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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사들은 우리 혁명의 자랑스러운 첫 세대들이다

 

강반석어머님탄생 100돐기념 오찬회참가자들과 한 담화

주체81(1992)년 4월 21일

 

오늘은 강반석어머님탄생 100돐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 어머님은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한생을 바치시였습니다. 어머님은 만경대에 계실 때부터 아버님의 혁명사업을 적극 도와드렸으며 독립운동자들의 시중을 드느라고 수고를 많이 하시였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혁명사업을 위하여 국내는 물론, 중국의 상해와 간도지방을 비롯하여 여러곳을 다녀오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독립운동자들을 데리고오시였습니다. 어머님은 무시로 찾아오는 독립운동자들에게 밥도 지어주고 빨래도 해주시였습니다. 어머님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다음 혁명활동에 참가하시면서 나와 나의 동무들의 혁명사업을 적극 도와주시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할 때 있었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앓는 몸이였지만 우리가 창건한 반일인민유격대를 보려고 동생과 함께 유격대원들이 정렬해있는 곳으로 나오시였습니다. 어머님은 유격대원들의 름름한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시다가 그들이 어깨에 멘 총을 만져보시며 이런 총을 가지면 일제와의 싸움을 잘할수 있을것이다, 독립군들처럼 닭다리같은 총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인민들한테서 군자금이나 모아가지고서는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수 없다고 하시였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님은 자네들의 어머니들이 오늘의 경사를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조선의 어머니들은 자식들이 머저리구실을 하거나 몹쓸짓을 하는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 울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한 장한 싸움길에 나선것을 보면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고 하시였습니다. 그때 유격대원들은 어머님의 고무적인 말씀을 들으면서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였습니다.

우리가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20살안팎의 열혈청년들이 유격대에 입대하려고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이 자리에 참가한 최성숙동무도 우리가 유격투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처녀의 몸으로 목릉현에서 우리를 찾아 떠났는데 후에 왕청에서 만났습니다.

우리가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다음 며칠이 지나서 5. 1절을 맞이하였는데 그때 나는 부대를 거느리고 안도현성에 입성하여 보무당당히 열병행진을 하였습니다. 그후 나는 부대를 거느리고 남만으로 진출하였습니다. 내가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다음 인차 남만으로 진출한것은 그곳에 있는 량세봉독립군부대와의 통일전선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군사령인 량세봉은 우리 아버님과 친한 사이였기때문에 남만에 가면 그의 독립군부대와 통일전선을 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남만으로 떠나기에 앞서 동무들이 모아준 돈으로 좁쌀 한말을 사가지고 어머님이 계시는 집에 들렸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몹시 앓고있었지만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으시였습니다. 정작 남만으로 떠나자니 앓고있는 어머님이 걱정되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은 집둘레를 빙빙 돌면서 선뜻 집을 떠나지 못하는 나에게 산 사람의 입에 거미줄쓰는 법은 없으니 집걱정은 하지 말고 부대를 거느리고 빨리 떠나라고 엄하게 말씀하시였습니다.

동무들이 혁명영화 《조선의 별》을 보아서 알겠지만 량세봉의 독립군부대에서는 일제놈들이 박아넣은 밀정이 참모노릇을 하고있었는데 그놈의 방해책동으로 하여 독립군부대와의 통일전선은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놈은 우리 유격대원들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음모까지 꾸몄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떠나 류하, 몽강, 안도를 거쳐 왕청으로 갔습니다.

내가 남만원정에서 돌아와 집에 들려보니 어머님은 세상을 떠나시였습니다. 우리 어머님의 병은 독립운동자들을 시중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여 생긴 병이였는데 그때는 그저 가슴앓이라고 하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암이였던것 같습니다. 그때 우리 어머님의 나이는 40살이였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다가 그처럼 바라던 조국광복의 날을 보지 못하고 너무나 일찌기 세상을 떠나시였습니다.

나는 오늘이 어머님탄생 100돐이 되는 날이므로 항일혁명투사들을 모두 참가시키고 식사를 같이하려고 하였는데 며칠후 조선인민군창건 60돐때 모일 기회가 있기때문에 이렇게 녀성항일투사들, 항일혁명의 녀성연고자들, 녀성간부들과만 자리를 같이하였습니다.

동무들이 나의 생일 80돐과 내가 대원수로 된것을 축하하고 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는데 감사합니다.

