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3(2024)년 6월 12일 로동신문
죄악의 력사는 절대로 덮어버릴수 없다
얼마전 일본의 도꾜에서 간또대지진때 무참히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추도문제와 관련한 모임이 있었다. 여기에서 일본의 한 작가는 《추도비는 희생자들과 마주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는 출발점으로 된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도꾜도 스미다구에는 간또대학살희생자들을 위한 추도비가 있다.작가의 말은 간또대학살만행을 정당화하는 주장이 아직도 울려나오고 추도비를 철거시키려는 우익단체들의 망동이 우심해지고있는것을 념두에 둔것이다. 인류력사에는 미국의 인디안살륙만행, 파쑈도이췰란드의 인종멸살행위 등 몸서리치는 만행들이 기록되여있다.하지만 간또대지진때 일제가 감행한 조선인대학살만행은 그 잔혹성에 있어서 가장 야수적인 민족배타주의적참살행위였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인 1923년 9월 1일 간또지역에서 리히터척도로 7.9의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10여개 도시들과 마을들이 불바다로 되고 숱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파괴적인 지진의 후과로 한지에 나앉은 주민들속에서 시급한 구제대책을 취하지 않는데 대한 항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바빠맞은 일본당국은 민심의 분노의 화살을 재일조선인들에게 돌릴 음모를 꾸미였다. 《조선인이 방화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친다.》, 《조선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집단방화하고있다.》라는 거짓여론을 내돌리고는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였다.이에 따라 군대, 헌병, 경찰 등 무장집단과 《자경단》, 《청년단》을 비롯한 우익깡패들이 총동원되였다.그리하여 2만 3 000여명의 무고한 조선사람들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무참히 학살당하였다.이것이 간또대학살만행의 진상이다. 간또조선인대학살, 그것은 일본반동들의 체질적인 민족배타주의와 사무라이고유의 잔인성과 야만성이 결합되여 빚어낸 대류혈참극이였다. 그에 대해 속죄의 감정을 품고있는 일본의 일부 량심적인 사람들에 의해 도꾜한복판에 추도비가 세워졌다.하지만 일본반동들은 령혼들을 위로하는 그 소박한 추도비마저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며 그것을 들어내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여왔다.지난해만 놓고보아도 간또대학살만행 100년이 되는것과 관련하여 조선인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련이어 진행되자 우익깡패들은 《거짓력사를 후세에 남길수 없다.끊어야 한다.》라고 고아대며 란동을 부리였다. 당국의 태도는 더욱 파렴치하였다. 대학살만행과 관련한 국가적책임문제가 물망에 오르자 그를 모면하려고 실로 뻔뻔스럽게 놀아댔다. 집권자는 참의원 예산위원회회의에서 간또대지진당시 조선인학살문제에 대한 언급을 한사코 회피하였고 내각관방장관이라는자는 《사실관계를 파악할수 있는 기록을 찾을수 없다.》, 《정부의 견해는 재판기록이 없어 현시점에서 파악하려고 하여도 곤난하다는것이다.》라고 뇌까렸다. 외상 역시 《사실관계를 파악할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립장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력사의 진실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일본의 《도꾜신붕》은 《대진재와 학살, 현시대를 위해 교훈으로 삼으라》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선인학살은 결코 허구가 아니라고 하면서 민족배타주의적인 류언비어를 구실로 일본각지에서 관헌들과 《자경단》이 조선인들을 대대적으로 살해한 사실을 까밝혔다.그러면서 《무엇이 명백한 사실인가 하는것은 력사가들이 풀어야 할 문제》라고 뇌까리면서 과거죄악을 회피, 부정하려드는 당국자들을 비난하였다. 죄를 지었으면 그를 인정하고 사죄하는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일본은 보는바와 같이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조선인학살만행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죄배상은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고있다.피로 얼룩진 과거사를 지워버리지 못해 모지름을 쓰고있는 그자체가 침략의 력사를 답습하겠다는것이다. 일본반동들은 그 어떤 술책으로써도 력사의 한 페지에, 조선인민의 가슴속에 피맺힌 원한으로 남아있는 천인공노할 대학살범죄를 절대로 덮어버릴수 없다. 본사기자 박진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