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4일《로동신문》

 

우리 당이 보석처럼 빛내여주는 전승세대의 삶은 어떤것인가

전승 70돐을 맞으며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공화국영웅홀에
새로 전시된 길창년동지의 위훈자료를 놓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1950년대에 전승세대가 세운 특출한 위훈과 후대들에게 남긴 정신적재부와 유산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고귀한것으로 깊이 간직되고있습니다.》

두해전 전승 70돐을 맞으며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공화국영웅홀에는 아홉명 공화국영웅의 초상사진과 위훈자료가 새로 전시되였다.그들가운데는 근위 서울김책제4보병사단 포병련대에서 후방일군으로 활동한 길창년동지도 있다.

적과의 싸움에서 무훈을 떨친 유명한 군사지휘관도 아니고 육탄용사도 아닌 후방일군이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았으며 더우기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영생의 모습으로 빛나고있는 수백명 공화국영웅들가운데 전문 후방사업을 맡아본 사람은 길창년동지 한명뿐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주는 충격과 여운은 대단히 크다.

하다면 그는 어떤 사람인가.전승의 그날로부터 70여년이 흐른 오늘 우리 세대는 그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새기게 되는가.


명성높은 당원사단의 후방일군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공화국영웅홀에는 길창년동지의 전쟁시기 위훈이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군사후방보장방침을 높이 받들고 전쟁 제1계단시기 식량 40t을 비롯한 수많은 후방물자를 로획하여 보장하였으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는 련대의 군기를 보위하고 적후투쟁에 참가하여 적 100여명을 살상하였다.》

하지만 이 글줄만으로는 그의 위훈에 대하여 다 알기 어렵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길창년동지가 복무한 근위 서울김책제4보병사단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품들여 꾸려주신 당원사단이다.위대한 수령님께서 그어주신 승리의 붉은 화살표의 맨앞에서 폭풍처럼 내달리며 세상에 명성떨친 이 전설적인 근위사단에서 그의 직무는 진격의 돌파구를 열어제끼는 포병련대의 량식공급장이였다.

그에게도 야전부대지휘관으로 용맹떨치며 싸우고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다.후날 제2전선부대에서 싸울 때 후방부련대장이였던 그가 락동강도하전투에서 희생된 련대장을 대신해 여러 전투를 잘 지휘하여 국기훈장 제2급을 수여받은 사실은 그에게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자질과 실력도 갖추어져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후방일군의 직무를 무겁게 받아안았다.

나라없던 그 세월 막벌이로동자로 비참하게 살다가 원한의 징용살이까지 강요당했던 그는 해방후 민청일군, 당일군으로 성장하였다.길창년동지가 남긴 수기에는 그의 입당날자가 1946년 8월 28일로 적혀져있다.그리고 그가 1948년 2월 8일의 뜻깊은 열병식에 참가한 사실도 기록되여있다.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 당원으로, 군관으로 자라난 그였기에 량식공급장의 임무를 당과 조국이 자기에게 주는 과업으로, 둘도 없는 믿음으로 간주하였던것이다.

지난해 4월 5일 군보에는 길창년동지가 전화의 나날에 세운 영웅적위훈이 소개되였다.그 기사의 첫번째 소제목은 《전방에서 나를 찾으라》였다.

실지로 그는 결코 우에서 후방물자를 보장해주기를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였다.전투가 진행될 때 련대의 뒤에 있다가 전투가 끝난 다음 전장을 뒤따라가며 로획물자를 거두는 사람도 아니였다.

우리 후방일군들의 걸음이 순간이라도 늦추어지면 사단의 전진이 떠진다.나에게 있어서 후방일군이란 단순한 직무이기 전에 당원사단의 전투력을 백방으로 담보해야 하는 당적분공이다.

이런 좌우명을 안고 그는 언제나 련대와 어깨나란히 전방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서울해방전투시에 자동차 7대를 비롯한 군수물자 로획, 금강도하전투와 대전해방전투때에는 연유 55t과 식량 40t 로획, 락동강도하전투때에도 식량과 포탄 등 많은 량의 군수물자 보장…

위대한 전승사를 빛나게 장식한 전투마다에서 혁혁한 군공을 세운 근위부대들, 전투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하지만 그 전투승리에 고여진 후방일군들의 위훈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총포탄이 작렬하는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목숨걸고 군수물자를 보장한 후방일군들이 없이 어찌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기어이 관철한 영용한 전투부대들의 무비의 위훈이 있을수 있겠는가.

길창년동지가 전화의 나날에 세운 하많은 위훈들가운데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련대의 군기를 끝까지 수호한것이다.

후퇴명령을 받은 그가 락동강을 건너 부대와 약속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군기소대장이하 대원들은 거의다 희생되고 련대지휘부도 없었다.련대의 군기를 어떻게 무사히 호송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심중한 토의가 오갈 때 길창년동지는 단호히 선언했다.