동무들은 4. 15를 계기로 하여 내가 대외사업을 너무 많이 하기때문에 나의 건강이 념려된다고 하는데 일없습니다. 이번 4. 15행사에는 세계 130여개 나라에서 온 420여개 대표단과 수천명의 외국손님들이 참가하였습니다. 나를 축하하기 위하여 찾아온 외국손님들에게 집체적으로 연회를 한번 차려주는것으로 그들과의 사업을 대치할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를 찾아온 손님들인것만큼 내가 좀 힘들더라도 따로따로 다 만나주어야 합니다. 아직도 내가 만나주어야 할 대표단이 여러개 남아있습니다.

동무들이 텔레비죤화면을 통하여 나의 건강한 모습을 볼 때가 제일 기쁘다고 하는데 나는 건강합니다. 내가 이미 오래전에 60청춘, 90환갑이라고 말하였는데 나는 원래 60환갑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 나이가 90살이 되지 못한것만큼 환갑을 쇠지 못한셈입니다.

내가 80살이 되는 오늘까지 건강한 몸으로 혁명사업을 계속해올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동지들과 인민들의 덕분입니다. 혁명동지들과 인민들은 언제나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 보호해주었으며 성심성의로 도와주었습니다.

나는 길림에서 활동할 때 손정도목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손목사는 내가 길림감옥에 갇혔을 때 장작상에게 많은 돈을 먹이면서 나를 석방하기 위한 운동을 벌렸습니다. 나는 손목사를 비롯한 진보적인사들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올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때 내가 길림감옥에 한 1년만 더 갇혀있었더라면 일제놈들의 손에 넘어갈번 하였습니다. 일제놈들은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하자마자 길림감옥에 가서 나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내가 감옥에서 이미 나갔다는것을 알고는 한발 늦었다고 하면서 한탄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내가 일제놈들의 손에 넘어갔더라면 항일무장투쟁을 벌리지 못하였을것입니다.

손정도목사에게 손원태라는 막내아들이 있는데 그가 지금 우리 나라에 와있습니다. 손원태는 미국에서 살고있는데 병리학 박사입니다. 나는 그와 길림에서 헤여진 후 지난해에 처음 만났습니다. 손원태의 누이동생은 얼마전까지 남조선에서 적십자사 부총재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길림에서 처음으로 내온 조직은 조선인길림소년회였습니다. 그때의 일에 대하여서는 황귀헌동무가 잘 알것입니다. 황귀헌동무는 조선인길림소년회의 성원이였습니다.

나는 오가자에서 활동할 때에도 동지들과 인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에 있었던 일들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오가자에서 활동할 때 문숙곤동무의 집에서 류숙하면서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그 집에서는 몇달씩이나 나에게 밥을 해주었습니다. 식사할 때마다 마늘짠지를 밥상에 놓아주군 하였는데 그 마늘짠지가 별맛이였습니다. 문숙곤동무는 해방후에 우리 집에 와서 마늘짠지를 담그어준 일도 있습니다.

오가자는 우리가 초기혁명활동시기에 꾸린 중요한 혁명근거지였습니다. 내가 그때 오가자에 가서 그 마을을 혁명촌으로 꾸리고 청년공산주의자들을 많이 키우지 않았더라면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기 힘들었을것입니다.

나는 중국말을 잘하였기때문에 오가자에서 활동하는데 매우 유리하였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님은 중국말을 잘 배우라고 하시였습니다. 나는 아버님의 가르치심을 명심하고 중국말을 배웠는데 그것이 혁명투쟁을 하는데 큰 도움으로 되였습니다.

오가자에는 김해산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노릇을 하면서 중국인지주집에 자주 다녔습니다. 한번은 김해산이 나를 찾아와서 중국인지주가 땅문제를 가지고 다른 고장의 지주와 싸우다가 그 지주를 재판에 걸려고 하는데 고소장을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고심하고있다고 하면서 고소장을 쓸줄 아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고소장을 쓸줄 안다고 하였더니 그러면 중국인지주집에 같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원래 그 지주에게는 도시에 나가서 중학교를 졸업한 아들이 있었지만 그는 건달을 부리면서 공부를 잘하지 않다보니 고소장을 쓸줄 몰랐습니다. 내가 김해산과 같이 지주집에 가니 주인은 김선생이 왔다고 하면서 음식을 한상 잘 차려 대접하고나서 고소장을 써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소장을 써주었는데 지주는 그 고소장을 내고 재판에서 이겼습니다. 만일 그가 재판에서 졌더라면 몇십정보의 땅을 떼웠을것입니다. 그후부터 그 지주는 나를 명절때마다 자기 집에 청하였으며 나의 혁명활동을 적극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때 공주령에서 일제특무놈들이 그 지주집에 여러번 찾아와 나를 공산당패라고 하면서 모해하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그 지주는 김선생이 공산당패라고 하는것은 거짓말이다, 김선생은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일제특무놈들을 돌려보내군 하였습니다. 나는 오가자에서 그 지주의 보호를 받으면서 인민들을 혁명화하고 수많은 핵심청년들을 키웠으며 그들을 골간으로 하여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였습니다. 김해산의 딸 김봉호는 우리가 오가자에서 《꽃파는 처녀》를 창작하여 공연할 때 거기에 참가하였습니다. 김봉호는 해방후 평안북도에서 살다가 사망하였습니다.

