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0일《로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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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신념에 인생의 영광도, 값높은 영생도 있다 항일혁명투사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동지들의
우리 인민들이 혁명의 철리를 새겨안는 신성한 교정인 대성산혁명렬사릉에는 1945년 3월 10일이라는 희생날자가 꼭같은 네명의 투사들의 반신상이 나란히 서있다. 오늘은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동지들이 조국해방을 불과 다섯달 앞두고 한날한시에 악명높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희생된지 80돐이 되는 날이다.네명의 투사들은 태여난 날과 살아온 고장도, 성격과 경력, 직무도 서로 달랐다.하지만 한가지의 공통점이 그들을 성스러운 조선혁명의 력사에 하나의 꼭같은 초상으로 다시 태여나게 해주었다. 동서고금에 다시 없는 혁명과 인간, 혁명가와 인생에 대한 네명의 투사들이 가르쳐주는 신념의 메아리, 진정 그것은 조선혁명이 바야흐로 새로운 높은 단계에 들어선 오늘의 중대한 시기에 우리 세대 누구나 다시금 똑똑히 새기고 반드시 실천에 옮겨야 할 혁명의 진리, 인생의 철리이다.
《나는
한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든, 열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든, 천고의 밀림속에서 원쑤들과 싸우던 이야기를 하든, 철창속에서 모진 악형을 이겨내던 이야기를 하든 항일혁명투사들의 투쟁과정은 어느것이나 신념에 대한 이야기로 관통되여있다. 그것은 혁명이자 곧 신념이며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의 전 로정이 한치한치 피로써 헤쳐나가야 하는 길, 투철한 혁명신념이 없이는 절대로 끝까지 갈수 없는 길이였기때문이다. 투철한 신념에는 억센 뿌리가 있다.그 뿌리는 조국해방의 날을 불과 다섯달 앞두고 희생된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동지들이 지녔던 혁명신념이 바로 그런 억척같은 신념이였다. 네명의 투사들, 그들중에는 고학으로 중학교를 다니다가 《불온분자》로 지목되여 퇴학당한 사람도 있었고 머슴살이를 하면서 자습으로 피타게 지식을 습득한 노력가도 있었으며 혁명군에 참군하여 체계적으로 성장하며 여러가지 직무를 력임해온 지휘관도 있었다.지어 엄중한 과오를 범하고 강직되였다가 다시 중요한 직무를 맡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네명의 투사들이 지닌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나를 낳아준 조국은 어머니이고 혁명투쟁에서 나를 가르쳐주고 길러준 권영벽동지가 삶의 좌우명처럼 간직한 이 말이 곧 그의 혁명신조이고 신념의 뿌리였다. 걸음걸음 총검의 숲을 헤쳐야 하는 극악한 조건에서도 이 신념의 뿌리가 그들을 불굴의 투사로 성장시킨 자양분이였다. 하강구의 7도구로부터 상강구의 25도구에 이르는 수백리의 로정을 한달에도 몇차례씩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당소조들과 조국광복회 지회, 분회들을 조직한 권영벽동지가 보천보전투를 위한 적후정찰임무를 수행한 후에 스스로 그 전투에 참가할것을 열렬히 제기한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치달아오르던 1937년에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에서 백주에 수백명을 동원하여 5.1절의 반일반만시위를 하도록 조직했으며 보천보전투승리후 신흥촌부녀회 성원들을 현지에 파견하여 인민들의 여론을 수집하여 사령부에 보고한 리제순동지의 창발성의 밑바탕에는 과연 무엇이 깔려있는가. 주력부대 사무장의 중임을 맡아한 후에도 《혜산사건》으로 초래된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죽음의 고비를 무수히 넘나들며 낮과 밤이 따로없이 주구청산과 원호물자마련, 군사정보수집 등 눈부신 활동을 벌리면서 파괴된 조직들을 수습해나간 지태환동지와 청봉밀영의 정치책임자로서 엄중한 과오를 범하였으나 조선혁명을 보위하고 그들 매 사람의 직책상임무는 각이했어도 네명의 투사들에게는 언제나 인생의 가장 큰 영광으로 자부하는 꼭같은 하나의 직무가 있었다. 나는 이것은 오늘 우리는 오늘의 시대는 이 땅에 태를 묻은 사람들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물어보라.나는 지금
