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2(2023)년 9월 5일 로동신문
인민의 뜻으로 서고 인민의 힘으로 전진하는
우리 민족의 5천년력사와 인류의 사회주의국가건설력사에서 거대한 의의를 가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대업은 그
《새조국건설시기에 나온 좋은 노래들은 인민들속에서 활화산같이 터져오른 해방의 기쁨과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려는 인민들의 철석같은 의지를 반영한것으로 하여 새조국건설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을 힘있게 고무하였습니다.》
건국의 주인공들의 탄생과 성장과정, 그들의 공적이 집약되여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와 《빛나는 조국》,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의 창작과정자체가 곧 공화국건국사의 축소판과도 같다.이 건국시대 3대명곡은 수십년간의 일제식민지통치에서 갓 해방된 이 땅에서 단 몇해동안에 이룩된 우리의 건국대업이 무슨 힘으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떤 요인으로 하여 우리 공화국이 75년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불멸, 불변의 력사를 자랑스럽게 새기고있는가를 후손만대에 실증해주는
이 세편의 국보적인 명곡들이야말로 반만년력사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인민의 국가를 일떠세운 건국세대의 비상한 애국열이 낳은 건국대교향곡이며 공화국의 75년력사를 줄기차고 억세게 떠밀어온 전인민적인 애국합창곡이다.
새 인간, 새 인민탄생의 고고성
나라가 서면 그를 상징하는 노래인 국가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것은 건국의 하나의 공식이여서 어느 나라에서든 국가창작은 건국대업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군 하였다.나라를 대표하는 음악인 국가의 창작은 응당 그 나라의 가장 걸출한 창작가들이 해야 할 몫이지만 세상에는 인재가 없어 부득불 남의 나라의 노래를 가져다 국가로 정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동서고금의 국가건설력사에서 그 례를 찾아볼수 없는 전설적인 일화들로 충만된 우리 공화국의 건국사에는 음악학교의 문전에도 가보지 못하고 초보적인 음악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국가를 작곡한 놀라운 사실이 기록되여있다.그가 바로 김원균선생이다.
후날에는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점점 쪼들려가는 가정살림때문에 화장품장사, 상점심부름군노릇도 해보았고 가죽이기는 일, 뼁끼통을 들고 간판을 그려주는 일도 하였다.왜놈광산의 오소리굴같은 갱속을 목숨걸고 기여다니기도 하였고 수용소나 다름없는 병기소에서 왜놈장교들에게 얻어맞으면서 식민지노예의 뼈아픈 눈물을 삼키기도 하였다. 그가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어느한 악기점의 간판을 그려주고 값대신 기타를 얻어가진 다음부터였다.그후 남의 집에서 피아노를 좀 배우다가 그것마저 돈이 없어 그만두었다. 낳아준 부모밖에 누구도 그 이름을 모르던 불우한 식민지청년이 세상에 두번다시 태여나는 날이 마침내 다가왔다.
영명하신
꽃동산 삼천리 새동이 튼다 새로운 아침에 광명이 왔다 … 김원균선생은 큰 종이 두장에 먹으로 악보와 가사를 적어 자기가 살던 세집의 울타리에 붙이고 마을사람들에게 노래를 배워주었다.이 노래가 새 조선의 첫 노래 《조선행진곡》이였다. 해방된 다음해 어느날 김원균선생은 한편의 가사에 대한 작곡을 의뢰받게 되였다.작곡가도 아닌 자기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게 되였는지 알리 없었지만 김원균선생은 그 희한한 가사를 흥분속에 받아쥐였다.제목부터 숨이 꺽 막혔다.
음악학교란 문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작곡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초도 상식도 없던 김원균선생은 다름아닌 민족의 영웅
김원균선생은 《표창장 북조선음악동맹 김원균 1917년 1월 2일생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작곡하여 인민대중을 민주주의적으로 교육하고 민주주의민족문화건설에 있어서 우수한 성과를 가져왔으므로 이를 표창함 1947년 5월 1일 북조선인민위원회》 그때를 추억하여 김원균선생은 자기의 수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몇번이고 그 글을 되풀이해가며 읽었다.… (내가 과연 작곡가란 말인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를 작곡가라고 생각도 안했고 또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의 어려서부터의 꿈이며 희망이였던 미술가가 되리라는 념원을 버리지 않고있었다. (그런데 국가에서, 당에서 나를 작곡가라고 불러주고 만사람들앞에 선포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나는 자신의 여생을 작곡가로서 당과 국가와 인민을 위해 바치리라는 굳은 결심을 다지였다.》 영생불멸의 혁명송가와 함께 새 조선의 젊은 음악재사가 또 한명 태여났다.그후 김원균선생은 미구하여 창건되게 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창작사업에 망라되게 되였다.
