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10월 14일 로동신문
혁명사적지와 더불어 삶을 빛내여가는 훌륭한 가정 룡포혁명사적관 관장 공훈사적강사 박춘화동무와 그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
《오늘 우리의 당원들과 근로자들속에는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묵묵히 자기가 맡은 초소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지난 7월 28일 제8차 전국로병대회에 참가한 전승혁명사적부문 강사들이
안해와 남편, 딸이 한날한시에 대를 두고 길이 전할 크나큰 영광을 받아안은 감동깊은 사연, 법동군의 외진 산골에서 지난 수십년세월
불멸의 전승업적을 길이 전해가며
지난 8월초 법동군 룡포리의 어느한 마을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룡포혁명사적관 관장 박춘화동무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관장동지네 가정이
마치 자기 부모형제가 받아안은 영광인듯 앞서거니뒤서거니 박춘화동무의 집마당으로 서둘러 들어서는 마을사람들, 바로 그 시각 박춘화동무는 남편과 함께 잊지 못할 영광의 그날을 추억하며 집벽면에 기념사진을 정히 모시고있었다.보고 또 볼수록 꿈만 같다며 북받치는 격정을 누르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박춘화동무의 눈앞에 지난 수십년간의 잊지 못할 나날이 어제일이런듯 떠올랐다.
박춘화동무는 오성산의 군인가정에서 태여났다.보이는것은 산뿐이고 들리는것은 새소리뿐인 외진 산골마을에서 태여나 학교에 다니던 그에게 남다른 자랑이 있었으니 그것은 군인들의 생활을 돌보아주기 위해 아글타글 애쓰던 어머니가 전국상업일군대회에 참가하여
동네사람들과 동무들이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보군 하던 기념사진, 그것으로 하여 늘 남다른 긍지를 안고 학교에 다니던 어린시절 그에게는 자기도 이제 어른이 되면 어머니처럼 일을 잘하여
이런 그였기에 대학졸업을 앞둔 그 시각 생각도 많았다.어디에서 무슨 일을 할것인가를 두고 늘 생각하던 그가 드디여 결심을 내리게 되였으니 그것은 어느한 혁명사적지를 참관할 때였다.다른 동무들과 함께 혁명사적강의에 심취되여있던 그는 강의마감시간에 그곳 강사들이
이런 생각으로 그는 대학졸업후 강원도혁명사적관 강사가 되였다.도시에서의 강사생활은 정말 벅차고 즐거웠다.이른새벽이면 남먼저 일어나
그러던 어느날 그는 룡포혁명사적관확장공사에 동원되게 되였다.젖빛안개가 흐르는 고요한 이른새벽이였다.홀로 도로를 쓸고있는데 뒤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쉽지 않은 동무요.우리 사적지에도 저런 동무가 배치되여오면 얼마나 좋겠소.》 뒤를 돌아보니 이미 낯을 익힌 룡포혁명사적관 일군들이였다.
박춘화동무의 눈가에 룡포리의 험한 산발이 새삼스럽게 안겨들었다.전화의 나날 눈석이물이 흘러내리는 강기슭에서 장화를 벗으시고 찬물에 들어서시던
(조국의 운명을 지켜 이런 외진 산골막바지에까지 새겨가신
박춘화동무의 가슴속에는 날이 흐를수록 룡포혁명사적관 강사가 되려는 결심이 굳어져갔다.한 녀동무가 작업의 쉴참에 왜서 굳이 길도 험한 룡포혁명사적지에 뿌리내리려는가고 물었을 때 박춘화동무는 말하였다.
《이 험한 산골에도 우리
이렇게 그는 법동군의 깊은 산골에 청춘의 배낭을 풀어놓았다.