《우리는 일심동체!》
누구에게나 자기의 신념과 지조를 검증받을 그런 시각이 언젠가는 있기마련이다. 네명의 투사들은 피비린내나는 원쑤들의 감옥에서 자신들의 신념을 립증하였다. 쇠고랑을 차고 독감방에 갇힌 그때부터, 적들로부터 끊임없이 전향을 강요당하는 그 순간부터 신념과 배신의 싸움이 시작된다. 산에서 싸울 때에는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기아와 추위, 전투에서의 희생으로 오는 상실과 아픔은 있어도 자유로운 몸이였고 전우들도 곁에 있었다. 그러나 감옥에서는 사정이 달랐다.누가 보는이 없고 통제하는이도 없고 더우기는 그처럼 믿고 따르는 그런 상황에서 매일같이 일제교형리들에 의해 살이 찢기고 손톱을 뽑히우고 뼈가 부서지는 고문을 당해야 하는 끔찍한 하루하루는 산에서 투쟁할 때의 백날, 천날맞잡이였다. 천고밀림의 설한풍속에서 인간이 겪을수 있는 온갖 곤난은 가까스로 견디여냈을지언정 형장에서의 고문만은 이겨내지 못하고 혁명가로서의 체면과 지조를 버린 변절자들에게는 맞아죽을 각오가 없었다. 굶어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와 함께 맞아죽을 각오까지 되여있는 그런 신념이라야 공고한 기초우에 선 신념이라고 할수 있다. 신념의 진가는 어디서 더 잘 검증되는가.혁명가의 지조는 어떻게 낱낱이 검증되는가.그것은 철창속에서, 모진 악형을 꿋꿋이 견디여내는데서 검증된다.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동지들은 그저 견디여낸것이 아니라 한마음한뜻으로 뭉쳐 철창속에서도 싸운 견결하고 참된 투사들이였다. 옥중투쟁이란 무엇인가.그럭저럭 감옥에서 목숨이나 연장하는것이 감옥살이라면 혁명가의 신념을 지켜 죽음도 맞받아 투쟁하는것은 이런 비상한 의지로 그들은 일심동체가 되여 옥중에서도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다. 보통사람들같으면 누구나 자기의 목숨부터 생각했겠지만 투사들은 사령부의 안전, 《모든것을 부인하라.놈들은 아직 조직의 내막을 모르고있다.목숨으로 혁명과 조직의 비밀을 지키자.》 이것은 혜산경찰서에서 옥중투쟁을 처음 시작할 때 권영벽동지가 다른 동지들에게 보낸 통방신호였다. 그러나 그후 변절자의 너절한 배신행위로 조직의 비밀이 적지 않게 탄로나게 되자 권영벽동지는 혁명조직들이 당할수 있는 피해를 최대한으로 막아보려고 리제순동지에게 《모든것을 나에게 밀것!》이라는 백글쪽지를 보내였다.그의 의도와 결심을 알아차린 리제순동지는 지체없이 《우리는 일심동체!》라는 회답쪽지를 보냈다. 손톱으로 한자한자 쪼아박은 백글쪽지의 그 글자들을 정녕 무심히 대할수 없다.그것은 선혈로 쓴 신념의 맹세나 같은것이다. 함흥형무소로 압송될 때 자동차에서 권영벽동지의 선창에 따라 투사들모두가 함께 부른 《적기가》의 힘찬 합창, 그것은 적들을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하고 인민들에게 신심을 안겨준 일심동체의 우렁찬 메아리였다. 공판장들에서도 하나의 목소리로 일제의 죄행을 단죄하는 그들의 폭탄선언은 적들을 당황망조케 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자기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혁명가들이다.이러한 숭고한 리념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죄는 우리에게 있는것이 아니라 남의 나라를 강점하고 주인행세를 하는 바로 너희들에게 있다.그렇기때문에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너희들 일본제국주의자들을 구축하기 위하여 계속 싸울것이며 제국주의는 반드시 공산주의에 의하여 소멸될것이다.…》 네명의 투사들은 철창속에서도 다른 수감자들에게 혁명가요를 배워주었고 못을 얻어 감방의 벽과 문기둥들에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한자한자 새겨놓았으며 《조선혁명 만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의 글발도 새기였다. 감옥속의 그 누가 언제, 어느때 보아도 좋다.만약 우리 사람이라면 혁명의 숨결과 투지를 느끼며 고무를 받을것이고 적들이 보면 공포를 느낄것이 아닌가.원쑤들은 질겁하라! 이렇게 그들은 감옥을 수감자들을 각성시키고 적들을 벌벌 떨게 하는 혁명의 학교로 만들었다. 