노래들을 주의깊게 들으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는 이렇게 세상에 태여났다.국가를 작곡한 공로로 김원균선생은 공화국의 첫 공로메달을 수여받았다. 아무런 음악교육도 받지 못한 청년이 새 조선의 최대의 음악걸작품을 한해에 한편씩 련이어 창작하였다는 사실자체가 공화국의 건국대업이 우리 인민의 운명에서 일으킨 거창한 변천의 생동한 증거였다.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인재는 건국의 골간이다.우리 공화국은 은금의 자원이나 대국의 지원이 아니라 민족의 태양이신
평범한 사람들을 건국의 앞장에 내세워주시는
5천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로운 인민은 전설적위인이신
우리 나라 음악교육의 최고전당인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무용종합대학의 청사앞에는 공화국이 낳은 음악재사 김원균선생의 반신상이 있다.음악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새 조선의 첫
조선은
빛나는 인민의 애국, 빛나는 인민의 조국
앞으로 창건되게 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창작이 군중적으로 벌어지던 그 나날에 전국적으로 300여편이나 되는 가사작품들이 심의에 의뢰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우수한 두편의 노래가 최종시청회에 당선되였다.
이 두편의 명곡의 가사가 다름아닌 한사람의 시인 박세영선생에 의하여 창작되였다는 사실은 후세들의 놀라움을 자아낸다. 물론 박세영선생은 해방전부터 우수하고 진보적인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여 우리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진 시인이였다.해방전 진보적인 반일문학예술단체로 조직된 《카프》의 한 성원이였던 박세영선생은 착취없고 압박없는 세상 《별나라》를 그리면서 문학으로써 일제침략자들에게 항거하며 애국을 부르짖었다.일제에 의해 조선의 문학예술운동이 무참히 유린당할 때 누구보다 몸부림친 박세영선생의 피절은 애국의 절규는 그의 대표작인 시 《산제비》에 그대로 비껴있다. 벼랑끝에서 애처롭게 날아예며 피터지게 자유를 울부짖던 《산제비》에게 그토록 소원하던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주체35(1946)년 6월 27일은 시인 박세영선생의 인생에서 두번째 생일과도 같은 영광의 날이였다.이날 그는 오매불망 그립던 절세의 애국자
조선민족의 진정한 조국을 찾아 어제날 《카프》의 《산제비》는 미제의 식민지가 된 남녘땅을 박차고 민족의 태양의 품으로 날아왔다.온 민족을 다 안은
《산에서 왜놈들과 싸우시느라고 얼마나 고생많으셨습니까?
자애깊은 시선으로 시인을 바라보시며 남조선에 조성된 정세며 그의 생활형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료해하고나신
(얼마나 위대하신 애국자, 얼마나 위대하신 인간을 민족의 령수로 모시였는가!)
첫 상봉에
《나는 자기에게 있는 힘과 정열을 다하여 펜을 쥐고 쓰러지는한이 있어도
뜻깊은 자리에서
우리 나라는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이다.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고 산들은 기세차고 장엄하며 전원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는다.우리 나라에는 지하자원, 금은보화도 무진장하다.우리 인민은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가진 인민이며 찬란한 문화를 가진 슬기로운 인민이다.
계속하시여
절세의 애국자의 열렬한 건국호소를 심장으로 받들고 찬란한 인민조국을 일떠세우기 위해 창조와 로력으로 피끓고 무한한 자유와 행복으로 나래를 활짝 편 조선인민의 군상이, 그들이 분출하는 애국의 거창한 힘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조국의 모습이 주옥같은 시어들로 그려져나갔다.어제날 《산제비》의 가냘픈 울음에 피절은 애국의 웨침을 담을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심장에서 드디여 만방에 빛을 뿌릴
새 조선의 조국송가 《빛나는 조국》의 작곡은 해방전부터 민족음악작곡가로 이름있던 리면상선생이 하였다.리면상선생의 해방전인생에도 박세영선생과 다를바 없는 설음과 비분의 곡조가 진하게 비껴있었다. 해방전 모진 가난과 천대를 피를 물고 견디여내며 고학으로 음악공부를 한 리면상선생이 작사작곡하여 내놓은 처녀작은 《들국화》였다.일제는 이 노래가 취입된 레코드가 나오자마자 《금곡령》을 내리고 레코드들을 모조리 짓밟아 박산내였다.처량한 들국화꽃잎처럼 리면상선생의 애국의 첫 노래는 무참히 짓뭉개졌다.