그는 인생의 배우자도 도시총각이 아니라 1211고지에서 군사복무를 하고 제대된 후 룡포리에 뿌리내린 제대군인을 택했다.그때부터 그들부부는 룡포리에 깃든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였어도 밤깊도록 학습을 하고 새벽이면 사적지로 달려나가 관리사업을 진행하는 박춘화동무의 일과에는 변함이 없었다.그리고는 룡포리의 유래와 뒤덕산의 전설 등을 발굴고증하여 강의해설안을 더 풍부히 하기 위해 발이 닳도록 뛰여다니였다. 안해인 박춘화동무가 룡포리의 혁명사적을 빛내이는 길에 혼심을 쏟아부을 때 남편인 전히석동무는 《사적지주변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것은 내가 맡겠소.》라고 말하며 두팔을 걷어붙이고 자체의 힘으로 양묘장을 꾸리고 잣나무를 비롯한 수종이 좋은 나무모들을 키웠다.전히석동무는 이렇게 가꾼 나무모들로 사적지주변을 푸르게 단장하기 위해 애써 노력하였고 봄과 가을에는 산불로부터 룡포리의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남모르는 길도 많이 걸었다. 이들부부가 자기들의 일터를 얼마나 귀중히 여겼는가 하는것은 군사복무를 마치고 대학까지 졸업한 딸을 룡포혁명사적관 강사로 내세운것만 놓고서도 잘 알수 있다. 사실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사적지를 빛내이는 길에 자기의 깨끗한 량심을 묻어온 전히석, 박춘화부부가 딸을 도시의 일터에 세운다고 하여 탓할 사람은 없었다.하지만 혁명사적을 지키고 빛내이는 길에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있고 영예와 보람이 있음을 그 누구보다 절감한 그들이였기에 그런 결심을 한것이였다.
지금으로부터 4년전 뜻깊은 전승절을 며칠 앞두고 룡포혁명사적지를 찾아주신
그때부터 그의 가정은
오늘도 축복받은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있다.태양의 력사를 빛내이는 길에 인생의 영광도, 가정의 행복도 있다는것을.
뜨거운 사랑을 지닌 참인간
박춘화동무의 가정이 걸어온 헐치 않은 충성과 애국의 길을 더듬어보면서 우리는 생각하였다.과연 어떤 사람이 그처럼 사심없이, 가식없이 충성의 한길을 걸을수 있는가를, 그리고 자기만이 아니라 온 가정을 그 길에 내세울수 있는가를.
박춘화동무에게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사는 입당청원서가 있다.
《…나는
그 맹세를 지켜 박춘화동무가 걸은 길이 바로 원군길이였다.피눈물의 언덕에서 인민군군인들을 찾아 끊임없는 전선길을 이어가시는
나라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여서 원호물자를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그러나 초소를 찾는 그의 발걸음은 끊길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인민군군인들에게 원호물자를 안겨주고 돌아오던 그는 가까운 농장마을에 부모를 잃은 자매가 살고있다는 말을 듣게 되였다.그런 가슴아픈 사실을 알게 되니 그냥 집으로 돌아설수 없었다.그래서 그들자매의 집을 찾게 되였는데 집살림이 말이 아니였다.그날 밤 박춘화동무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멀고먼 전선시찰의 길을 이어가시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앉은 그는 남편에게 사연을 이야기하였다.전히석동무는 부모잃은 아이들을 맡아키우려는 안해의 결심을 선뜻 지지하기 어려웠다.그렇지 않아도 조국에 들이닥친 엄혹한 시련으로 하여 안해는 전쟁로병들인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를 모시고 남모르는 수고를 하고있었다.게다가 철부지자식들의 작은 배도 채워주지 못하는 괴로움, 일터에서 돌아오면 강의준비로 밤을 새우다싶이 하는 안해를 크게 도와주지 못하는 자책감으로 밤새 모대기던 전히석동무는 다음날 아침에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끝까지 갈길이면 걸음을 떼오.》 이렇게 되여 그들가정에는 두명의 식솔이 불어나게 되였다.하지만 그들의 어머니구실을 한다는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한번은 박춘화동무가 깊은 밤중에 인기척에 놀라 눈을 떠보니 어린 자식들이 조용히 자기의 품에 안겨드는것이였다.순간 그의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어머니의 정을 남달리 그리워하는 자매에게 왼심을 쓰느라 잠자리를 펼 때면 자연히 웃목으로 밀려나군 하던 친자식들이였다.그러나 그는 쉽게 그들을 품어안을수가 없었다. 《얘들아, 이래선 안된다.너희들보다 어머니를 더 그리워하는 언니, 누나들이 있지 않니.그러니 이제부턴 너희들끼리 자는데 습관돼야 해.》 그런데 이 말이 막내아들의 울음을 터치게 할줄이야. 《엄만 우리 엄마가 아니야.》 그애의 울음소리에 부모잃은 자매도 잠에서 깨여나 눈물을 흘리였다.아이들이 새벽녘에야 굳잠에 들었을 때 박춘화동무는 혼자서 생각했다.
