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3(2024)년 3월 27일 로동신문
수령결사옹위의 항로만을 날은 견실한 혁명전사 새 조선의 첫 비행사이며 전쟁로병이였던
우리 혁명의 성스러운 력사에는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신념으로 간직하고 수령의 사상과 위업을 받드는 길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친 유명무명의 혁명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기록되여있다. 그 갈피마다에 진하게 그리고 뚜렷이 새겨져있는것이 있으니 그것은 수령결사옹위야말로 혁명전사의 가장 숭고한 본분이고 더없이 신성한 의무이라는 고귀한 진리이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전화의 그날로부터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건설의 나날에 변함없이 당과 수령을 충직하게 받들어온 전쟁로병들의 숭고한 정신과 그들이 조국앞에 세운 빛나는 위훈은 그 무엇에도 비길수없이 소중하고 귀중한것입니다.》 수령결사옹위는 수령에 대한 충실성의 최고표현이며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수호하고 빛내이기 위한 기본담보이다. 수령결사옹위! 이는 혁명전사들의 제일생명이며 이를 떠난 혁명가의 삶이란 있을수 없다는것을 선렬들은 우리 후대들에게 피로써 물려주었다. 새 조선의 첫 비행사이며 전쟁로병이였던 안성득동지가 수령결사옹위의 길에서 발휘한 영웅적위훈과 그의 값높은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이에 대해 다시금 깊이 새겨안게 된다.
투철한 신념, 삶의 좌우명
1956년은 우리 당력사에서 시련의 해였다. 전후 재더미를 헤치고 3개년인민경제계획을 완수한 우리 인민에게는 새로운 5개년인민경제계획을 수행하여야 할 어렵고도 방대한 과업이 나서고있었다.그런데 나라에는 자재도 자금도 부족하였고 인민생활도 아직 어려운 형편에 있었다.게다가 미제와 그 앞잡이들이 새 전쟁의 불을 지르려고 미쳐날뛰였다. 더우기 국제공산주의운동안에 대두한 현대수정주의자들은 저들의 《로선》을 우리에게 공공연히 내리먹이려고 책동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혁명이 어렵다어렵다 해도 오늘처럼 이렇게 어려울줄을 몰랐다고 말씀하신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혁명대오안에 숨어있던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도 때를 기다린듯 우리 당에 도전하여나섰다. 수정주의자들과 결탁한 놈들은 당과 정부를 어째볼 망상밑에 저들의 심복들로 《내각》명단까지 짜놓고는 그것을 실현하려고 비렬한 음모를 꾸미고있었다. 종파적야욕을 실현하려는 이자들의 음흉한 기도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해 6월과 7월사이에 쏘련과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을 방문하시는 기간에 더욱 로골화되였다. 당시 민용항공국의 비행부국장으로 사업하던 안성득동지는 외국방문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오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비행기의 비행지휘를 맡아할데 대한 중임을 받아안게 되였다. 주체45(1956)년 7월의 그날은 맑게 개여있었다. 문수리비행장(당시)에 있는 비행지휘소를 차지한 안성득동지의 가슴은 누를길 없는 흥분으로 높뛰였다. 그것은 머나먼 외국방문을 끝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오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최대로 안전하게, 가장 편안하게 모셔야 한다는 자각으로부터 오는것이였다. 그는 비행지휘를 함께 책임진 일군에게 자기가 고심하여 세운 다음과 같은 결심을 보고하였다. 비행기의 도착시간을 최대로 단축시켰으면 한다는것, 그를 위해 환영군중에게 답례하는 비행기의 시내상공비행을 중지하고 국경을 통과한 후 비행장으로 접근시키면서 직접 착륙했으면 한다는 내용의 비행지휘방안이였다. 비행지휘를 맡은 안성득동지의 높은 충성심과 고도의 책임감이 반영된 방안은 심중히 토의되고 적극적인 찬동을 받았다. 