나는 오가자에서 장울화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장울화는 무송지방에서 많은 땅과 가병을 가지고 살던 자산가의 아들이였는데 우리에게 자기 집 가병들이 가지고있던 총을 40정이나 가져다주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가병만 해도 한 200명 있었던것 같습니다.

장울화는 나의 혁명활동을 많이 도와준 잊을수 없는 사람입니다. 1936년 2월에 있은 남호두회의이후 내가 부대를 인솔하고 백두산지구로 나오다가 마안산밀영에 들려보니 그곳 아동단원들의 옷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그 시기는 우리가 유격구를 해산하고 북부국경일대에로 진출하면서 시련을 많이 겪던 시기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아동단원들에게 새옷을 해입힐수 있겠는가고 여러모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돈이 20원밖에 없었습니다. 그 돈은 내가 반일인민유격대를 거느리고 남만으로 진출하기에 앞서 집에 들렸을 때 우리 어머님이 남자의 주머니에는 급할 때 쓸 돈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준것이였습니다. 나는 어머님이 준 돈을 그때까지 쓰지 않고 소중히 보관하고있었습니다. 나는 그 돈으로 천을 사다가 아동단원들에게 옷을 해입히기로 결심하고 김산호에게 돈을 주면서 천을 사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0원으로 사온 천으로는 아동단원들에게 옷을 다 해입힐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울화에게 부탁했더니 그가 많은 천을 사서 보내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천으로 아동단원들에게 옷을 해입히고 유격대원들에게도 군복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그후에도 나는 장울화를 여러번 만났습니다. 나는 1937년에 부대를 거느리고 무송지방에 가서 장울화를 만났는데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상봉이였습니다. 나는 그때 장울화와 같이 하루밤을 지내면서 그에게 지하공작방법도 대주고 새로운 과업도 주었습니다. 장울화가 나를 만나고 돌아간 다음 변절자가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자는 지하투쟁을 하다가 일제놈들에게 체포된 후 변절하여 《귀순공작대》에서 주구노릇을 하고있었습니다. 그자는 백산청년동맹에도 관계하였기때문에 장울화가 나와 친한 사이라는것을 알고있었습니다. 장울화는 그자가 변절한것을 모르다보니 나를 찾아가려고 한다는 말을 곧이 듣고 그자에게 나를 만난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그때 장울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별일이 없었겠는데 나를 만난데 대하여 말하였기때문에 그자는 적들에게 장울화를 밀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울화는 헌병대놈들에게 체포되였습니다.

장울화는 자기가 적들의 고문에 못이겨 무송현의 지하조직을 불수도 있고 또 고문을 당하여 정신을 잃고 헛소리로 내가 있는 곳을 말할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죽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헌병대에서는 자살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병보석으로 집에 며칠간만이라도 나오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장울화의 아버지는 헌병대놈들에게 돈과 뢰물을 먹이고 아들을 병보석으로 집에 데려내왔습니다. 장울화는 집에 나와있으면서 안해에게 유서를 남긴 다음 사진현상약을 먹고 최후를 마쳤습니다. 결국 장울화는 나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우리와 같이 싸운 중국동지들이 많았지만 나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은 사람은 장울화밖에 없습니다. 장울화에게 금천이라는 아들과 금록이라는 딸이 있는데 장금천은 1933년 3월에 태여났고 장금록은 1937년에 태여났습니다.

