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일《로동신문》
《어머니조국의 손길이 있어 고난도 시련도 총련동포들의 추억의 목소리
《재일동포들은 몸은 비록 이역땅에 있어도 언제나 마음속에 조국을 안고 살아야 하며 사회주의조국의 절대적인 지지자, 견결한 옹호자가 되여야 합니다.》 이역에서 사는 해외교포들은 생활하는 과정에 이러저러한 곡절과 난관을 겪게 된다.자본주의일본땅에서 사는 우리 동포들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일본이 타민족 특히 조선민족에 대한 차별이 우심한 나라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재일동포들은 모든 시련과 난관을 웃으며 헤쳐오고있다.자애로운 어머니조국, 강대한 주체의 사회주의조국이 있기에.
《많은것을 잃었지만 제일 귀중한것을 얻었습니다》 얼마전 일본 효고현에서는 총련조직의 주최밑에 30년전 한신대지진으로 희생된 동포들에 대한 추모모임이 열리였다.장내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있었다. 하지만 이 모임은 결코 슬픔의 나날을 돌이켜보는 모임이 아니였다.절망에 빠졌던 자기들을 손잡아 일으켜세워준 어머니조국의 뜨거운 사랑에 감사를 드리는 마당이였다. 1995년 1월 17일 5시 46분 일본의 효고현을 비롯한 깅끼지방에서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살림집과 건물들이 처참하게 무너져 숱한 사람들이 생매장당하였다.지역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화하였다. 이 재난은 재일동포들에게도 커다란 불행을 들씌웠다.백수십명이 목숨을 잃고 1 500여명이 부상당하였다.근 2 000호의 동포가옥이 완전히 파괴되였다. 추모모임에 참가한 많은 동포들이 그때의 일을 추억하였다. 총련 효고현 니시노미야지부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는 조리관동포는 당시 조청 효고현 니시노미야지부 부위원장이였다.요란한 진동에 놀라 깨여나보니 집집의 창문들이 깨여져나가고 거리의 곳곳에서 불길이 솟구쳤다.급히 가까이에 있는 한신조선초급학교(당시)에 뛰여가보니 총련과 조청일군들, 교원들이 모여와있었다. 《동포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하는것이 첫째입니다.모두 출동합시다.》 한 총련일군의 결패있는 말에 모두가 밖으로 뛰쳐나갔다.전화가 두절되고 교통이 마비되다나니 걸어서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상황은 험악하였다.길가에서 통곡하는 사람들, 페허가 된 거리와 마을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을 볼수 있었다.음식점을 경영하던 한 동포가 오가는 사람들에게 주먹밥을 나누어주고있는것이였다. 조리관동포는 눈굽이 뜨거워졌다. 고베조선초중급학교에서 그는 피난와있는 부모를 만났다.하루밤만이라도 같이 지내자고 하는 어머니에게 아들은 말하였다. 《미안해요.어머니, 페허에서 우리 동포들이 기다리고있어요.내가 있어야 할 곳은 동포들이 있는 그곳입니다.》 당시 고급학교학생이였던 최수영동포는 함께 자던 부모의 생사를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1층에서 자던 형 최수광을 찾아보았다.총련 조선대학교에 다니던 형은 방학으로 집에 와있었다.찌그러진 베란다를 통해 겨우 1층에 내려가 이미 숨진 형을 발견했을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원이 되겠다고 하던 형이 이렇게 되다니.) 최수영의 가족은 주변에 있는 일본피난소에서 림시 생활하였다. 고생하던 그들을 총련지부 위원장이 찾아냈다.동포들이 모여있는 고베조선초중급학교에 가니 각지 총련조직들에서 보내여온 지원물자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지원물자를 실은 자동차들이 매일과 같이 들이닥치였다.도꾜에서, 교또에서… 언제나 총련과 재일동포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돌리고계시는 동포사회는 뜨거운 격정의 파도로 세차게 설레이였다. 암담하였던 민족수난의 시기에 일어났던 간또대지진, 그때 재일동포들은 억울하게 참혹한 학살을 당하고도 하소할수 없었다.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어도 물 한모금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라가 없었던탓으로 강요당하였던 그 비참한 과거와 오늘의 현실은 얼마나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것인가. 재일동포들은 사회주의조국의 품이야말로 영원히 운명을 맡길 진정한 삶의 요람, 한없이 따사로운 어머니품이라는것을 다시금 깊이 절감하였다. 어머니조국의 사랑의 손길이 있어 재일동포사회는 횡포한 자연의 광란속에서도 안정을 유지하면서 난관을 극복해나갔다.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 효고지부 위원장인 심달야동포는 당시 교원이였는데 지진이 일어난지 3일만에 학교에서 수업이 열리였던 사실을 눈물겹게 추억하였다. 총련 사이다마조선초중급학교 교육회 부회장인 리현규동포는 당시 조선신보사 기자였다.급히 취재에 착수하라는 지시를 받고 효고현으로 떠났다. 《기자동무가 왔다!》 동포들은 환성을 올리였다.비록 피난생활을 하고있었지만 모두가 락천적으로 곤난을 이겨내고있었다. 기자는 놀라운 광경도 볼수 있었다.