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2(2023)년 11월 17일 로동신문

 

위협공갈로 날조해낸 불법비법의 《을사5조약》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본제국주의의 력사는 조선인민에게 커다란 불행과 재난만을 가져다준 죄악의 력사로 얼룩져있습니다.》

《시일야방성대곡》과 더불어 새겨진 수난의 그날을 우리 인민은 결코 잊지 않는다. 일제가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을사5조약》을 날조한 1905년 11월 17일을. 그리고 철저한 결산의 의지를 더욱 가다듬는다. 한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도 조약 아닌 이 《조약》의 《적법성》을 떠들며 조선에 대한 날강도적인 식민지지배의 법적책임을 회피하고 과거청산을 거부하려고 모지름을 쓰고있는 일본에 대해.

우리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아물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을사5조약》은 아무러한 법적효력도 가지지 못한 비법문서, 협잡문서이다.

국제조약은 본질에 있어서 주권국가들사이의 자원적인 의사합의이다. 이로부터 근대시기의 국제법인 관습국제법과 현대국제법인 조약법에 관한 윈조약에서는 다같이 국가대표자에 대한 강요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이라고 규정하고있다.

《을사5조약》은 국가대표자인 고종황제를 강박하고 조선봉건왕조의 대신들을 상대로 공포와 위협을 조장하는 속에서 강제로 날조되였다.

일제는 우리 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 위해 이미전에 작성해놓은 《을사5조약》원안을 고종황제와 정부대신들에게 무조건 접수할것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고종황제는 《이 조약을 허락하면 곧 나라가 망하는것과 같은것이니 짐은 차라리 종묘사직에 순국할지언정 인허치 못하리라.》라고 하면서 완강히 거부해나섰다.

그러자 일제는 군사적힘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무력으로 황궁안팎을 겹겹이 포위한 침략자들은 궁앞에서 군사훈련까지 벌려놓았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11월 17일 황궁에서 열린 《조약》문제에 관한 어전회의에서 조선봉건정부의 대신들은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협상이 결렬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받은 이또 히로부미는 궁궐로 들어가 정부대신들을 강제로 방에 모여놓고 《조약》에 찬성할것을 강박하였다.

여러 대신이 반대의사를 표명하자 이또는 그들을 로골적으로 위협, 강박하였으며 지어 옹고집을 부리면 죽여버리라고 졸개들에게 고아댔다.

이런 강압적방법으로 《조약》이 성립되였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해버린 일제는 《합법성》의 외피를 씌우기 위해 외부대신의 인장을 훔쳐내여 제멋대로 찍는 비렬한짓도 서슴지 않았다.

1935년의 《하바드보고서》에는 《을사5조약》이 불법으로 규정되였으며 《일본군대를 동원한 강압적체결》이 그 근거로 제시되였다. 1963년의 제15차 유엔국제법위원회에 제출된 《월더크의 보고》에서도 《을사5조약》을 《강박이나 위협을 가한 행위의 결과》로 규정하고 《절대적무효》라고 지적하였다.

이런 비법문서를 내들고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고 40여년간 우리 인민에게 식민지노예의 비참한 운명을 강요하였다. 일제가 식민지통치기간 우리 인민에게 끼친 인적, 물적, 정신적피해는 실로 막대한것이며 그것은 그 무엇으로써도 보상할수 없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까지도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는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과거 조선에서 감행한 저들의 극악한 범죄행위들에 대해 인정도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고있다.

오히려 력사외곡책동에 광분하고있다. 지난 8월 30일 일본내각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간또대진재직후에 벌어진 조선인학살과 관련하여 《조사한데 의하면 정부내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할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횡설수설하였다. 범죄자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것은 개준할 마음이 없고 그것을 되풀이하려는 속심을 가지고있기때문이다.

일본이 과거의 침략범죄를 부정하기 위해 안깐힘을 쓰며 반공화국적대시정책실행에 광분할수록 쌓이고쌓인 원한의 대가를 기어이 받아내려는 우리 인민의 복수심은 더욱 굳세여지고있다.

본사기자 김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