나라는 해방되였어도 양키의 더럽고 추악한 노래가락이 민족의 얼을 어지럽히고있는 남녘땅은 리면상선생에게 있어서 조국이 아니였다.그는 참다운 애국의 음악을 찾아
《들국화》와 같은 서글픈 노래에 가냘픈 애국의 목소리조차 숨기면서 담아야 했던 리면상선생이 새 조선의 조국송가 《빛나는 조국》에 붙인 선률은 얼마나 숭엄하고 장중하며 위엄찼던가. 《빛나는 조국》!
그것은 한편의 노래이기 전에 민족의 태양
인민의 애국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시일야방성대곡》의 처절한 곡성과 눈물겨운 국채보상운동에도, 3.1인민봉기와 의병운동의 피절은 함성에도 나라를 위함이라면 정견과 신앙, 계급과 계층, 빈부의 차이와 남녀로소를 초월하여 궐기해나서는 조선인민의 남다른 애국심이 불물처럼 끓어번지고있었다.그러나 끝끝내 나라를 되찾지 못한 그 애국이 어떻게 되여 새 조선의 건국대업에서는 그렇듯 놀라운 기적을 낳게 되였던가.
만고절세의 애국자
인민의 애국이 빛나니 인민의 조국도 빛났다.
침략자를 내쫓고 식민지통치에서 해방되였다고 하여 나라가 저절로 서는것은 아니다.해방의 만세는 함께 불렀지만 우리 조국의 남반부는 또다시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되고말았다.하지만 북반부에는 인민의 뜻, 인민의 힘으로 그 뿌리가 굳건하고 미래가 창창한 자주독립국가가 존엄높고 청신하며 기세찬 실체를 바야흐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철로동계급은 왜놈들이 무참히 파괴한 용광로를 1년 10개월만에 복구하여 쇠물을 뽑아냈고 평양인민들은 일제가 수많은 공수를 들이면서도 끝내 해내지 못한 보통강개수공사를 단 55일만에 끝냈다.《일찌기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다시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고 예언했던 외국의 한 시인의 시구절처럼
공화국창건 40돐이 되는 뜻깊은 해인 주체77(1988)년 주체음악발전에 큰 공적을 세운 리면상선생의 생일을 맞으며 리면상음악작품연주회가 진행될 때였다.만사람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무대에 오른 리면상선생은 자기의 영광의 한생을 이런 말로 총화하였다.
《인재도 때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슬기롭고 재능있는 민족입니다.하지만 조선사람의 재능이 오늘처럼 빛을 내여본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만약 박세영선생이 살아있다면
《우리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전민족이 단결된
반만년력사에 처음으로 인민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자주독립국가를 가지게 된 민족의 감격은 하늘땅을 진감하였다.인민의 이 격앙된 흥분과 환희를 한껏 터쳐주며 온 나라 강산에 우뢰처럼 메아리쳐 울린 노래가 있었다.바로 이
… 산천도 노래하라 이날의 감격을 조선은 빛나는 인민의 나라다 … 이 노래로 우리 인민은 온 세상에 대고 선언했다.어제날 만국평화회의장에서 발언권마저 잃은 민족적울분에 배를 가르며 원한의 피를 뿌려야 했던 조선사람들이, 침략자에게 나라를 강탈당하여 존엄과 이름마저 빼앗겨야 했던 식민지인민이 마침내 세계무대에 당당히 들고나갈 자기의 국호, 자기의 자주적존엄, 자기의 자랑스러운 이름을 가지였음을 조선은 목청껏 노래했다. 《세계여 들으라! 우리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이다!》 이 환희의 웨침은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를 작곡한 박한규선생자신의 심장의 웨침이기도 하였다. 태여나 한달만에 그는 부모의 등에 업히여 고국을 하직하는 불쌍한 조선사람들의 흐름에 실려 남의 나라 땅으로 이주하여갔다.그 타향에서도 조선사람들에 대한 왜놈들의 수모와 천대는 악착스럽기 그지없었다.망국민의 아들 박한규는 나라없는 민족의 설음을 안고 피눈물을 마시며 자랐다. 문학에 뜻을 품고 현해탄을 건너간 박한규선생은 우연히 사립음악학교에 들어가 음악공부에로 방향전환하게 되였다.굶주림과 고달픔은 참을수 있어도 왜놈들로부터 매일, 매 시각 당하는 민족적멸시와 모욕감은 참을수 없었다. 하루는 교무부장직에 있던 왜놈이 《왜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가?》고 박한규에게 따지고들었다.조선사람의 이름 석자마저 빼앗자고 달려든 지독한 왜놈을 향해 그는 분연히 소리쳤다. 《나는 조선의 박한규다!》 그 대답 한마디때문에 박한규는 학교에서 쫓겨나고말았다.음악을 포기할지언정 조선사람의 마지막얼만은 저버리고싶지 않았던것이다.애국청년 박한규의 음악공부는 이렇게 끝장나고말았다.