(한 가정의 어머니구실을 하기도 힘든데 온 나라 대가정을 품어안으신 우리
그후 박춘화동무는 이동강의를 나갔다가도 부모잃은 아이들이 눈에 띄면 무작정 집으로 데려왔다.마음씨좋은 아버지, 어머니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스스럼없이 찾아오는 아이들도 있었다.이렇게 그는 수십명의 아이들을 거느린 어머니가 되였다. 식구가 갑자기 늘어나니 일손과 시간은 모자라고 어깨우에 실리는 짐은 몇갑절 더 무거워졌다.수많은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하느라 젖은 손 말릴새 없이, 일감을 놓을새 없이 늘 뱅글뱅글 돌다나니 그는 언제 한번 뜨뜻한 아래목에서 발편잠을 자본적이 없었다. 그런 속에서도 전히석동무와 박춘화동무는 아이들의 정신적성장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렸다. 박춘화동무네 가정의 하루일과는 온 마을의 관심사였고 화제거리였다. 이른아침이면 아이들이 아침운동으로 달리기를 하면서 사적지교양마당까지 달려가군 하였다.
그리고는 교양마당에 모셔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한 그 하루일과는 그대로 아이들의 가슴속에 충성과 애국이라는 씨앗을 싹틔워 자래워주는 소중한 자양분으로 되였다.그렇게 자란 자식들이여서 중학교졸업후 저저마다 조국보위초소로 달려나갔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한혁명초소에 서기도 하였다.
언제인가
자신보다 먼저 동지들을 생각하고 가정의 곤난보다 먼저 나라를 생각할줄 아는 우리 시대의 참인간 박춘화동무, 그는 정녕 아름다운 인간미를 지닌 훌륭한 녀성이다. 전쟁로병들과 영예군인들의 생활도 친자식의 심정으로 보살펴주고 가정살림이 어려운 주변농장 농장원들도 자기 종업원처럼 돌봐주어 사람들로부터 늘 듣는 《우리 관장동지》라는 정다운 부름말에도 그의 인간됨이 그대로 비껴있다. 지금으로부터 3년전 4월 온 마을의 축복속에 박춘화동무의 가정에서는 세 자식의 결혼식이 진행되였다.전히석, 박춘화부부는 그 세 자식까지 합하여 30여명 자식들의 결혼상을 차려주었다. 신랑, 신부들이 차례로 전히석, 박춘화부부의 잔에 술을 붓자 한 로인이 말했다. 《이 좋은 날에 아버지, 어머니가 한마디 하게나.》 사람들의 눈길이 그들부부에게 쏠리였다.부모잃은 수십명의 아이들을 데려다키운 20여년세월 그들의 가슴속에 쌓이고쌓인 말은 얼마나 많을것인가. 이윽하여 전히석동무가 안해의 마음까지 합쳐 자식들을 향해 조용히 말하였다. 《나라의 은덕을 한생토록 잊지 말거라.》 그 소박한 말속에 그들부부의 인간됨이 집약되여있었다.많은 자식들을 위해 그처럼 고생을 해오면서도 그들의 가슴속에 오직 나라일만을 생각하는 소중한 마음을 깊이 심어주기 위해 애써온 전히석, 박춘화동무였기에 그렇듯 자식들의 뜻깊은 결혼식날에조차 앞으로 훌륭한 인간이 되라는 말을 하였던것이다. 그렇다.가슴속에 동지들과 혁명선배, 후대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지닌 사람만이 훌륭한 인간, 참된 충신으로 값높은 삶의 단상에 오를수 있다.우리 시대의 열렬한 충성과 애국은 인간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떠나 생각할수 없는것이다.
오늘도 박춘화동무의 집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있다.찾아오는 사람마다
행복의 높이, 그것은 당과 국가를 위한 충성과 애국의 높이이다.
그들처럼
글 및 사진 본사기자 정영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