하지만 그 시각 안성득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비행기를 맞이하게 될 문수리비행장에 얼마나 무서운 음모의 초점이 모아지고있는가를 꿈에도 알수 없었다. 당과 국가의 일부 요직을 차지하고있던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흉심을 품고 비행기도착시간을 주시하고있었다.그러나 놈들은 오산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미 비범한 예지와 예리한 통찰력으로 천추에 용납 못할 역적무리의 흉계를 낱낱이 꿰뚫어보고계시였다. 즉시 비행기를 처음 계획했던 비행장이 아니라 미림비행장에 착륙시킬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가 안성득동지에게 무전으로 하달되였다. 지체없이 문수리비행장 비행지휘소를 철저히 봉쇄한 그는 이 사실을 비행장경비호위사업을 책임지고 나와있던 항일혁명투사 오백룡동지에게 보고하였다. 그가 비행지휘소를 나서려고 할 때 뜻밖에도 당시 공군지휘부의 요직에 있던자가 내무성의 책임적인 위치에 있는 놈을 앞세우고 지휘소로 다가왔다.이것은 엄연히 규정위반이였고 예상치 못했던 정황이였다. 안성득동지는 단호히 놈들의 앞을 담벽처럼 막아나섰다. 《여기에는 누구도 들어올수 없습니다.》 《비행기가 어데쯤 왔는지 알아보려고 그러오.》 《밖에서 기다리십시오.착륙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내무성에 있는 놈이 도끼눈을 하고 덤벼들었다. 《그래 나도 못믿겠다는건가?》 당장에 무슨 벼락이라도 칠듯 눈을 부라리던 그놈은 이어 악의에 찬 목소리로 지껄였다. 《내 명령을 거역하면 총살도 면치 못한다는걸 알겠지?》 순간 안성득동지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이였다.그는 불이 펄펄 이는 눈길로 놈들을 쏘아보며 이렇게 웨쳤다. 총살을 하겠으면 비행지휘가 끝난 다음에 하라. 비수같이 날아와박히는 안성득동지의 말에 놈들은 흠칫 놀랐다.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밖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투철한 신념을 지닌 혁명전사가 터친 불같은 선언이였다. 이때 오백룡동지가 달려와 놈들을 밀어내며 누구든 호위안전사업에 훼방을 놀면 즉석에서 처단하겠다고 추상같이 소리쳤다. 그제서야 놈들은 풀이 죽어가지고 비실비실 뒤걸음질하였다.그러는 사이에 비행기는 어느덧 안주상공에 이르렀다. 분초를 다투던 그때 한달음에 미림비행장으로 달려간 안성득동지는 지휘소를 차지하고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하여 비행기의 안전한 착륙에 전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는 순간 그의 온몸은 땀에 푹 젖어있었지만 얼굴에는 이름할수 없는 희열이 한껏 어려있었다. 안성득동지는 그후 앙심을 품고 발악하는 종파잔당들의 갖은 박해속에서도 추호의 동요를 몰랐으며 이자들의 책동으로 비행기의 조종간을 일시 놓게 되였을 때에도 위대한 수령님만을 굳게 믿고 따르는 철석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당의 은정속에 다시 비행기의 조종간을 잡게 된 안성득동지가 보답의 일념 안고 비행장에 나가살다싶이 하던 어느해 초봄이였다. 감기에 걸려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훈련에 열중하던 그에게로 불쑥 항일혁명투사 오백룡동지가 찾아왔다. 안성득동지에게 나쁜 놈들의 죄행과 그가 당한 모해에 대해 구체적으로 까밝혀준 투사는 얼마전 그러면서 투사는 어서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오러 가자고, 그날의 사연도 다 보고드리자고 하며 안성득동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안성득동지는 눈물을 흘리며 못가겠다고, 내가 왜 마스크를 끼고있는지 짐작되지 않는가고, 지금은 절대로 위대한 수령님앞에 나설수 없다고 목메인 소리로 말하였다. 오백룡동지는 그러한 그를 와락 부둥켜안으며 네가 독감에 걸렸구나, 너는 정말 둘도 없는 진국이구나, 진국이야라고 하며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안녕과 건강을 보장해드리는것은 이 땅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첫째가는 도리인데 나도 달리야 살수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안성득동지의 한생에 관통되여있은 삶의 좌우명이였다.