《군기는 내가 품고가겠소.》

그에게 군기호송임무를 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그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것을 길창년동지자신도 잘 알고있었다.

그때 그의 눈앞에는 잊지 못할 1948년 2월 8일의 뜻깊은 열병식장이 선히 어려왔다.김일성장군님의 사열을 받으며 굽이쳐흐르는 열병대오의 선두마다에서 휘날리는 영광의 군기들을 바라보던 때의 그 격정을 어찌 잊을수 있으랴.

군기는 부대의 넋으로서 군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목숨보다 더 귀중하다.더우기 우리 군기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조직해주신 당원사단의 한개 련대의 군기가 아닌가.그것을 끝까지 지켜내는것은 당원사단의 한 성원인 나의 임무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주저없이 군기를 가슴에 품었다.그 순간부터 그에게는 죽을 권리조차 없었다.

불의에 조우한 적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려야 했고 간고한 로정에서 신념을 잃은 비겁분자, 나약분자들과도 맞서야 했던 그 나날에 길창년동지가 겪은 간난신고에 대하여 여기에 다는 전할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수 있는것은 련대의 넋을 품은 당원이라는 자각을 안고 수십일동안 1 000여리를 걸은 끝에 길창년동지가 제2전선부대와 감격적인 상봉을 하고 자기 부대와도 만나 군기를 바쳤다는것이다.

그때 지휘관들을 더 놀라게 한것은 그가 품에서 정히 꺼내놓은 희생된 19명 당원들의 당원증이였다.그 19명 당원들가운데는 군기를 무사히 호송하기 위한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당세포비서도 아니였고 정치일군도 아니였다.그러나 숨지는 순간까지도 위대한 수령님께 끝없이 충직한 참된 당원들의 당성에 대하여 당중앙위원회에 보고할 의무를 스스로 걸머졌던것이다.

그의 수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그때 나를 맞아준 항일혁명투사 최현동지를 비롯한 여러 지휘관들이 내가 270여명의 인원과 함께 련대군기와 19명 당원들의 당원증까지 무사히 호송해온 과정을 다 듣고나서 내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동문 진짜 영웅감이야!〉》

오직 우리 당밖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억척불변의 신념을 지니고 수백명 군인들과 인민들뿐 아니라 련대의 넋과 19명 당원들의 정치적생명까지 지켜낸 길창년동지,

그 위훈을 값높이 여겨 우리 당과 조국은 그에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였다.

해방된 이듬해 입당한 때로부터 세상을 떠난 1992년까지 길창년동지의 당생활년한은 46년을 헤아린다.

길창년동지에게 수여된 공화국영웅칭호는 그의 46년 당생활년한중에서 가장 빛나는 구간인 전화의 3년, 조선로동당원으로서의 숭고한 당성이 신념으로 체질화되게 한 그 3년에 대한 우리 당의 값높은 평가였다.


초소는 달라져도 당원의 의무는 변할수 없다


길창년동지의 공화국영웅칭호수여날자는 1965년 11월 17일이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세운 위훈이 전쟁이 끝난 때로부터 10여년세월이 지나 영웅의 금별메달로 값높이 평가되게 된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그리고 여기에도 길창년동지의 참인간상이 비껴있다.

전후에도 길창년동지는 인민군대의 어느한 부대에서 후방일군으로 사업하였다.후방사업은 곧 정치사업이라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높이 받들고 그는 자체의 힘으로 부대의 후방토대를 튼튼히 꾸려나갔다.

군인들의 식생활개선과 부대의 전투력강화에 크게 이바지한 그의 공적이 상급에 보고되였는데 그를 평가하기 위한 료해를 진행하던 과정에 일군들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였다.다름아닌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그가 세운 위훈에 대한 자료였다.그에 대하여 왜 이야기하지 않았는가고 지휘관들이 나무라자 길창년동지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때에야 다들 그렇게 싸우지 않았습니까.더우기 저는 당원이 아니였습니까.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데 제가 어떻게…》

그때까지도 그의 마음속에는 전쟁시기 희생된 전우들의 모습이 소중히 자리잡고있었다.

군공메달 하나 남기지 못한채 적후의 차디찬 땅속에 누워있는 그들모두가 그렇게 용감하게 싸워 전승에로 가는 길을 피로써, 목숨으로써 열지 않았던가.그들의 몫까지 합쳐 당과 조국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여야 한다는것은 10여년세월 그가 스스로 받아안고 말없이 집행해온 또 하나의 당적분공이였다.

