누구나 인재가 되여야 한다고 하면서 원격교육학부시험준비를 하는 종업원들을 위해 그들의 일감을 대신 맡아해주던 그날밤의 추억도 대중의 심장속에 소중히 간직되여있다.

류광현동무는 이렇게 공장을 위해 자신을 바치며 살았다.《우리 초급당비서》라는 그 친근한 부름에는 사업에서도 불같고 생활에서도 뜨거웠던 류광현동무의 인간미에 대한 대중의 평가가 거울처럼 비껴있다.자식많은 어머니의 마음처럼 당일군의 심장은 누구보다 더 뜨겁고 그릇이 커야 하는 법이다.

그는 늘 현장에서, 대중속에서 살았다.종업원들을 위한 일이라면 큰것이든 작은것이든 다 무겁게 받아들이고 만사를 제쳐놓고 뛰였다.

언제인가 한 종업원이 공장에 출근하지 못한적이 있었다.사실을 알아보니 그의 녀동생이 남편을 잃는 불상사를 당했던것이다.그날 저녁 류광현동무는 그 녀동생의 집에 찾아가 자기 집일처럼 돌보아주었다.종업원본인의 가정일도 아니고 그 형제의 슬픔을 그렇듯 가슴아파하며 보살펴주는 그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감동되였다.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크든작든, 멀든가깝든 다 우리 공장 종업원들이 당한 아픔이요.그래서 공장에 초급당비서가 있는것이 아니요.》

그는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하기에 사탕작업반의 한 종업원이 집에 기초식품이 떨어졌다고 무심결에 하는 소리를 듣고 자기 집의것을 통채로 들고나올수 있었고 운명하기 열흘전에도 잘못 살아온 지난날때문에 고민하는 종업원을 위해 가물거리는 의식속에서도 공장에까지 나와 초급당비서로서의 마지막사업을 다할수 있었던것이다.

종업원 누구나 그러하지만 류광현동무에 대한 백경남동무와 함철순동무의 추억은 남달리 뜨겁다.그들은 최전연에서 군사복무를 하던 제대군관부부였다.

몇해전 함철순동무는 락랑구역원림사업소에서 일하는 남편이 대상건설에 동원되여 일하다가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그달음으로 남편이 입원해있는 어느한 병원에 도착하니 다행히도 1차수술은 성과적으로 진행된 상태였다.

고마움의 인사를 하는 함철순동무에게 병원의사들은 인사는 우리보다도 식료공장초급당비서에게 먼저 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말 머리가 숙어지는 당일군이라고 말해주는것이였다.

사실 그때는 원림사업소에서 초급당비서로 일하던 류광현동무가 락랑식료공장에 조동된 후였다.

남편을 위해 그토록 마음기울이는 당일군의 진정에 함철순동무는 오열을 터뜨리고야말았다.

얼마후 남편은 완쾌된 몸으로 병원을 나설수 있었고 그들부부는 식료공장에서 일하게 되였다.류광현동무는 그들이 맡은 일을 잘하도록 이끌어주었고 몸이 약한 아들을 위해 귀한 보약제도 마련해주었다.

이렇듯 공장과 종업원들을 위해서는 자기를 아낌없이 바친 불같은 사람이였지만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는 너무도 남긴것이 적은 그였다.김장철이면 더 많은 남새를 종업원들에게 안겨주기 위해 발이 닳도록 뛰여다니면서도 집생각을 하지 않아 안해의 원망을 산적도 있었고 자기 몫으로 공급된 명절물자도 생활이 어려운 세대들에 보내주고 빈손으로 집에 들어선적도 드문했다.

지금도 공장일군들과 종업원들이 눈물속에 외우군 하는 류광현초급당비서에 대한 마지막추억이 있다.

류광현동무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집을 찾았던 종업원들은 모두 놀랐다.

우리 초급당비서동지가 이런 수수한 집에서 살았단 말인가.우리가 리용하는 가구며 TV를 비롯한 전자제품들이 그의 집재산이였다는것을 왜 몰랐단 말인가.

그런데 더욱 놀라운것은 고인과 헤여질 때 쓸 사진 한장 변변한것이 없는것이였다.고작해서 있다면 그가 젊었을 때 찍은 사진들이 몇장 있을뿐이였다.

하여 류광현동무는 증명서에 남긴 자그마한 사진의 모습으로 동지들과 영결하게 되였다.그 사진이 사람들을 더 울렸다고 한다.

단풍은 지는 순간에 가장 붉다는것은 아마도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듯싶다.

생을 마칠 시각이 다가오고있음을 의식하게 되였을 때 류광현동무의 가슴에 맺혀 내려가지 않는것이 한가지 있었다.그것은 당의 육아정책을 받들어 각지에 수소문하여 구한 우량품종의 염소들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날라오는것이였다.하기에 그는 몸안에서 바늘묶음이 돌아가는것과 같은 아픔을 강철같은 의지로 참아내며 운반과정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앞질러 대책하였다.출장성원들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이 와닿았을 때에야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용히 미소를 떠올렸다.그리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그것은 류광현동무가 공장종업원들의 가슴속에 남긴 마지막모습이였다.

당일군의 한생에 대한 가장 값높은 평가는 그와 함께 일한 대중의 추억에 있다.오래 일했다고 하여 그 모습이 대중의 마음속에 두고두고 남는것도 아니며 짧게 일했다고 하여 그에 대한 추억이 쉽게 사라지는것이 아니다.당일군의 사업년한은 비록 길지 않아도 그가 찍은 자욱자욱이 불같은 사랑과 헌신으로 인민의 마음속에 깊이 찍혀지면 그 한생은 우리 당의 붉은 기폭과 함께 영생하는것이다.

본사기자 김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