보답의 한길에는 불가능이란 없다
주체38(1949)년 12월 18일은 안성득동지가 한생토록 잊지 못할 영광의 날이였다. 평양학원 항공과 비행사, 기술근무원반 학생들의 졸업식이 진행된 그날 안성득동지는 추격기비행사들을 대표하여 위대한 수령님께 시범비행을 보여드리는 특전을 지니게 되였다. 몸소 졸업식에 참석하시여 안성득동지에게 조선청년의 기개를 마음껏 떨치라고 고무해주신 위대한 안성득동지가 비행을 끝마치고 착륙했을 때 비행장은 텅 비여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습격기들의 폭격, 사격시범비행을 보시기 위하여 폭격장지휘소로 가시였던것이다. 이때 한대의 승용차가 안성득동지의 앞에 와 멎어서더니 그를 태우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기운차게 보고를 올리는 그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하다고, 잘했다고 하시며 조국의 하늘을 동무들에게 맡긴다는 크나큰 믿음의 말씀을 주시였다. 이윽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행한 일군들에게 사진을 찍자고 하시며 사진촬영대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성득동지는 자기가 받아안은 사랑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미처 다 알수가 없었다. 그가 이 장소에 오기 전에 있은 일이였다. 한 일군이 위대한 수령님께 사진촬영준비가 다되였다고 말씀올리자 수령님께서는 이제 비행한 추격기비행사가 왔는가고, 그 동무를 빼놓고 어떻게 사진을 찍겠는가고, 그 동무가 올 때까지 좀 기다리자고 하시며 승용차까지 보내주시였던것이다. 영광의 기념사진촬영장에 서게 된 안성득동지는 이 세상의 행복은 혼자서 다 독차지한것만 같아 도무지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우리 수령님께서 새 조선의 첫 비행사들과 남기신 력사적인 화폭에는 이런 감동깊은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가렬처절한 전화의 시기 안성득동지는 21살의 젊은 나이에 제56추격기련대 대대장이 되여 조국해방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는 주체39(1950)년 6월 26일 리문순비행사와 함께 의정부와 춘천쪽으로 가는 철도교차점상공에서 적군용렬차를 습격파괴하였으며 다음날에는 영등포비행장에 폭탄을 퍼부어 수많은 적비행기와 군수기재들을 날려보냈다. 그리고 새 조선의 첫 비행사들이 날강도 미제공중비적들에게 단단히 본때를 보여준 6월 28일에는 적기 1대를 격추하였으며 후날의 공중전에서 또다시 적기를 쏴떨구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안겨주신 믿음과 사랑을 불사의 힘으로 간직하였기에 그는 어느한 전투에서 비행기가 십여발의 적기총탄에 맞아 천개가 날아나고 몸에 파편이 박혔을 때에도 굴함없이 싸웠으며 평양하늘을 지키던 나날에는 갈가마귀떼처럼 날아든 적기들을 주저없이 맞받아나갔다. 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 자라난 새 조선의 비행사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였다. 가렬처절한 전투가 계속되던 어느날 안성득동지는 새로운 임무를 받아안게 되였다.전쟁이 날로 격렬해짐에 따라 시급히 비행사후비를 키워낼데 대한 전투명령이였다. 그는 비행사를 양성하는 사업이 곧 전투라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간곡한 교시를 깊이 새기고 지체없이 비행사속성양성기지로 떠났다. 그러나 양성기지에 펼쳐진 현실은 예상밖이였다.비행장활주로에는 풀이 무성하고 숙소도 없었으며 훈련보장기재도 한심하여 도무지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그의 뇌리에는 한 일군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가 되새겨졌다. 며칠전 비행사후비양성을 추격기련대의 3대대장에게 맡기려 한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각나오, 졸업식날 나에게 시범비행을 보여준 그 재간둥이 말이지, 그 동무는 꼭 해낼게요, 그 재간둥이가 앞선 나라의 비행사양성관례를 깨뜨리고 불과 몇달만에 전투비행사가 되여 나를 기쁘게 하여준 우리 당의 매였지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는것이였다. (이 한몸이 열쪼각, 백쪼각이 난대도 최고사령관동지의 하늘같은 믿음에 결사의 실천으로 보답하리라.) 이런 비상한 각오로 충만된 안성득동지는 밤을 새워가며 비행훈련계획을 작성하는것과 동시에 전시환경에 맞는 강도높은 비행훈련일과표를 작성하였다.그리고 연유보급차를 대신하여 20여개의 물초롱을 구해다 보급기재를 준비하고 착륙훈련에 필요한 표식끈은 백포를 가지고 리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시작을 뗀 사업이였으나 그 과정은 실로 간단치 않았다. 훈련생들을 맡아 하루에도 몇차례씩이나 하늘에 날아올라 비행훈련을 지도하여야 하고 조종술교육체계의 기존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초보련습기의 훈련이 끝난 다음 중간고등련습기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전투련습기에로 뛰여넘는것으로 하여 안성득동지가 받는 정신육체적중압은 말할수없이 컸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롭고 참기 어려운것은 사대주의사상에 쩌들대로 쩌든 일부 나쁜 놈들이 직권을 내흔들며 걸음마다 헐뜯고 위협하여나서는것이였다. 이자들은 큰 나라에서도 비행사 한명을 키우자면 몇년이 걸려야 하는데 이것은 모험이고 개인영웅주의라고, 석달동안에 아무리 날고뛰여도 비행사는커녕 자동차운전사도 키울수 없다고 시비해나섰으며 만약 비행사들이 전투를 제대로 못하면 군사재판에 회부될것이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그때마다 안성득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모든것을 지켜보고계신다는 든든한 배심을 안고 우리에게는 수령님께서 배워주신 우리 식이 있다, 나는 수령님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것밖에는 모른다고 하면서 훈련속도를 계속 높여나갔다. 드디여 하루를 천날맞잡이로 피타게 훈련한 양성생들이 66일만에 쇠소리나는 비행사로 자라나게 되였다. 비행사양성기간 66일! 이것은 아직 세계공군사가 알지 못하는 기적이였다. 어엿하게 자라난 비행사들을 전선으로 떠나보내던 시각 최고사령부 하늘가를 숭엄히 우러르는 안성득동지의 눈가에는 뜨거운것이 고여올랐다. 그것은 보답의 한길에서 불가능을 모르는 혁명전사의 억센 신념과 의지의 분출이였다. 그가 양성한 비행사들중에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공중우세》를 뽐내던 미제공중비적들을 전률케 한 백기락, 안홍준, 강정덕영웅들도 있었다. 그후 안성득동지는 또다시 짧은 기간에 우수한 비행사들을 양성하여 전선으로 떠나보내였다.
