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0일《로동신문》

 

위대한 조국, 자랑스러운 총련이 있어
언제나 마음 든든하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어머니조국과 운명을 함께 하며 창창한 미래에로 가는 총련의 힘찬 보무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수 없을것이며 그 성스러운 려정은 우리 공화국의 높은 존위와 더불어 찬연히 빛나게 될것입니다.》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은 자본주의이역땅에서 력사의 온갖 풍운을 이겨내며 애국의 한길을 꿋꿋이 이어왔다.위대한 조국이 있고 총련과 같은 애국조직이 있기때문이다.

지구상에 각양각색의 해외교포조직들이 있지만 이러한 현실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다.총련결성 70돐을 성대히 기념한 지금 자기들이 걸어온 긍지높은 로정을 더듬어보는 재일동포들의 심정은 참으로 류다르다.


《영원히 잊을수 없는 나날입니다》


아이찌현에서 사는 김종진, 김진도동포는 아흔을 가까이하는 로인들이다.민족적차별과 불평등이 란무하는 일본땅에서 그들은 숱한 경난을 겪었다.특히 민족교육의 초창기나날들, 어렸을 때의 일들은 정말 잊을수 없는것들이다.

《난 무려 12번이나 학교를 옮기였소.허 참.》

김종진로인은 이 말을 할 때마다 허거프게 웃군 한다.

해방전 일본소학교에 입학하고 1955년 중부조선중고등학교(총련 아이찌조선중고급학교의 전신)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12번이나 옮기였다는 소리이다.

리유는 두가지였다.하나는 해방후 민족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학교들의 수도 증가한데 있었다.다른 하나가 기본이였다.그것은 일본당국의 악명높은 조선학교페쇄망동이였다.바로 그때문에 김종진의 학창시절은 곡절과 수난으로 가득찼다.

그 어느곳이나 다 그러하였듯이 해방후 아이찌현에서도 민족교육열기가 세차게 고조되였다.동포들은 한푼두푼 모은 얼마 안되는 돈으로 판자집교사를 마련하였다.조국해방후 3년어간에 아이찌현에만도 무려 32개의 학교가 생겨났다.아이들은 거기에서 우리 말과 글을 배웠다.누구의 얼굴에나 생기가 넘치였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광란적인 탄압이 개시되였던것이다.1949년 10월 악명높은 조선학교페쇄령이 또다시 내려졌다.

동포들은 분노하였다.

배움의 요람을 빼앗기게 된 학생들도 들고일어났다.

1949년 3월 아이찌현에 이사와서 조선학교에 입학한 김진도로인은 그 나날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처음 교실에 들어서서 보니 모두가 우리 동포학생들이였소.얼마나 기쁘던지.일본소학교에서 조선사람이라고 따돌림받고 차별을 당하던 때가 떠올랐소.비록 교사는 변변치 않았어도 마음편히 공부할수 있는 우리 학교가 정말 좋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지.그런데 몇달 안있어 일본경관들이 총과 곤봉을 꼬나들고 학교에 들이닥칠줄이야.…》

《이 학교는 페쇄되였다.다들 교실에서 당장 나오라!》

경찰의 살기띤 호령이였다.비록 나어린 학생들이지만 누구도 굴하지 않았다.

《절대로 안나간다.절대로 못빼앗는다.여기는 우리 학교다!》

무자비한 폭행이 뒤따랐다.

포악한 경관들은 여린 손으로 책상모서리를 꽉 그러잡고 안일어나겠다고 모지름쓰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교실밖으로 끌어냈다.일본땅 그 어디서나 이런 살풍경이 펼쳐졌다.일제가 패망한지 여러해가 흘렀지만 조선민족에 대한 적의와 차별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페쇄당한 학교들중 일부는 자리를 옮기였다.

그런데 일본경찰은 한사코 쫓아와서 더 간악하게 행패를 부리였다.《교원면허를 받지 못했다.》고 생트집을 걸면서 교육자들을 무리로 체포해간것이다.선생님들이 잡혀가는것을 본 학생들은 분격하여 무장경관들에게 와- 하고 달려들었다.

일본반동들의 광란적인 탄압소동으로 민족교육의 초창기나날들은 이렇게 처절하게 흘러갔다.

조국의 은혜로운 손길이 와닿아 총련이 결성된 후 재일동포들은 마침내 민족교육권리를 비롯한 제반 권리들을 하나둘 되찾기 시작하였다.

도처에서 새 교사를 세우는 바람이 불었다.너나없이 살림형편이 어려웠지만 동포들은 학교문제를 급선무로 내세웠다.하지만 긴장한 자금사정때문에 순조롭게 진척되지 못하였다.

바로 그때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생명수와도 같은 사랑의 젖줄기가 조국으로부터 흘러들었다.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의 력사가 시작되였다.

참혹한 전쟁의 후과를 아직 가시지 못한 조국에서 돈을 보내여올줄을 과연 그 누가 꿈결에라도 생각해보았겠는가.

총련 아이찌조선중고급학교의 첫 조청위원장으로 사업하던 김진도는 그때의 격동된 심정에 대해 이렇게 회억한다.

어느날 교장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학생들앞에 나섰다.

《학생동무들, 조국에서… 조국에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주었습니다.동무들을 위해, 우리 동포들을 위해서 말입니다.우리 학교가 살았습니다!민족교육이 살았습니다!》

잠시 숨가쁜 정적이 깃든 후 폭풍같은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김일성원수님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학교조청위원회 사무실에서 김진도는 밤새껏 벽신문을 만들었다.흘러내리는 눈물을 주먹으로 연신 훔치며.

