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1(2022)년 12월 4일 로동신문
주체적인 해외교포운동의 시원은 이렇게 마련되였습니다
오규상
올해 12월 2일은
오늘 우리 재일동포들이 누리는 존엄과 긍지, 모든 영예와 행복은 70년전 이날의 력사적사변과 잇닿아있습니다.
뜻깊은 이날에 즈음하여 나는 오랜 기간 재일조선인운동력사를 연구해온 한사람으로서 사대와 교조, 민족허무주의의 진탕에 깊숙이 빠져 생사존망의 갈림길에 놓여있던 재일조선인운동이 어떻게 자주의 궤도우에 올라서고 주체적인 해외교포운동의 시원이 어떻게 마련되게 되였는가를 세상에 전하고싶어 펜을 들게 되였습니다.
련락원이 평양으로 가다
나는 한때 사업상관계로 총련의 초대의장이였던 한덕수동지로부터 총련의 력사에 대해 자주 듣군 하였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총련이 결성되기 전야의 일들을 회고할 때마다 《그때 우리가
그가 말해주던 당시의 상황이 지금도 눈앞에 방불히 펼쳐집니다.
조국이 해방된 후 재일동포들의 마음과 마음은 오직 영명하신
망국의 비운이 드리웠던 수난의 그 세월 산설고 물설은 바다건너 이역땅에 끌려가 민족적존엄과 삶의 권리마저 빼앗겼던 력사의 비참한 수난자들에게 있어서 절세의 영웅
일본에 있던 애국적인 조선인활동가들과 동포들은 조국해방의 환희속에 그해 10월 도꾜 히비야공회당에서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의 결성을 선포하였습니다.
조련은
조련이 결성됨으로써 재일동포들은
그리고 주체37(1948)년 9월에는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시고 재일동포들을 자주독립국가의 당당한 해외공민으로 떳떳이 내세워주시였습니다.
조련의 애국적활동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온갖 탄압과 모략책동을 일삼던 미일반동들은 우리 공화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앞두고 《단체등규정령》위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구실로 조련을 강제해산하고 28명의 핵심적인 일군들을 공직에서 추방하는 야수적폭거를 감행하였습니다. 조련의 해산과 조선전쟁의 발발은 애국적인 재일조선인활동가들과 동포들의 앞길에 엄혹한 난관을 조성하였습니다. 그후 조련을 대신하여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이 결성되였지만 그 지도권을 장악한 종파사대주의자들과 민족허무주의자들은 재일조선인운동을 일본에서 벌어지고있는 민주화투쟁의 한 고리로 보면서 재일동포들을 자기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이 아니라 일본의 반동적인 국가정권타도의 길로 이끌어갔습니다. 지어 이자들은 제주도에 공화국기가 휘날린다고 해도 재일동포들의 처지는 달라질것이 없다고 줴치면서 조직강령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호방위》라는 조항을 삭제하는 망동까지 부리였습니다. 하여 수많은 동포들이 남의 지휘봉에 따라 머리에 붉은 수건을 동여매고 인화병과 죽창을 휘두르면서 극좌적이며 무모한 폭력투쟁에 내몰리다가 경찰에 잡혀가고 일본에서 강제추방당하였으며 지어 억울한 죽음까지 당하였습니다. 재일조선인운동은 생사존망의 갈림길에 서게 되였습니다. 정말이지 당시 재일조선인운동과 우리 동포들이 처한 형편은 참담하였고 그것을 바로잡을 이렇다할 방책도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천길낭떠러지끝에 다달은 엄혹한 현실에서 솟구칠 방도를 내놓지 못하였고 또 그것은 누구나 할수 있는 일도 아니였습니다.
한덕수동지를 비롯한 애국적활동가들은 재일조선인운동을 위기에서 구원하자면 민족의 태양이신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한몸에 걸머지시고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떼무리들을 상대로 판가리싸움을 하고계시는
이렇게 되여 한덕수동지는 도꾜도 이따바시구에 자리잡은 목조건물에서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나날 수많은 인민군용사들과 인민들이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적후천리 밀림속을 헤쳐 최고사령부를 찾아간것처럼 우리 재일동포들도 이역만리에서
련락원은 비록 한사람이였지만 그날의 평양행은 민족의 태양을 따르는 전체 재일동포들이 오른 신념의 길이였습니다.
해외교포운동의 붉은 화살표가 그어지다
이날 사적지에 깃든 하많은 사연을 더듬으시던
후날 조국을 방문하는 기회에 나도 가보았는데 그곳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있던 곳이였습니다.
