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2(2023)년 7월 24일 로동신문
조선중앙통신사 상보
조국해방전쟁시기
조국청사에 70돐을 아로새긴
가렬처절한 전화의 나날 우리의 영용한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은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전선탄원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조국해방전쟁의 전기간 불타는 고지와 일터와 전야마다에서 광범히 조직전개된 대중운동의 거세찬 불길은 세계전쟁사에 일찌기 있어본적이 없는 영웅적인 투쟁정신과 기풍을 창조하고 전설적인 승리의 기적들을 탄생시키며 영웅조선, 영웅인민의 불가항력을 만방에 과시하였다.
전화의 나날
《우리 조국청사에 금문자로 새겨진 전승세대의 공적중에서 제일 귀중하고 값진것은 영웅적인 투쟁정신과 기풍을 창조한것입니다.》
인민의 무궁무진한 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승리는 반드시 우리 인민의 편에 있다는 철석의 신념과 의지를 지니시고 우리 군대와 인민을 전쟁승리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신
조국해방전쟁이 개시된 다음날인 주체39(1950)년 6월 26일과 7월 8일 전체 조선인민에게 하신
온 나라 전체 인민은 인민민주주의제도와 민주개혁의 성과들을 사수하고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무력침공을 분쇄하기 위한 성스러운 조국보위성전에서 승리자가 될 결의를 다지며 앞을 다투어 전선으로 탄원하였다. 조국해방과 더불어 새롭게 태여난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참다운 권리와 아름다운 희망, 진정한 행복을 안겨준 공화국정권은 다시는 빼앗길수 없는 삶의 요람, 목숨바쳐 지켜야 할 운명의 전부였다. 평양시를 비롯한 각지의 공장, 기업소, 농촌, 어촌, 학교, 병원, 가두에서는 조국보위의 신성한 의무를 자각한 각계각층의 인민들과 청년학생들이 군중대회, 종업원총회, 민청열성자회의 등 여러가지 모임을 열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기 위하여 전선에 나갈것을 열렬히 토로하였다. 수도 평양과 송림, 해주, 신의주, 남포, 흥남, 원산, 라남, 함흥을 비롯한 공업지구들에서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준엄한 시각에 혁명의 령도계급으로서의 사명을 깊이 자각한 로동계급이 로동자련대들을 조직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해방후 땅의 주인으로 된 농민들도
6월 27일
이어 불과 3~4일사이에 온 나라 청년학생들모두가 반미결사항전에 총궐기해나섰다. 전쟁의 첫시기부터 힘있게 벌어진 전인민적인 전선탄원운동은 날을 따라 고조되여 8월중순에는 탄원자수가 무려 124만 9, 000여명에 이르렀으며 인민군대렬을 자원적인 전투대오로 계속 증원, 보충하여 전선의 타격력을 높이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전선탄원운동은
전쟁의 3년간 류례없이 치렬한 반제반미대결전의 준엄한 전초선이였던 화선전방들에서 영웅적장병들의 견결한 혁명정신과 결사항전의 투지를 배가해주는 위력한 대중운동들이 힘있게 전개되였다. 화선용사들의 열렬한 호응과 결사의 실천속에 전선에서 전선에로 급속히 확대된 많은 대중운동들은 혁명의 붉은 총대를 억세게 틀어쥔 조국수호자들로 하여금 당과 혁명을 보위하며 령토와 인민을 사수함에 불멸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발휘하게 한 정신력의 바탕으로 되였다.
인민군대의 전투력강화에서 중대가 차지하는 위치를 깊이 통찰하신
중대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군사정치훈련수준과 당정치교양사업수준을 높이는데 기본을 두고 모범중대운동을 벌릴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혀주시고 몸소 그 평가기준까지 제정하여주신
전술, 사격, 정치 등 모든 측면에서 우수하였으며 한달동안에만도 560여명의 적병을 살상포로하고 많은 전투기술기재를 로획한 중대의 전과를 보고받으신
모범중대운동은 전선부대들에서 원쑤격멸의 의지를 백배해주며 힘있게 전개되였다. 모범중대, 모범군인들의 대오는 날을 따라 급격히 늘어나 불과 1년사이에 전군적으로 근 400개의 모범중대가 육성되였으며 수만명의 모범군인들이 배출되였다. 전승의 그날까지 맹렬히 전개된 모범중대운동을 통하여 인민군장병들은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더욱 억세게 준비되였으며 전군의 전투적위력은 무비의 대중적영웅주의를 낳으며 침략자들을 전률케 하였다.