민족의 영웅
중앙교향악단(당시)의 바이올린연주가가 된 그는 음악으로 건국대업에 이바지하는 새 조선의 당당한 음악가 박한규의 이름을 건국사에 새기기 시작하였다.
《백두산천지에서 제주도끝까지》라는 구절로 시작되여 《해와 별 빛나라 조국의 앞길에》라는 장중한 후렴구로 끝나는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의 가사에는 전민족의 한결같은 뜻과 의지에 의하여 이룩된 우리 공화국의 건국대업의 철저한 인민적성격이 마치도 국기를 들고 세계를 향해 행진해나가는 조선인민의 씩씩한 보무처럼 맥박치고있다.이렇듯 훌륭한 가사를 지어낸 사람은 작가 김우철선생이다.
해방전 《프로레타리아아동문학연구회》의 한 성원으로 활동하면서 문학창작활동을 벌리던 그는 일제경찰에게 붙잡혀 감옥생활까지 하고 나중에는 병을 만나 페인신세가 되였다.새 조선의 문예인들을 건국의 대업에로 부르시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평안북도위원회 위원장, 《문화전선》 편집부장 등의 직책을 지니고 활동하면서 김우철선생은
작가 김우철선생이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의 창작을 새 조선이 안겨준 영광스러운 첫 임무로 스스로 받아들인것은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로 김우철선생은 만고절세의 위인을 높이 모시여 온 세상에 찬연히 빛을 뿌릴 우리 공화국의 찬란한 래일을 힘차게 구가하였다.이것은 새 조선의 품에서 생명을 찾고 작가의 영광도 찾은 공화국공민 김우철이 건국세대의 이름으로 력사와 세계앞에 고한 공화국탄생의 선언문과도 같았다. 력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가라고도 불리워지고있는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는 백두산천지에서부터 제주도끝까지 삼천만 인민이 새 기발 높이 들고 떨쳐나섰던 건국대업이 《우리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라는 인민의 긍지높은 목소리로 결속된 총화의 선언이였다.그것은 또한 해와 별 빛나는 조선의 휘황찬란한 미래에 대한 인민의 절대적인 확신의 선언이였다.
지경넘어, 바다건너 우렁차게 울려오는 이 노래를 합창하며 해외동포들도 자신들이 다름아닌
공화국창건을 위한 건국대업은 민족의 숙망이였던
이 이야기는 결코 몇편의 음악작품이나 몇사람의 문예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이것은 후손만대가 영원히 잊지 말고 심장에 새겨야 할 공화국의 건국사에 대한 이야기,
영광스러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 75돐을 맞는 뜻깊은 올해에 성대하게 거행된 전승 70돐 경축행사에는 공화국의 부강번영에 기여한 렬사들의 후손들도 초청되였다.그들중에는
당과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와 《빛나는 조국》,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는 영원불멸의 생명력으로 어제도 오늘도 우리 인민의 애국투쟁을 힘차게 떠밀어주고있다.
조선이 낳은 또 한분의 절세의 애국자이신
본사기자 리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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