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2(2023)년 5월 21일 로동신문
영웅조선의 국보적도서 현대포위전의 빛나는 모범을 창조하신 희세의 령장
위인의 업적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해지는 력사의 가치와 더불어 찬연한 빛을 뿌리는 법이다. 영웅조선의 국보적도서인 이는 조국해방전쟁을 빛나는 승리에로 이끄신 우리는 그 성스러운 력사의 페지를 한장한장 번지며 탁월한 군사사상과 전략전술, 비범한 령도로 세상사람들을 놀래우는 빛나는 전승을 안아오시여 미제의 아시아침략기도와 세계제패전략실현을 저지시키고 새로운 세계대전을 막아 인류평화를 수호하신 《조국해방전쟁에서의 승리는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그중에는 세상에 현대포위전의 모범으로 널리 알려진 대전해방전투에 대한 내용도 있다. 도서에는 《현대포위전의 모범-대전해방작전》이라는 제목으로 그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자료들이 서술되여있다. 대전해방전투는 대전해방작전의 서곡은 금강강행도하였다. 적들은 노도와 같이 진군하는 인민군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금강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후 이 계선을 《불퇴의 선》, 《최종방어선》이라고 떠벌이면서 《3년은 문제없이 지탱할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적의 강하천방어를 돌파해본 경험이 없는 인민군대의 지휘관들은 금강도하와 관련한 신통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모대기고있었다. 이러한 때 그리하여 인민군련합부대들은 7월 14일부터 금강강행도하전투를 시작하였으며 이 작전에서 금강방어의 주력이라고 하던 미제침략군 24보병사단 19보병련대가 괴멸됨으로써 적들의 《최선의 방어진지》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말았다. 이에 대하여 한 미군종군기자는 자기의 글에서 《내가 비로소 처음으로 이번 전쟁의 완전한 모습을 리해하게 된것은 대전북방의 금강전선에서였다.미국사람들은 그 전선을 확보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그러나 미군이 모든 항공력량을 총동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선군은 도하에 성공하였으며 63야포대대를 포위하였다.그리하여 미군은 하루밤동안에 대전 서남방향에 있는 난촌으로 전부 퇴각하여버렸다.》라고 썼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금강도하전투가 치렬하게 벌어지던 그 시각 새벽고요에 잠긴 서울시가에 조용히 들어서신 현 전선정황에 대처한 작전전술안을 토의하는 회의에서는 대전포위와 관련한 문제가 기본으로 상정되였다. 미제는 금강의 《불퇴의 선》이 모래성처럼 무너지자 미제침략군 24보병사단과 1기병사단을 비롯한 숱한 병력을 동원하여 대전을 기어이 고수함으로써 어떻게 하나 전쟁형세를 돌려세워보려고 발악하고있었다. 조성된 정세를 예리하게 통찰하신 완전포위! 이것은 전멸을 의미하는 말이다.사실상 작전개시전에 대전의 적은 이미 포위 아니 전멸의 올가미안에 있었다.그것도 전례를 찾아볼수 없는 우리 식의 독특한 포위전법에. 당시까지만 해도 대무력에 의한 포위작전은 대체로 정면에서 공격하는 부대들과 적의 량익측에서 타격하는 부대들이 일정한 종심에서 합치는 타격형식과 포위의 외부전선과 내부전선을 형성하는 방법으로 실현되였다. 이것은 세계전쟁사의 굳어진 공식이였다. 하지만 이러한 전법은 산이 많고 기동로가 제한되여있으며 수적, 기술적으로 우세한 적과 싸워야 하는 우리의 실정에 맞을수 없었다. 이로부터 아무도 관심을 두고있지 않던 대전 서남부의 론산계선에서 대전포위의 고리를 찾아낸 묘술은 항일대전시기 일행천리의 기민한 우회전법으로 적을 소멸한 풍부한 경험을 쌓으신 인민군부대들의 행동이 얼마나 불의적이고 기동적이였던지 적들은 대전 남쪽 구봉산에서 인민군대를 발견하였다는 보고를 받고도 제놈들이 완전포위된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7월 20일 새벽 3시 두대의 땅크와 적은 력량의 보병들로 편성된 아군의 소부대가 시내를 종횡무진하며 적들을 혼란에 빠뜨린데 이어 새벽 5시 드디여 결정적순간을 놓치지 않고 대전시가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할데 대한 대전시가에 포위된 적집단에 대한 일대 섬멸전이 개시되였다.인민군련합부대들은 포병화력의 엄호밑에 북쪽과 서북쪽 및 서쪽에서 일제히 공격으로 넘어가 순식간에 적의 방어진지들을 점령하고 시가전을 벌리면서 적들을 소멸하였다.인민군대의 포위망이 조여들자 적들의 지휘체계는 완전히 마비되고 전투서렬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공격개시 7시간만에 대전포위작전은 완전한 승리로 결속되였으며 《상승사단》이라고 떠벌이던 미제침략군 24보병사단과 괴뢰1사단, 7사단은 완전히 괴멸되고 그후 미군 24사 사단장 띤은 포로되였다. 후날 조선전쟁에 참가하였던 한 미군장교는 《실록 한국전쟁》에서 《그것은 잘 정리된 전선을 유지하는 유럽식경험을 쌓은 미군사지휘관들이 이미 때가 늦었을 때까지 파악하지 못한 전술이였다.》라고 실토하였다. 대전해방전투는 갓 창건된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부대가 적들에게 커다란 섬멸적타격을 준 안도현 소영자령에서의 매복전투, 시가전의 새로운 모범을 창조하면서도 유격전의 모든 요구를 최상의 수준에서 립체적으로 맞물려 진행한 보천보전투, 적들의 교활한 술책을 미리 알고 시작전부터 아군의 승리를 확정하고 벌린 간삼봉전투, 일행천리전술로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긴 대홍단전투를 비롯하여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적용된 수많은 전법들과 전투경험들이 현대전의 요구에 맞게 높은 수준에서 구현된 독특하고 성공적인 작전이였다. 조국해방전쟁은 바로 대전해방전투에서와 같이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추종세력들이 우리 공화국땅에서 포위섬멸된 하나의 커다란 《대전해방전투》라고도 할수 있었다. 어찌 그뿐이랴. 사품치듯 밀려드는 천만대적도 발아래로 굽어보시며 적들의 수적, 기술적우세를 정치사상적, 전략전술적우세로써 타승하시는 강철의 령장의 승리의 화살표가 그어지는 곳마다에서 원쑤들의 비명이 터져올랐다. 조국해방전쟁에서의 정녕 그것은 미제와의 사생결단의 대결에서 주체조선의 영웅적기상을 온 세상에 떨치시였으며 전세계적범위에서 반제반미투쟁의 돌파구를 열어놓으신 본사기자 김준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