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2(2023)년 2월 27일 《우리 민족끼리》

 

투고

군사적위협공갈로 조작한 불평등조약

 

일본의 근대 조선침략과 식민지화의 첫페지라고 할수 있는 《강화도조약》이 조작된 때로부터 근 한세기반이 되여온다.

세월은 멀리 흘렀어도 《운양》호사건을 구실로 《강화도조약》을 강요한 일본의 침략책동과 그 날강도성, 우리 민족이 겪은 치욕은 오늘도 우리 후세들에게 뼈아픈 피의 교훈으로 새겨지고있다.

《강화도조약》은 일본에게는 유리하게 권리만을 부여하고 조선봉건정부에는 일방적의무만을 강요한것으로서 조선민족의 자주권과 리익을 엄중히 침해하는 침략적이며 예속적인 불평등조약이였다. 이를 통해 당시 일제는 조선에 대한 자본침투, 일본인들의 치외법권적활동의 자유를 위한 명분과 담보를 마련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의 해안선측량 및 지도작성보장, 공사 및 령사주둔권, 보충조약체결권 등 본격적인 침략준비의 발판을 닦아놓았다.

그러면 이러한 불평등조약의 강요는 어떤 과정속에 이루어졌는가.

19세기 중엽 《명치유신》후 《정한론》을 주요국책으로 정한 일본침략자들은 조선침략을 위한 이른바 《교섭》방법이 통하지 않게 되자 1870년대후반기부터 무력도발, 군사적위협공갈에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그 서막이 바로 《운양》호사건이다.

1875년 5월부터 부산항불법침입, 발포연습, 군사정탐행위를 일삼던 일본군함 《운양》호는 그해 9월에는 당치않은 구실로 우리 나라 서해군사요새인 초지진경계수역에 불법침입하였다가 조선수비병들에 의해 응당한 징벌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침략자들은 이후에도 항산도와 영종도일대를 돌아치며 살륙과 파괴략탈을 계속 감행하였다.

당시 침략선 《운양》호의 이러한 무장도발목적은 조선봉건정부에 대한 군사적위협공갈로 조선침략과 예속의 길을 열수 있는 구실과 《법적근거》를 만들어놓자는데 있었다. 이로부터 일본침략자들은 《운양》호사건이 일어나자 《피해자》로 둔갑하여 《조선측이 일본에 대해 적대행위를 하였다.》고 생트집을 걸고 보다 공공연한 무력행사에 나서면서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였다.

군사적위협공갈끝에 일본침략자들은 1876년 2월 27일 끝끝내 강화부에서 부당한 요구조건들을 조선봉건정부에 강제접수시키고 12개조항으로 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조작하였던것이다.

《운양》호사건에서 시작된 《강화도조약》의 조작, 이후 일제가 조선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강점하고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꾸며내고 강요한 모든 《조약》들에도 언제나 군사적위협공갈이 동반되였다.

군사적위협공갈로 불법무법의 《조약》들을 조작하고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우리 인민에게 장장 수십년간이나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하였으며 숱한 문화재부들과 자연부원을 강탈하였다. 일제의 잔인무도한 식민지통치로 수많은 조선의 청장년들이 죽음의 전쟁터들과 고역장들에 끌려가 마소처럼 혹사당하고 목숨을 잃었으며 20만명의 조선녀성들이 일본군성노예로 전락되여 치욕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참으로 일본의 조선침략과 강점력사는 세계를 경악케 하는 특대형반인륜범죄들로 얼룩진 력사이다.

오늘 일본반동들은 과거범죄에 대하여 성근하게 반성하고 배상할 대신 그 죄악의 력사를 미화분식하면서 대조선적대시정책에 집요하게 매달리고있다.

하지만 일본의 범죄력사는 절대로 가리울수도 지워버릴수도 없다.

우리 인민은 일본이 저지른 과거죄악의 대가를 기어이 천백배로 받아내고야말것이다.

김형직사범대학 력사학부 교원 조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