옳다고 믿는것만으로는 신념이 아니다.모진 고문에도 굴함없이 일심동체가 되여 옥중투쟁을 벌린 투사들의 그 불굴의 기개와 정신이야말로 진짜혁명가의 신념이다.신념이 굳센 사람에게 옥중투쟁은 있어도 감옥살이는 있을수 없는것이다. 그들은 일심동체의 위력으로 사령부의 안전을 굳건히 지켜냈고 혁명조직이 당할수 있는 피해를 최대한 막았으며 조국해방을 향해가는 승리의 계단들을 자기들의 피와 목숨으로 하나하나 만들어놓았다. 과연 그 무엇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6~8년간 각기 독감방에 갇혀있은 그들을 일심동체로 단합시켰는가. 신념이였다.오직 자기의 오늘날에도 《오너라 감옥아 단두대야 이것이 고별의 노래란다》라고 《적기가》를 너무도 쉽게 부르는 사람은 많다.그러나 우리에게 일제식민지통치시기와 같은 저주로운 감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렇듯 가혹한 정신육체적고통을 주는 물리적수단과 환경이 없다고 하여 혁명신념을 검증할 정황이나 계기가 따로 없는것은 아니다. 이 땅에 나서자란 새세대라면 응당 자기의 량심에 물어보아야 한다.당이 부르는 어렵고 힘든 초소로 용약 달려나가야 하는 시각에 자기 하나의 안락을 위해 몸을 사린적은 없었는가, 그 누구의 눈길도 미치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자기를 희생해야 하는 운명적인 선택을 앞두고 동요하며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한적은 없었는가를. 그런 때에 뒤걸음치는것부터가 변절과 배신에로 가는 첫걸음이다.당과 국가의 고민과 고충을 풀기 위해 서슴없이 한몸을 내댈 대신 개인주의와 리기주의에 중독되여 저 하나의 리익을 챙기며 보신의 갑속에 웅크리는것은 원쑤가 내흔드는 전향서에 지장을 찍는것이나 같다. 누구나 철창속에서도 일심동체가 되여 혁명적지조를 지켜싸운 투사들의 숭고한 정신세계에 자기를 비추어보며 오늘의 전구마다에서 자기의 신념을 과감한 실천행동으로 증명하자.
최후의 순간에도 미래를 내다보았다
사람에게는 생이 한번밖에 차례지지 않는다.그처럼 귀중한 생을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고싶은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체포될 당시 권영벽동지의 나이는 28살, 리제순동지의 나이는 27살, 리동걸동지의 나이는 30살, 지태환동지의 나이는 35살이였다. 그들이야말로 산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더 많은 20대, 30대의 혈기왕성한 사나이들이였다.그들이라고 어찌 따뜻한 제집 아래목과 부모처자가 그립지 않으며 생을 오래오래 즐기고싶지 않았으랴.하다면 무엇때문에 그들은 최후의 마지막유혹까지도 꿋꿋이 물리치고 죽음의 길을 택했는가. 사람들이여, 주작봉마루에 나란히 서있는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라.한번뿐인 생이 아깝지 않았는가, 넘치는 젊음이 땅속에 너무도 빨리 묻히는것이 아쉽지 않았는가고. 그러면 투사들은 이렇게 대답할것이다.아까왔다.하지만 원쑤놈들에게 전향하여 개처럼 사는 천날, 만날보다 생을 마감짓는 그 한순간마저도 최후의 순간이 곧 그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말이 있다.혁명가의 신념은 적들은 1941년 8월 당시 함흥지방법원 공판장에서 《혜산사건판결서》로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동지를 비롯한 6명에게 이미 사형판결을 내렸었다. 판결을 내리고도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또다시 이감하면서 형집행을 몇해동안 더 끈데는 적들의 음흉한 술책이 있었다.놈들의 기본목적은 사형수가 된 그들의 심리를 부단히 압박하고 자극시켜 종당에는 전향에로 유도하자는것이였다. 그러나 적들의 어리석은 잔꾀가 통할리 만무하였다. 네명의 투사들은 1945년 3월 10일 적들이 오늘은 우리 일본 황군의 륙군절이다, 당신들이 이제라도 전향을 하면 사형을 면할수 있다고 마지막으로 회유할 때에도 단호히 물리쳤다. 최후를 앞두고 그들 매 사람이 남긴 말은 억만금의 무게를 가진다.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사업을 검토해야 하오.내가 혁명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바로 이것이 혁명가인 우리들의 임무요.》 