1951년 4월 12명의 전우들과 함께 무명고지를 영웅적으로 사수하였으며 최후의 순간에 《조국의 고지는 나의 고지》라는 불같은 웨침을 남긴 한계렬영웅은 이 운동의 선구자였다. 《나의 고지》운동은 군인대중자신의 운동으로 벌어져 1951년 여름부터는 모든 전선부대, 구분대들에 확산되였다.
인민군용사들은 자기가 지켜선 고지가 곧
복수기록운동은 전화의 나날 쓰러진 전우와 인민들의 원한을 씻으려는 인민군용사들의 위력한 대중운동이였다. 1951년 2월 전투에서 중상을 입게 되자 수류탄을 입에 물고 한몸이 그대로 작렬하는 폭탄이 되여 적들의 무리속에 뛰여든 강호영영웅을 배출한 중대에서 타오른 복수기록운동의 불길이 전 전선을 멸적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인민군용사들은 복수기록장의 마지막장 마지막줄까지 원쑤들의 주검의 수자로 채우자고 토로하며 누구나 다 복수기록장을 가슴에 품고 싸웠으며 희생된 전우들의 몫까지 합쳐 적들을 무자비하게 격멸소탕하였다. 전투무기의 위력을 최대로 발휘시켜 더 많은 적을 소멸할데 대한 당의 전투적호소를 높이 받들고 인민군대에서 전개된 《민청》호무기쟁취운동에도 전승세대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응축되여있다. 1951년 4월 어느한 고지전투때 두팔과 다리에 부상을 당하여 운신을 못하게 되자 턱으로 압철을 눌러 수많은 적을 살상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조군실영웅의 중기관총 236호에 영예로운 《민청》호칭호가 수여되였으며 이것은 곧 《민청》호무기쟁취운동의 발단으로 되였다. 수많은 인민군용사들이 싸우는 고지마다에서 침략자들을 무리로 쓸어눕힘으로써 자기의 무기에 《민청》호의 글발을 자랑스럽게 새겨넣게 되였다. 조군실영웅과 같은 사단에서 중기사수로 복무한 박찬수전투원은 1211고지방어전투때 수백명의 적을 살상하는 위훈을 세우고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았으며 그가 사용하던 중기관총 92호는 《민청》호중기로 불리워지게 되였다. 로태진영웅이 뜨겁게 달아오른 포신을 안아세우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원쑤들에게 불벼락을 퍼부은 박격포와 최고사령부의 방탄벽이 되여 미제의 공중비적들에게 죽음의 불소나기를 들씌웠던 고사기관총, 호도반도에서 적구축함을 포함한 대소함선 29척을 격침격파하는데 기여한 해안포, 근위 제6보병사단에 소속되여 서울해방전투와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둔 자동포, 1211고지와 가렬한 싸움터들에서 많은 적유생력량과 각종 포, 땅크, 자동차, 화점을 파괴소멸하여 109개의 별이 새겨진 곡사포 5431호를 비롯하여 《민청》호칭호를 지닌 무기들은 무수하다. 위력한 대중운동으로 전개된 《민청》호무기쟁취운동의 불길속에 단 한해사이에만도 무려 3, 460여개의 무기, 전투기술기재에 《민청》호칭호가 수여되였다.
