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3(2024)년 6월 23일 로동신문
미제는 조선전쟁의 도발자(3) 침략의 서막-전쟁전의 작은 전쟁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승냥이가 양으로 변할수 없는것처럼 제국주의의 침략적, 략탈적본성은 절대로 변할수 없습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우리 인민은 조선전쟁의 도발자인 미제침략자들에 대한 치솟는 분노와 적개심을 안고 조국땅에 전쟁의 불구름이 몰아치던 그 준엄한 나날을 돌이켜본다. 침략전쟁의 피바다속에서 배를 불리고 살찐 미제는 조선을 강점하며 세계제패를 실현하려는 야망밑에 1950년 6월 25일 우리 나라에 대한 강도적인 침략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미제는 이미 3년전부터 그 서막으로 되는 작은 전쟁들을 수없이 일으켰다.
3년전부터 감행된 침략적인 도발책동
력사가들은 조선에서 전쟁이 시작된것은 19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사실은 훨씬 그전이였다고 말하고있다. 실지로 적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3년전인 1947년부터 계속 우리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놈들은 무력침공을 통하여 우리의 중요지역들을 강점하려는 목적을 추구하였다.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놈들은 대규모의 공격작전을 계속 벌렸는데 여기에 방대한 무력을 투입하였다. 그리하여 송악산, 옹진반도 등 많은 곳에서 전투가 빈번히 벌어졌으며 우리 인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략탈하는 적들의 만행이 도처에서 벌어지게 되였다. 1947년에 적들은 옹진반도의 벽성일대와 연백지구에서 무고한 어린이들과 늙은이들을 학살하였으며 인민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재산을 략탈하는 강도행위를 감행하였다. 특히 송악산은 적들이 세운 우리에 대한 침공계획에서 주타격방향의 시작점에 있는 고지였다.때문에 적들은 대병력으로 송악산을 점령함으로써 전면전쟁개시를 위한 유리한 공격출발진지를 확보하며 주타격방향의 전략적인 도로들을 장악하려고 하였던것이다. 1948년에 들어와서는 우리에 대한 무력침공을 더욱 적극화하였으며 고산봉일대 등에 대한 무력침공을 계속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이 일대에서는 매일과 같이 적아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놈들은 이러한 대규모적인 공격을 3년동안에 걸쳐 계속 반복감행하였다.이러한 반복공격은 장차 전면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려는 침략기도에서 나온것이였다.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는 미제와 그 주구들이 전쟁을 도발한것은 19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훨씬 그 이전이였다는것을 보여주는 증거물들이 수많이 전시되여있다. 우리 공화국에 대한 적들의 도발적인 무장침습을 규탄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성 보도들, 무장도발에로 괴뢰군을 내모는 미제침략군 군사고문놈의 몰골을 보여주는 사진, 우리 공화국지역에 침입했다가 포로된 적들의 몰골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전시되여있다. 또한 조선인민경비대 전투원들이 우리 공화국을 침공한 적들을 격퇴소멸하고 로획한 무기의 일부가 전시되여있다. 군복과 철갑모, 보총, 탄띠와 마사진 포신들, 그것은 전쟁도발자들의 죄행을 만천하에 고발하는 유력한 증거물이다.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는 적들의 군사적도발책동을 걸음마다 짓부시고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한 조선인민경비대 군인들의 투쟁을 보여주는 자료들도 전시되여있다. 《고산봉전투 총화보고》를 비롯한 전시된 자료들은 오늘도 원쑤들의 전쟁도발음모를 단죄하고있다.
전면전쟁을 위한 예비전쟁, 시험전쟁
1947년부터 감행된 적들의 무장도발은 단순한 무장충돌이나 소규모적인 전투가 아니였다.그것은 침입한 지역의 범위로 보나 투입된 병력으로 보나 완전한 전쟁을 방불케 하였으며 이것은 전면전쟁을 위한 예비전쟁, 시험전쟁이였다. 미제는 침략전쟁도발준비에 광분하면서 우리에 대한 군사정찰과 략탈, 살해, 랍치, 방화 등 악랄한 도발책동을 일삼았다. 1947년에 놈들은 450여차에 달하는 무장도발을 감행하였는데 그것은 주로 대상물을 《점령》하거나 《소멸》하기 위한 전투행동이였다. 적들은 우리의 중요고지들을 점령하기 위한 공격을 감행하였는데 여기에 많은 력량을 투입하였다. 적들은 1947년 8월 3일 중요간선도로의 분기점에 위치한 한 고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9월 22일 적들은 고산봉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으며 11월 25일 미제침략군의 지휘밑에 100여명의 적들이 우리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다. 1948년에 들어와서 적들의 공격행동은 대규모로 확대되였다. 1947년에 비해 적들의 침입건수는 2배이상이나 되며 중요지점에 대한 공격은 1.4배나 된다. 전투에 참가한 적들의 력량도 대대이상으로 늘어났으며 개별적공격대상물에 대한 반복공격회수도 훨씬 증대되였다. 뿐만아니라 적들의 공격은 일부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넓은 지역에서 감행되였다. 서부지역에서 적들은 옹진-태탄, 옹진-벽성, 배천-평천사이의 도로들을 지배하는 고지들을 점령하기 위한 무장공격을 감행하였다. 중부지역에서도 적들은 끊임없는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는데 중요도로들을 지배하는 고지들을 점령함으로써 앞으로 평양과 원산방향으로 공격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동부지역에서도 장차 원산방향으로 공격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수 있는 중요지점들을 점령하기 위한 적들의 공격이 련일 벌어졌다. 미제는 1949년에 들어와 무력침공을 전면전쟁접경에로 더욱 확대하였다. 우리 공화국에 대한 무장침습에 련대, 사단규모의 무력과 《특수부대》까지 동원되였으며 모든 군종과 병종이 거의다 투입되였다.침입한 지역범위도 확대되고 회수도 훨씬 늘어났다. 적들은 1949년에 태탄지구와 은파산, 송악산, 강원도의 고산봉에 대한 침범사건들을 도발하였는데 이 사건들은 그 규모에 있어서나 전투의 치렬성에 있어서 하나의 전쟁이였다. 적들의 이러한 무장도발은 미제의 직접적지휘밑에 괴뢰군의 《림전태세》의 검증과 《실전능력》을 배양하기 위하여 감행된 시험전쟁이였으며 전술적거점을 확보하고 그를 지탱점으로 하여 전면적인 무력침공으로 넘어가기 위한 전쟁도발책동이였다. 이에 대해 적들자신이 인정하였다. 미군사고문단 단장은 1949년 10월 괴뢰륙군본부에서 있은 사단장회의에서 《… 무수한 공격이 나의 결정에 의하여 시작된것만은 사실이다.그러나 앞으로는 더 많을것이다.》라고 하였다. 1949년 7월 미군사고문단 단장은 괴뢰군참모총장과 괴뢰군 1사단장에게 《이번 단행할 침공은 멀지 않아 일으킬 내전을 위한 좋은 시험대이며… 적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산지식을 얻을수 있는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제는 인민경비대원들의 드센 반격으로 괴뢰군의 《림전태세》의 검증과 《실전능력》의 배양, 전술적거점의 확보 등과 같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적들이 1947년부터 감행한 수많은 무장도발은 침략전쟁준비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시험전쟁이며 예비전쟁이였다.그것은 전쟁의 개시를 의미하였으며 곧 전면전쟁으로 넘어가기 위한 전주곡이였다. 본사기자 안성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