나는 해방후 장울화의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있다가 몇해전에야 만났습니다. 몇해전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그에게 장울화의 아들 장금천을 만나고싶으니 우리 나라에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듬해에 장금천이 우리 나라에 왔댔습니다. 장금천은 아주 똑똑합니다. 이번 4. 15를 계기로 장울화의 아들과 딸이 다 우리 나라에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루저녁 그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여러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번에 장금천은 내가 무송에서 장울화와 같이 마신것과 같은 술을 가지고왔고 장금록은 자기 손으로 내가 입을 모세타를 떠가지고 왔습니다. 장금록은 나에게 모세타를 선물하면서 국제친선전람관에 보내지 말고 꼭 입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모세타를 입고 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전문진동무는 나에게 군복을 지어주었습니다. 내가 부대를 거느리고 왕청으로 가자 그곳 재봉대원들은 청년장군이 왔는데 좋은 옷을 지어드리자고 하면서 나에게 군복도 만들어주고 외투도 만들어주었습니다.

항일혁명투쟁시기에 동지들과 인민들로부터 내가 받은 사랑과 지지는 참으로 고귀한것이였으며 그런 사랑과 지지가 있었기에 우리가 류례없이 간고하고 엄혹한 조건에서도 굴함없이 싸워 승리할수 있었습니다.

항일혁명투쟁은 주체위업을 개척한 영광스러운 혁명투쟁이였으며 이 투쟁에 참가한 항일투사들은 우리 혁명의 자랑스러운 첫 세대들입니다. 바로 여기에 항일투사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있는것입니다.

지난날 손에 무장을 잡고 투쟁에 참가한 항일투사들가운데 자신의 명예나 벼슬을 바라고 혁명의 길에 나선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광복된 조국에서 인민들이 행복하게 살게 될 그날을 바라면서 혈전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나도 자기 이름을 내거나 조국이 광복되면 국가주석이 될것을 바라고 혁명의 길에 나선것은 아닙니다. 나는 혁명의 길에 나선 첫 시기부터 조국땅에서 일제침략자들을 몰아내고 인민이 주인이 되여 다같이 행복하게 사는 인민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투쟁하였습니다.

물론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우리 동무들은 앞으로 조국이 광복되면 내가 대통령이 될것을 바라고있었습니다. 어느해인가 내가 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김책, 안길, 서철동무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갔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모스크바의 한 초대소에 들었습니다. 나는 어느날 밤 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내가 유격대원들을 여러곳에 파견하여 책을 구해다보는것을 알게 된 김정숙동무가 큰방에 책을 가득 가져다놓고 나에게 이 책들을 마음대로 골라보라고 하면서 이만한 책이면 사령관동지께서 일생동안 보아도 다 보지 못할것이라고 하는것이였습니다. 꿈에서 깨여나보니 밤 12시쯤 되였는데 그때까지 다른 동무들은 잠을 자지 않고있었습니다. 내가 꿈이야기를 하니 그들은 모두 그 꿈은 앞으로 사령관동지께서 대통령이 될 꿈이라고 하면서 이런 기쁜 날에 술이나 한잔씩 마시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대소에서 일하는 로인에게 부탁하였더니 그가 워드까 두병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동무들과 함께 그 술을 고뿌에 부어마시고 잠을 잤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와서 김정숙동무에게도 그 꿈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김정숙동무는 그때 내가 한 말을 잊지 않고있다가 나라가 해방된 다음 서재에 책을 가득 채워놓고 나에게 책을 마음껏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김정숙동무가 기념으로 서재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기에 찍었는데 아마 그 사진이 지금도 있을것입니다.

이제는 녀성항일투사들의 나이가 70살이 넘었을것입니다. 지금 전순희동무의 나이가 69살이면 항일투사들가운데서 제일 젊었을것입니다. 혁명의 1세대인 동무들은 앞으로 건강관리를 잘하여 오래 살면서 혁명의 꽃을 계속 피워야 합니다. 그래야 혁명의 1세대로서의 영예를 계속 빛내일수 있습니다.

사람은 생의 마무리를 잘하여야 합니다. 지난날 조국과 민족앞에 떳떳치 못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생의 마무리를 잘하면 인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수 있습니다. 최덕신선생이 그런 사람들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최덕신선생은 지난날 우리와 상반되는 길을 걸어왔지만 생의 말년에 과거와 결별하고 조국통일운동대오에 서서 겨레와 함께 나아감으로써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애국렬사로서 영생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최근에 만든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제1부-4부는 최덕신선생을 원형으로 하여 만든것입니다. 선생의 부인은 류동열선생의 딸입니다. 류동열선생은 그전에 소문난 사람이였습니다. 1932년에 윤봉길이 상해의 어느 한 공원에서 일제놈들에게 폭탄벼락을 안겼는데 그는 류동열선생과 한계렬이였습니다. 최덕신선생의 부인은 남편이 인생말년에 택한 길을 따라 앞으로 조국통일위업에 헌신하리라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동무들과 같이 기념사진도 찍고 오찬도 하면서 어머님의 탄생일을 뜻깊게 기념하였습니다.