전대미문의 군사적기적을 떠올리며 전 전선에서 기세차게 벌어진 대중운동들은
전쟁의 3년간 포화속의 일터와 마을들에서 애국과 혁신의 대중운동이 거세차게 전개되여 영웅조선특유의 불가항력을 남김없이 떨치였다. 전쟁초기부터 후방인민들은 《후방도 전선이다!》, 《싸우는 인민군용사들에게 한알의 탄알, 한자루의 총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만들어 보내주자!》라는 구호밑에 전시생산을 위한 대중운동에 총궐기하였다. 해방후 새조국건설시기에 시작된 우리 로동계급의 증산경쟁운동은 전시 수많은 대중운동들을 낳으며 애국열의의 상징으로, 영웅성의 숭고한 발현으로 더욱 승화되였다. 전국의 공장, 기업소들에서는 전시환경에 맞게 전선에 더 많은 물자들을 보내주기 위한 시간외 로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전선으로 나간 로동자들의 생산과제까지 맡아 수행하려는 목표밑에 모두가 자진하여 로동시간을 연장하고 3교대제를 2교대제로 개편하며 쉬는날이 따로없이 생산활동을 벌리는 자원적애국운동의 봉화가 신의주방직공장에서 타올랐다. 이들의 집단주의적소행은 전국적으로 시간외 로동 및 휴식일로동열풍을 일으켜 전쟁이 시작된 후 10일동안에만도 이 운동에 궐기한 각지 공장, 기업소 작업반들의 수는 8, 600여개에 달하였다. 전선돌격대운동, 청년작업반운동, 2인분, 3인분초과생산운동 등 여러가지 애국운동이 온 나라에 급속히 파급되여 전시생산을 적극 추동하였다. 어느한 공장의 로동계급은 파괴된 생산시설을 시급히 복구하고 생산계획을 넘쳐 수행하기 위하여 전시증산돌격대를 조직하였다.돌격대원들은 기대가동률을 높이기 위하여 30분 먼저 출근하여 기계를 점검하는 동시에 교대인계를 하는 동안에도 기계를 멈추지 않고 생산을 계속함으로써 모두가 책임량을 300%로 수행하였으며 전시증산돌격대원들의 뒤를 따라 온 공장이 300%초과생산운동에 나섰다. 싸우는 인민군용사들에게 한개의 수류탄, 한자루의 총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만들어 보내주려는 일념안고 온 나라 로동계급이 앞을 다투어 다기대운동, 시간합리화운동, 창의고안운동, 원가저하운동을 비롯한 각이한 애국운동을 벌렸다. 사생결단의 의지를 지니고 우리의 로동계급은 없는것은 만들어내고 부족한것은 보충하면서 매일 작업량을 이전에 비해 훨씬 넘쳐 수행하였으며 이 과정에 새 기준량창조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검덕광산의 로동계급은 종전의 작업조직을 개선하고 기술기능을 높여 채광에서 200%, 굴진에서 130%이상의 새 기록을 창조하여 1951년 상반년계획을 훨씬 초과완수하였다. 검덕로동계급의 투쟁에 호응하여 광업부문의 전체 로동자들이 새 기준량창조운동에 궐기하였으며 이 운동은 인민경제 각 부문으로 확대되여 평화시기에는 상상도 할수 없던 새 기준, 새 기록들이 련이어 태여났다. 새 기록창조의 선구자들속에는 선진적인 채굴법으로 1951년 6월에 자기 기준량의 14배이상에 달하는 쇠돌을 캐내고 1952년에는 하루에 217t을 캐냄으로써 년간계획을 8개월이나 앞당겨 완수한 영웅착암공과 다기대, 다발파운동의 봉화를 들고 하루락광기준량을 1, 400%로 넘쳐 수행한 착암공도 있었다. 새 작업방법을 창안도입하여 8대의 직기를 돌린 평양방직공장 직포공의 모범을 따라 모든 직포공들이 총궐기한 결과 1952년에는 전해에 비하여 천을 323만m나 더 생산하는 비약이 일어났다. 수송전사들이 전쟁전기간 화물수송량과 주행거리에서 새 기준을 창조하기 위한 운동을 힘있게 전개하였다. 평양기관구의 로동자, 기술자들은 《한대의 기관차도 멈추지 말고 전선에 동원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관차의 수리기간을 줄이며 더 많은 짐을 끌기 위한 운동을 벌리였다. 고조되는 견인초과운동과 함께 하루밤에 180㎞이상 달리기 위한 먼거리주행운동이 전개되는 속에 년간주행거리보다 3, 400여㎞나 더 달린 영웅기관사와 기관차의 견인정량을 200%까지 끌어올린 기관사들을 비롯한 새 기록창조의 혁신자들이 수많이 배출되였다.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서 힘차게 벌어진 새 기준량창조운동은 극난한 조건에서도 전시생산을 끊임없이 늘일수 있게 하여 1951년도 공업총생산계획이 109.6%로 넘쳐 수행되고 1952년도 공업총생산액은 전해에 비하여 19% 더 장성하였으며 군수공업기업소들의 생산실적은 평화적건설시기에 비하여 5~6배이상 높아져 인민군대 매 보병사단의 화력이 160%로 늘어나게 되였다.