바로 그곳이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한의장동지로부터 이미 들어서 알고있는 내용이였지만 그곳 사적지 강사의 해설을 들으며 나는 력사의 그날이 눈앞에 방불히 어려와 솟구치는 격정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주체41(1952)년 12월 2일 밤, 일본에서 온 재일조선인련락원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이날 련락원의 보고와 한덕수동지가 올린 편지를 보아주신
그날 민전의 로선상과오와 투쟁방법상결함, 그 원인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신
조선사람은 조선혁명을 위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해외교포운동에 대한 똑똑한 리론이 없었습니다.해외교포를 가지고있는 나라는 많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해외교포들이 자기 나라 혁명을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있었습니다.
언제인가
돌이켜보면 피어린 항일혁명투쟁의 나날
정녕 재일조선인운동의 로선을 전환할데 대한 방침은 일찌기 항일혁명투쟁시기부터 주체적립장, 민족자주의 립장에 확고히 서시여 해외동포들의 운명을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결부시키시고 우리 동포들을 위하여 끝없는 심혈을 기울여오신
이렇게 되여 재일조선인운동은 민족적애국운동으로 방향전환을 할수 있었으며 자기 조국과 민족, 조선혁명을 위한 주체적인 해외교포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체적인 로선전환방침이 제시된 그날의 최고사령부의 작전실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발걸음을 뗄수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진정
조국해방전쟁사적지는 비단
작전지도를 한 벽면에 다 걸수 없어 다음벽면에까지 걸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 크지 않은 최고사령부 작전실은
나는 가렬처절한 전쟁이 한창이던 그때 조국과 해외의 두 전선을 다같이 보살피시며 전쟁의 운명과는 거의나 인연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재일동포들문제로 그토록 크나큰 심혈을 기울이신 우리
불변의 진로를 따라 상승일로를 걷다
주체적인 로선전환방침을 제시하신
주체44(1955)년 3월, 민전 제19차중앙위원회에서 한 한덕수동지의 《재일조선인운동의 전환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하여
재일동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살았다.
이와 같은 투쟁속에서 드디여 민전의 해산이 결정되고 주체44(1955)년 5월 25일과 26일 이틀간에 걸쳐 도꾜 아사꾸사공회당에서는 재일조선인운동사에 력사적계기로 기록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를 결성하는 대회가 성대히 진행되게 되였습니다.
대회에서는
총련의 탄생은 우리 재일동포들의 운명에서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나게 한 일대 사변이였습니다. 총련이 결성됨으로써 재일조선인운동은 비로소 주체의 궤도우에 확고히 들어서게 되였으며 주체적인 해외교포운동의 시원이 열리게 되였습니다. 이때부터 총련은 민족적애국운동을 불변의 기치로 높이 들고 공화국의 당당한 해외공민조직으로서 재일동포들의 민주주의적민족권리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족애국의 한길을 줄기차게 걸어올수 있었습니다. 우리 총련과 재일동포들에게는 이 세상 그 어느 해외교포조직이나 교포들에게 없는 긍지와 자부심이 있습니다.세계해외교포운동사의 전 행정에 결성 첫 시기에 택한 자기의 진로를 변함없이 고수하며 그를 유일한 무기로 틀어쥐고 상승일로를 걸어온 교포조직이나 교포들은 우리 총련과 재일동포들밖에 없다는 그것입니다.
총련은
총련과 재일조선인운동의 전 력사가 험로역경의 가시덤불을 헤쳐야 하는 고행의 련속이였지만 총련은 이 만고불멸의 진로가 있어 애족애국의 전구마다에서 승리의 개가를 높이 올릴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총련을 결성하시여 주체적인 해외교포운동의 시원을 열어놓으신
비범한 예지와 탁월한 령도로 20세기 재일조선인운동의 활로를 활짝 열어주시고 빛나는 승리에로 이끌어오신
일찌기
총련이 우리 조국의 자랑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경탄해마지 않는 애족애국의 선각자, 애국충정의 모범, 세계해외교포조직의 본보기로 누리에 그 이름 높이 떨쳐올수 있은것은
오늘 우리 총련은
새로운 주체100년대가 시작되는 력사의 분수령에서
21세기의 태양이신
주체적인 로선전환방침이 제시된 때로부터 70돐이 되는 뜻깊은 이 시각 절세위인들의 천출위인상을 다시금 뜨겁게 되새기며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 총련과 재일동포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일본 도꾜에서 주체111(2022)년 12월 2일 (필자는 재일조선인력사연구소 소장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