오늘 동무들이 나와 함께 강반석어머님탄생 100돐을 뜻깊게 기념할수 있은것은 김정일동지의 관심이 컸기때문입니다. 나는 어제 저녁에 어머님탄생 100돐기념 오찬회에 일군들을 참가시키는 문제를 김정일동지와 토의하였는데 그는 녀성항일투사들과 항일혁명의 녀성연고자들, 녀성간부들을 참가시키는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의견대로 동무들이 이 자리에 참가하도록 하였습니다.

김정일동지는 지난날 나와 함께 투쟁한 일군들을 언제나 존경하고 잘 돌봐주고있습니다. 그는 항일혁명투쟁에 참가한 로투사들이 생활에서 불편이 있을세라 극진히 보살펴주고있습니다. 그는 집에서 휴식하고있는 항일투사들에게도 좋은 옷을 해주고 고급승용차를 보장해주었으며 그들의 생활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 풀어주고있습니다. 김정일동지는 항일투사들이 앓지 않도록 건강을 잘 돌봐주고있으며 그들을 해마다 휴양도 보내주고있습니다. 그는 항일혁명투쟁에 참가한 로투사들뿐아니라 해방후부터 나와 함께 일해온 일군들도 존경하고 그들의 생활을 잘 돌봐주고있습니다.

김정일동지가 나와 같이 투쟁해온 일군들을 존경하고 극진히 돌봐주는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나는 그가 이렇게 하고있는데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김정일동지가 그처럼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나와 같이 투쟁해온 일군들을 잘 돌봐준다는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김정일동지는 나라와 인민에 대한 충성심이 높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는 나라와 인민에게는 충신이고 부모에게는 효자라고 말하는것입니다. 김정일동지가 나라와 인민에게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풍모만 놓고보아도 그가 인민의 령도자로서의 품격과 자질을 갖추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한 나라를 령도하는 사람이 부모도 모르고 혁명선배도 몰라본다면 그런 사람은 지도자로서의 구실을 바로할수 없습니다. 그전에 어느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은 정권을 쥐자마자 혁명선배들을 긁어내리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가 혁명선배들을 긁어내린것은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혁명선배들을 존경하고 인민을 위하여 진심으로 복무하는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인민들이 받들어주고 내세우지만 인민들이 인정하지도 않는데 자기가 자기를 내세우려 하는 사람은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수 없습니다.

한때 우리 당중앙위원회의 요직에 있던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도 혁명선배들과 우리가 신임하고 등용한 일군들을 모해하고 떼버리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자들의 음모책동에 의하여 나의 항일혁명투쟁시기의 연고자들과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사람들 그리고 해방후 우리가 키워 등용한 사람들가운데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김정일동지는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라와 인민에게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있습니다. 그는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복무하기때문에 인민들로부터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그의 탄생 50돐을 맞으며 지은 송시에서 그가 문무충효를 다 겸비하니 모두가 우러른다고 썼습니다. 사실 김정일동지처럼 문무충효를 다 겸비한 인민의 지도자는 드물것입니다. 동무들이 한결같이 말한것처럼 조선인민군창건 60돐을 맞으며 그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칭호를 수여한것은 응당한것입니다.

동무들이 조선인민군창건 60돐경축 열병식때에 나는 대원수복을 입고 김정일동지는 원수복을 입고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조국이 통일되여 통일의 광장에 나선다면 몰라도 아직 나라가 통일되지 못하였는데 나도 대원수복을 입을 멋이 없고 김정일동지도 원수복을 입을 멋이 없습니다.

우리가 백두밀림에서 개척한 혁명위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혁명의 먼길을 가야 합니다.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하고 완성하려면 문무충효를 다 겸비하고 혁명과 건설을 승리에로 령도하고있는 김정일동지를 잘 받들어야 합니다. 항일투사들은 혁명의 2세대, 3세대, 4세대들을 잘 도와주어 그들이 김정일동지에게 충실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나는 동무들이 지금까지 나를 받들고 혁명의 길을 꿋꿋이 걸어온것처럼 앞으로 일편단심 김정일동지를 충성으로 잘 받들고 사회주의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힘차게 싸워나가리라고 굳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