마음은 언제나 충성의 항로에
수령을 받드는 충성의 항로에서 착륙이란 있을수 없다는것이 안성득동지가 지닌 인생관이였다.그는 전쟁로병으로서 예순이 넘을 때까지 비행사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성실히 복무하였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정든 비행기의 조종간을 놓게 되였을 때 그는 마치도 제살붙이를 잃은것만 같아 허전한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러나 안성득동지는 새 조선의 첫 비행사가 되여 조국의 푸른 하늘을 날던 그날에 자신을 세워보며 마음을 다잡군 하였다. 온 나라에 준전시상태가 선포되였던 주체82(1993)년 3월 자기의 복대를 열렬히 호소하는 한 전쟁로병이 있었다.그가 다름아닌 안성득동지였다. 떼질하다싶이 해서 탄원자명부에 이름을 등록하고 돌아온 그날부터 안성득동지는 비행기에 대한 복습과 조종술모방훈련을 직심스레 하였다.저녁이면 또 저녁대로 야간비행을 위한 계기보기와 자세를 바로잡는 동작을 익히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 적들이 덤벼들면 돌아올 연유대신 폭탄을 더 적재하고 맞받아나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비행사답게 영용하게 싸우리라는것이 안성득동지의 불같은 신념이였다. 언제나 충성의 항로에 마음을 얹고 사는 그였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체적인 공군무력건설사에 쌓으신 불멸의 업적을 고증하는 사업에 자신의 정력을 기울였으며 여러편의 회상실기도 집필하였다.또한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희생된 전우들의 전투위훈을 하나라도 더 확증하기 위해 애썼다. 지금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학술연구부에 보관되여있는 로병의 두툼한 고증자료에 의하여 새 조선의 첫 비행사들로부터 전쟁시기 당과 수령을 위하여 충직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비행사들의 위훈이 후대들에게 보다 정확히 알려지게 되였다. 안성득동지는 이것을 더없는 자랑으로, 긍지로 여겼다. 언제인가 대학에 다니는 손자가 안성득동지에게 이렇게 물은적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전쟁로병으로서 큰 공을 세우고도 왜 영웅이 못되였는가고. 그때 안성득동지는 난 그저 전승이라는 거목에 뿌리가 되였다면 그이상 더 바랄것이 없다고 흔연히 말하였다. 이것은 한생토록 당에 충실해온 한 전쟁로병의 진정이였다. 세차례의 전국로병대회에 이어 제4차 전국로병대회에도 참가한 안성득동지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를 모신 주석단에 20대 비행지휘관시절의 군복차림으로 앉게 되였다. 무한한 감격에 휩싸여있던 그 시각,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우리의 전쟁로병들은 청춘도 생명도 다 바쳐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을 결사수호한 민족의 장한 영웅들이며 진정한 애국자들이라는 최상최대의 평가를 안겨주실 때 그는 쏟아져내리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과연 이 세상 그 어디에 우리 전승세대들처럼 이렇듯 영광의 최절정에 오른 사람들이 있었던가. 하많은 생각이 갈마들수록 안성득동지는 전쟁로병으로서 생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였다. 그는 전쟁로병인 안해와 함께 새세대들에게 전승세대들이 간직하고 산 충실성을 깊이 심어주기 위해 혼심을 다 바쳤다. 그는 생의 마지막순간에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 조국의 운명이시고 미래이신 경애하는 원수님을 일편단심 충성다해 받드는 길에 후손만대의 행복과 번영이 있다는것을 꼭 명심하라고. 이것이 한생토록 변함없이 충성의 항로만을 줄기차게 이어온 안성득동지가 남긴 간곡한 당부였다. 그의 값높은 생은 우리 새세대들에게 수령결사옹위에 혁명가의 가장 빛나는 삶이 있다는 불변의 진리를 깊이 새겨주고있다. 그렇다. 수령결사옹위는 혁명전사들에게 있어서 지상의 의무이며 이길에 우리의 승리도, 찬란한 미래도 있다. 조국은 곧 수령의 품이라는 고귀한 철리를 온넋으로 안고 사는 이 나라 천만아들딸들은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수령결사옹위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꿋꿋이 이어나갈것이다. 본사기자 김일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