어느한 분회의 동포들이 페허가 된 분회사무소부지에서 《우리 분회는 살아있다! 모든 힘을 피해복구에로!》라는 글이 씌여진 횡단막을 들고있는것이였다.모두 집과 가산을 잃었지만 그들은 웃고있었다.이 분회의 분회장이 바로 사망한 조선대학교 학생 최수광의 몇달후 이곳에서는 고베조선초중급학교개건을 위한 모임이 진행되였다.자기 집, 자기 기업이 다 파괴된 속에서도 동포들은 학교복구부터 시작한것이다. 조청 효고현 니시노미야지부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한신조선초급학교에 대한 유희기구기증사업을 준비하고있었다.그런데 재난으로 가산을 다 잃다나니 누구 하나 손에 쥔것이 없었다. 하지만 조청원들은 두주먹을 부르쥐고 웨치듯 말하였다. 《무조건 합시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힘을 합칩시다!》 … 그때를 돌이켜보며 동포들은 말한다.재난으로 많은것을 잃었지만 제일 귀중한것을 얻었다고. 그것은 예로부터 해외동포들은 민족이라는 대하에서 튀여나온 물방울에 비유되였고 그들의 력사는 례외없이 수난의 력사로 불리워왔다.우리 민족의 불행에 찬 해외류랑의 력사는 일제의 조선침략으로부터 시작되였다.그 불우한 행렬가운데서 최악의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 다름아닌 재일동포들이였다. 돗도리현에는 생의 시작이 영 다른 두 동포로인이 살고있다.리규석로인과 박정우로인이다.그들의 인생사는 나라의 흥망이 매 민족성원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있다. 《허약했던 나라마저 빼앗겨 내 운명이 비참했습니다.하지만 이것은 90고령의 리규석로인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리규석로인은 조선봉건왕조시기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였던 가문에서 태여났다.방바닥을 기여다니던 애기의 눈에 비쳐진것은 고래등같은 기와집과 뜨락을 분주히 오가는 하인들이였다.생활은 비교적 유족하였다. 하지만 안정은 오래가지 못하였다.량반출신이지만 반일감정이 강한 이 가정을 일제는 그냥 놔두지 않았다.집과 재산은 다 차압당하고 어린 규석은 하지만 현실은 어떠했던가.그의 눈에 비쳐진 아, 우리를 품어줄 조국, 조국은 어디에 있는가. 조선사람이라는 죄 아닌 죄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그는 이렇게 피터지게 부르짖었다. 마침내 간악한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였다.10년후에는 공화국의 존엄높은 해외공민단체인 총련이 고고성을 터치였다.총련이 자기들의 권익을 지켜주는 조직이라는것을 알게 된 그는 품팔이를 그만두고 애국사업에 몸을 담그었다. 마가을 찬바람에 흩날리는 가랑잎신세나 다름없던 리규석동포는 참다운 삶의 좌표를 세우게 되였다.피눈물나는 노예살이속에 진정한 조국의 참의미를 깨달은 인간의 필연적인 선택이였다.키도 노도 없이 표류하던 운명의 쪽배는 마침내 포구에 와닿았다. 리규석동포는 조청지부 재정부장, 현본부 문화부장, 조직부장사업을 하면서 밤낮없이 뛰여다니였다.그후 상공회에 들어가서도 많은 일을 하였다. 리규석로인과 거의 동년배인 박정우로인은 그와는 달리 극빈한 가정에서 태여났다.고향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있다는것은 어릴적에 엿장사군이 올 때마다 입술을 감빠는 자기에게 할머니가 엿을 사주던 기억뿐이다.그 엿의 달콤한 맛이 고향에 대한 추억의 전부이다. 그는 6살때 부모의 등에 업혀 일본으로 갔다.관부련락선을 타고 시모노세끼항에 도착하니 이역의 차디찬 공기가 엄습해와 애어린 소년은 몸을 옹송그리였다.그들의 가정은 탄광에 보따리를 풀었다.그곳 탄광에는 강제련행되여온 조선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어린 정우는 생각하였다. (여기는 일본땅, 남의 나라 땅이라는데 왜 조선사람이 이토록 많은가.) 붕락사고로 수십, 수백명의 조선사람이 한꺼번에 희생되여 골안에 피절은 곡성이 터질 때 소년은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죽음의 유령이 배회하는 살인고역장들에서 조선사람의 생명은 파리목숨이나 같았다. 몇해후 겨우 일본소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걸핏하면 《조선놈인 주제에》라는 모욕과 차별을 받았다.노예적굴종만을 강요하는 일제의 란폭한 발길질과 모질게 짓누르는 가난의 멍에로 하여 그의 가슴속에는 피멍이 들었다. 해방후 조선학교에서 우리 말, 우리 글을 배우면서 정우는 생기를 찾게 되였다.그런데 미일반동들은 악명높은 《조선인학교페쇄령》을 휘둘러 그 학교마저 없애버리려고 미쳐날뛰였다.그때의 격렬한 투쟁과정에 굳은 결심을 다진 정우는 그후 총련에서 세운 중앙사범학교에 선참으로 들어갔다.졸업후에는 나가사끼현에서 조청, 총련사업을 하였다.황금만능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일신의 영달이나 돈벌이가 아니라 조국과 총련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였다. 곡절많은 인생의 길을 걸어온 리규석, 박정우로인은 후대들에게 늘 이렇게 당부하군 한다. 《우리는 조선사람이다.조선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수난의 력사를 잊지 말고 오로지 애국, 애국을 하자.》 본사기자 허영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