중첩되는 시련을 거대한 승리로 반전시킨 로동계급의 완강한 곤난극복정신, 창조와 혁신의 기상으로 충만된 전시증산경쟁운동은
농촌들에서도 전쟁승리를 식량증산으로 담보하기 위한 대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였다.
지난날에는 남성들만이 할수 있다던 기성관례를 깨뜨리고 논밭갈이를 녀성들의 힘으로 보란듯이 해제끼며 우리 녀성들이 틀어잡은 보탑은 단순한 농기구가 아니라
1951년 봄 녀성보잡이운동의 첫 봉화가 타오른 후 이 운동은 대중적운동으로 발전하여 1951년에 평안북도에서 3, 650여명, 평안남도에서 2, 690여명이 보탑을 잡았으며 그 대렬은 더욱 늘어나 1952년에 황해도에서만도 5, 000여명을 기록하였다. 가증스러운 적기의 폭격이 씨앗을 묻은 땅을 사정없이 파헤치고 기총탄이 생명을 시시각각 위협했지만 녀성들은 소잔등과 몸에 위장을 하고 하루평균 1, 000~1, 500평의 논밭을 갈았다.
1951년 여름 강원도 전연지대의 농민들이 공동작업대를 뭇고 적들과 싸우면서 농사를 지은 모범이 일반화되여 전선공동작업대운동이 광범히 조직전개되였다.
애국농민, 농민영웅들의 대중적투쟁에 의하여 전쟁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해마다 모든 영농공정이 제철에 끝나고 알곡을 비롯한 농촌경리부문의 지표별 생산계획들이 빛나게 완수되였다. 전선원호운동이 광범히 벌어져 영웅조선의 군민대단결의 위력을 힘있게 떨쳤다. 전체 인민의 적극적인 열의속에 군기기금헌납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로동자, 농민, 사무원, 기업가, 상인 등 각계각층 인민들이 앞을 다투어 이 운동에 참가하는 속에 많은 현금과 량곡, 귀금속들이 헌납되였으며 《로동자》호, 《민청》호, 《대학생》호, 《소년》호, 《상공》호 등의 이름을 가진 비행기, 땅크, 함선들이 마련되여 싸우는 전선에 보내졌다.
각지의 농민들은 한알의 쌀이라도 전선에 더 많이 보내라고 하신
평안남도에서만도 1953년 2월말까지 6, 390가마니의 전선원호미가 헌납된것을 비롯하여 1952년 11월초부터 1953년 4월말까지 반년동안에 걸쳐 벌어진 전선원호미헌납운동에는 전국의 모든 농민들이 참가하였다. 인민들은 파괴된 철도, 다리, 도로를 희생적으로 복구하여 인민군부대의 진격을 보장하였으며 각종 군수물자들을 신속하게 전선으로 날랐다. 전선지구 인민들은 비발치는 탄우속을 뚫고 포탄과 식량을 전호까지 운반하였고 돌아오는 길에는 부상병들을 후송하였으며 화선병사들과 한전호에서 갱도진지굴설작업도 하였다. 험한 온정령을 넘어 화선까지 70여리의 길을 하루와 같이 오고간 남강마을사람들을 비롯한 고성군인민들의 수는 1951년 가을에만도 연 2만 8, 860여명에 달하였다. 후방인민들은 인민군용사들에게 지성어린 위문품과 위문편지, 축기들을 보내였고 중앙 및 각 도예술단들은 불타는 화선을 순회공연하였으며 각급 인민대표단과 각 시, 군단위로 조직된 위문단들이 전선을 방문하여 인민군용사들을 격려하였다.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청소한 공화국의 존망을 결정짓는 준엄한 첫 시련이였던 조국해방전쟁은
우리 인민과 인민군장병들은
주체112(2023)년 7월 23일 평 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