길창년동지는 자기에게 공화국영웅칭호가 수여되였다는 소식도 련대부업밭에서 전해들었다.마가을의 쌀쌀한 바람에도 아랑곳않고 군복상의를 훌 벗어놓은채 땀을 흘리며 거름을 져나르고있는데 그 소식이 방송으로 전해졌던것이다.함께 일하던 지휘관들이 방송에서 나오는 이름을 들으면서 혹시 후방부련대장동지가 아닌가고 하며 법석 끓을 때 그는 내가 영웅이 될만한 일을 해놓은게 뭐가 있는가고 범상하게 말했다.

그는 이렇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는 순간까지도 자기가 영웅이 되리라고는 더더욱 생각지 못하였다.당과 조국이 부를 때 제일먼저 일어나 자기의 고귀한 모든것을 다 바쳐 싸우는것을 당원으로서, 군인으로서 응당 리행해야 할 본연의 사명으로 여겼으며 그는 한생토록 그 의무앞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공화국영웅이 된 후 길창년동지는 당의 신임에 의하여 보다 중요한 초소에서 후방일군사업을 계속하였다.평화시기이고 총포성은 울리지 않았지만 그는 불비쏟아지는 전장에서 적들의 군수물자를 로획하던 근위사단의 후방일군, 스스로 군기호송임무를 걸머지고 피어린 천여리길을 헤쳐가던 련대지휘관의 보무로 당과 조국을 위한 복무의 길을 꿋꿋이 이어갔다.

사실 그는 전쟁시기에 머리와 몸의 여러 부위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그런것으로 하여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제대되였을 때 영예군인수속을 하고 여생을 편안히 보내라고 권고하였다.하지만 그때마다 길창년동지는 이렇게 팔다리가 성한데 무슨 영예군인인가, 제발로 걸을수 있고 제손으로 일할수 있는한, 당원증을 품고있는한 당원답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집에서 축산도 하고 터밭농사도 하며 군인들의 생활에 보탬을 주는 일을 스스로 찾아하였다.

만약 그가 전쟁시기 적의 군수물자를 로획하기 위해 포연탄우 쏟아지는 전장을 누비던 무비의 헌신성과 부대살림살이를 윤택하게 하기 위해 신발이 닳도록 뛰여다니던 불같은 열정의 백분의 일이라도 자기자신과 가정을 위하여 기울였더라면 보다 안락한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혁명과업수행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쳤다.그가 자기 가정과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남긴것은 그 어떤 물질적부가 아니였다.

맏아들에게 남긴것은 자기가 수여받은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져있는 시계와 그 시계의 초침처럼 한생 당과 조국에 충성다해야 한다는 절절한 당부였다.그리고 군사대학에 다니던 둘째아들에게 종종 편지를 보내군 했는데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당원이라는 그 부름을 쉽게 부르지 말아라.당원은 명예도 간판도 아니며 출세의 밑천도 아니다.전쟁시기 당원들처럼 당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남먼저 자기 한몸을 내대는 사람, 말보다 실천으로 대답하는 사람이 참된 당원, 조선로동당원이라고 생각한다.》

당원증을 처음으로 가슴에 품던 그때로부터 수십년세월 어느 초소에서 일하든, 어떤 직무를 맡든, 어떤 정황에 처하든 숭고한 당적자각, 당적량심을 지니고 그에 무한히 충실했을뿐 아니라 생의 마지막까지 참된 당원의 모습을 조금도 흐트리지 않은 공화국영웅 길창년동지,

그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30여년세월이 흘렀다.하지만 전승세대의 불멸할 위훈을 세월이 흘러도 보석처럼 빛내여주는 고마운 어머니당은 전승 70돐을 맞으며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길창년동지의 초상사진과 위훈자료를 전시하고 그의 유해를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해주었다.


* *


혁명앞에 준엄한 난관이 가로놓일 때마다, 조국이 큰 산을 넘어야 할 때마다 우리 당은 제일먼저 당원들을 불렀으며 매 세대 로동당원들은 그 부름앞에 언제나 충실하였다.그 수범이 바로 길창년동지와 같은 전세대 당원들이다.

전진하는 대오에 식량과 피복을 공급하라고 하면 맹폭격속에서도 그 임무를 기어이 수행하고 시련의 시기에 군기를 호송해야 할 과업이 나서면 목숨걸고 군기를 지키며 보이지 않는 초소에서 일하라고 하면 누가 알아주건말건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치는 다시말하여 당에서 맡겨준 임무, 혁명의 요구가 곧 나에게 제일 알맞고 보람찬 일감이며 그것이 한생을 바쳐 수행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여도 후회없이 끝까지 한길을 가는 사람이 참된 당원이다.

그 정신이 오늘 수백만 당원들의 가슴속에 그대로 높뛰고있으며 그 위대하고 우수한 특질을 자기의 유전성으로 가지였기에 우리 혁명은 그 어떤 어려움속에서도 새로운 승리를 향하여 줄기차게 전진해나가고있는것이다.

본사기자 김송이
김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