권영벽동지는 혁명가로서의 한생을 이렇게 총화짓는것과 함께 감방에 있던 청년이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되였을 때 그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당부했다. 《조국은 멀지 않아 해방될거요.해방된 조국! 생각해보오.우리 나라가 해방된다는것을.생각만 해도 나는 숨이 가쁘도록 흥분되오.조국의 해방을 위해 얼마나 많은 투사들이 자기의 귀중한 청춘을 바쳤소? 이 땅에서 생을 받고 태여난 사람으로서 그 휘황한 해방의 날을 앉아서 맞을수는 없소.학생도 힘차게 싸워야 하오.》 권영벽동지는 또한 감방에 남아있는 동지들에게는 이런 부탁도 남겼다. 《나는 이 세상에 아들 하나를 남기고 간다.나한테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아들이 자라서 리제순동지가 최후를 앞두고 감옥에서 지은 시는 또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격정에 젖어들게 하는것인가. 《청사초롱에 불밝혀라 그리운 사형장에 나가기 전에 리제순동지는 이 말은 옥중의 투사들의 신념을 대표하여 올린 그의 마지막보고였다. 사형판결을 받은 다음에도 절망이나 비관에 빠지지 않고 조국의 찬란한 미래, 세계의 광명한 미래를 끝없이 그려보며 안해에게 사식 대신 세계지도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던 리제순동지는 마지막편지에 이런 글도 남겼다. 《사랑하는 안해에게… 아이들에게 리동걸동지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원쑤놈들을 전률케 하였다. 《나는 《나는 일제놈들에게서 피값을 다 받아냈다.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동이 밝아온다. 일제교형리들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굴하지 않은 그들의 당당한 모습에 전률하지 않을수 없었다.실로 그들 한사람한사람은 원쑤들에게 있어서 한개 사단, 한개 군단이상으로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뻔히 패망이 박두했다는것을 알면서도 투사들의 육체적생명이라도 빼앗아 불안과 공포로 떠는 제놈들을 위안하자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수천수만의 혁명가들이 불패의 력량으로 더더욱 장성강화되는것을 조금이라도 지체시키자고 원쑤들은 끝끝내 네명의 투사들에 대한 사형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교수대에서 투사들의 육체적생명은 빼앗을수 있었어도 그들의 신념만은 꺾을수도 허물수도 없었다. 최후의 순간에도 1945년 3월 10일은 원쑤들의 교수대에서 네명의 투사가 희생된 날이다.허나 최후를 마치였다고 하여 과연 그들의 생이 끝났던가.아니다.그 순간부터 그들은 불굴의 혁명신념으로 영생하고있다.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죽음도 이기는 힘은 공산주의자에게 있다.그 힘이 바로 신념이다.그들은 불굴의 혁명신념으로 최후의 순간에도 눈부신 미래를 내다본 조선의 훌륭한 아들들, 참된 공산주의자의 전형들이였다. 신념은 그렇듯 평범하던 사람들도 불굴의 투사로 자라나게 하여 인생의 값높은 영광과 영생을 안겨준다. * * 철창밖에서도 철창속에서도 신념이 같았고 지어 최후의 죽음도 함께 맞이하고 영생의 언덕에도 꼭같이 오른 네명의 투사들은 백두산대학의 신념의 교사가 되여 오늘도 새세대들에게 한목소리로 가르치고있다. 이 땅의 새세대들이여, 우리 후손들을 지켜보며 가르치는 투사들의 이 신념의 강의를 비문에 글자를 쪼아박듯 가슴에 새기고 앞으로 800년, 8 000년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열백번 바뀌여도 그 불굴의 신념으로 투쟁해나가자. 그가 누구이든 이 땅에 태를 묻고 자란 사람이라면 항일선렬들의 피가 스미고 넋이 깃들어있는 조국땅 방방곡곡에서 투사들이 그려본 더 아름답고 휘황한 래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소중한 창조물들을 끊임없이, 더 많이 일떠세우자. 그리고 투사들에게 단 한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떳떳한 자욱자욱을 값있게 하나둘 새길적마다 주작봉마루에 올라 영생의 모습으로 서있는 그들앞에 삼가 인사드리며 굳게 맹세다지자. 항일빨찌산의 후손답게 본사기자 백성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