당시 총련 《조선신보》에는 이런 글이 실리였다.

《지금 일본의 방방곡곡 동포들이 사는 그 어디서나 조국에서 보내준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에 대한 화제로 광활한 희열과 기쁨에 들끓는 장면에 부닥친다.둘이 만나나 셋이 앉으나 동포가 모인 장소라면 이 화제로 꽃이 핀다.시간이 가는줄 모르고 감격의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모두는 내가 조선공민으로서 무슨 일을 얼마나 하였는가에 대한 자기반성과 함께 앞으로는 가만히 앉아있을수 없다는 결의를 터친다.》

동포들은 사기충천하여 곳곳에 현대적인 새 교사를 일떠세우고 문화회관, 체육관들도 보란듯이 꾸리였다.10년사이에만도 일본각지에서 무려 135개의 학교가 건설되였다.민족교육열풍이 세차게 일어번지였다.

김종진로인에게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단에 처음 서던 때의 일이 아직도 어제일이런듯싶다.

《선생님, 우리 학교는 아이들에게 조선사람의 넋을 심어주는 곳입니다.우리 애를 당당한 조선사람으로 키워주시우.》

애젊은 자기에게 이렇게 절절하게 부탁하던 학부형들의 모습이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지금도 김종진로인에게는 눈에 삼삼하다.

학교를 중심으로 교원, 학생, 학부형 아니 모든 동포들이 뭉쳐졌다.바로 이것이 총련의 특유한 모습이라고 옛 교육자는 오늘도 뇌인다.

이토록 장장 70년세월 총련은 어머니조국의 은혜로운 사랑속에 민족교육의 화원을 펼쳐왔고 애국의 서사시를 아로새겨왔다.

긍지높은 그 나날을 돌이켜보며 김종진, 김진도로인은 후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국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이처럼 가슴펴고 살아올수 있었겠는가.시련이 많다고 동요하지 말라.이역에서 산다고 주눅들지 말라.우리에게는 위대한 수령이 계시고 위대한 조국이 있으며 자랑스러운 애국조직이 있다.》


《어머니조국에 운명의 피줄을 이었습니다》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 오사까지부 고문 허옥녀로인은 시상을 잡느라 한참이나 모대겼다.수백편의 시작품을 창작하여 동포들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저명한 시인이지만 이날따라 시창작이 잘되지 않았던것이다.총련결성기념일과 관련한 시라는 중압감때문인지.

그의 작품들가운데는 민족교육과 관련한것이 특별히 많다.《나래쳐라 푸른 하늘에》, 《살뜰한 그대여 고개를 드시라》, 《계주봉》, 《우리 교장선생님》, 《노래자랑모임》, 《하나의 꼴문을 향하여》 등 그가 창작한 시들은 수십년간 교정에서 새세대들을 키워내는 과정에 겪은 가지가지의 자랑스럽고 잊지 못할 일들을 아름다운 운률에 담은것들이다.

허나 오늘은 총련결성 70돐을 맞으며 위대한 사회주의조국과 그 한 부분인 고마운 총련조직을 노래해야 한다.무엇부터 어떻게 노래해야 할가.

문득 평범한 사실들, 평범한 나날들이 떠올랐다.자기가 겪었던 일들이.

조국이 없었다면, 총련이 없었다면 나의 보람찬 삶이 아니 동포들모두의 긍지높은 삶이 있을수 있겠는가.

그는 붓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언니와 오빠따라 다닌 우리 학교

그 자그마한 학교에서

아야어여 배우기 시작한 1학년때

그대가 무어진줄 나는 몰랐네

이렇게 서두를 떼고보니 하많은 추억이 밀물쳐왔다.

총련이 결성된 후 그의 아버지는 분회장으로 사업하였다.해종일 힘들게 일하고서도 저녁이면 동포가정들을 찾아가 일손을 도와주면서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군 하였다.그런 아버지를 동포들은 존경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어린 옥녀는 자기도 크면 아버지처럼 살리라고 생각하였다.

바다건너 저 멀리 조국에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 그 사랑의 생명수가 동포사회에 흘러들고 꿈과 같이 귀국의 배길이 열렸을 때 동포들이 감격에 울고웃는것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던 때도 생각났다.

어머니조국에 대한 고마움이 애국의 열정으로 끓어올라 그는 수십년간 교육자로, 문예인으로 사업하였다.

참으로 보람찬 시절이였다.

몇해전 총련 오사까조선중고급학교창립 70돐 기념공연 《희망의 나래, 우리의 노래》가 진행될 때 그는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터치였다.

《나에게는 바라는것이 있습니다.초급학교로부터 조선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우리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학생들이 다 훌륭하게 자라 애국의 인생을 마음껏 꽃피우는것입니다.》

뜻밖의 사고로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잃고 눈앞이 캄캄해져 쓰러진 자기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어 다시 일으켜세워준 고마운 총련일군들과 동포들의 모습도 눈앞에 밟혀왔다.

돌이켜볼수록 한없이 은혜로운 어머니조국의 품, 총련조직의 손길이 있어 애국의 길을 주저와 동요없이 걸어올수 있었다는것을 절감할수 있었다.

로시인은 흥분된 마음 안고 붓을 달리였다.

가장 어려워할 때 껴안아주고

아픔덜어주려 등쓸어준 손길들

나는 알았네 나는 알았네

그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70년세월 함께 가자 이끌어준

조국의 품과 같은 고마운 그대여

나는 알았네 나는 알았네

총련! 그대 있어 내 삶도 꽃피였음을

본사기자 허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