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을 생의 가장 값높은 영예로 간직하고 총련의 한 1세동포에 대한 이야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자본주의 한복판에서 공화국기를 높이 날리며 굴할줄 모르는 조선의 정신과 기상을 과시하여온 총련은 결성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장구한 년대들에 어머니조국과 운명을 함께 하며 청사에 깊은 자욱을 남기였습니다.》
한생 묵묵히 충성과 애국의 길을 걸은 한 재일동포에 대한 이야기이다.오사까지역에서 살던 부덕수, 그는 평범한 재일동포였다.하지만 그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다.자랑스러운 총련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그의 이름은 재일조선인운동사에, 많은 동포들의 추억속에 새겨져있다.
* *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부덕수로인부부사이에는 이런 말이 오고갔다.
《내가 조국과 총련을 위한 길을 변함없이 걸어올수 있은것은 당신의 남모르는 수고가 없이는 생각할수 없소.》
《그 말 한마디면 모든 시름이 가셔져요.참으로 어렵고 힘든 길이였지만 우리는 일생 마음맞춰 헤쳐왔지요.》
자기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잘 알고있었으나 부덕수로인의 얼굴에는 서글픔이 아니라 자부의 미소가 어려있었다.
부덕수, 그의 인생은 참으로 다사다난하였다.
해방전 해녀인 그의 어머니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임신한 몸으로 배군인 남편과 함께 고기잡이배에 올랐다.그런데 항행도중 동통이 오기 시작하였다.몰인정한 선주는 그들부부를 강제로 뭍에 내팽개쳤다.낯설은 해변가에서 부덕수가 태여났다.수난의 그 세월 다반사로 볼수 있었던 눈물겨운 정상이였다.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남편이 고생끝에 운명하자 안해는 그의 뒤를 따라가리라 모진 마음을 먹었다.하지만 치마자락에 매달리는 어린 자식을 두고 차마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길수 없었다.
불쌍한 모자는 현해탄을 건넜다.고달픈 이역살이가 시작되였다.극심한 가난은 식민지소년에게서 배움의 꿈을 일찌감치 앗아갔다.부덕수는 동냥쪽박을 차고 오물장을 뒤지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갔다.굶기를 밥먹듯하다나니 늘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다니였다.소년의 소원은 두가지, 멀건 보리죽이라도 배불리 먹어보는것과 어서 커서 자기를 《조선거지새끼》라고 놀려주는 야비한 놈팽이들을 가슴후련하게 혼내주는것이였다.
해종일 품을 팔아 번 몇푼의 돈마저 세방주인에게 송두리채 빼앗긴 날이면 어머니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였다.주린 창자를 달래는 속에서도 부덕수는 어머니의 그 정상을 차마 눈뜨고 볼수 없어 잠에 든척하군 하였다.하지만 가슴속흐느낌은 멈출수 없었다.뭇발길에 이리저리 채이는 막돌같은 인생인지라 부러움조차 가지지 못하였다.무엇을 부러워해야 아무 소용도 없기때문이였다.잔뼈도 굳지 않은 어린 나이에 그는 공사판을 찾아다니였다.가난에 찌들고 설음으로 멍이 든 소년의 파리한 얼굴에서 희망의 빛이라고는 한점도 찾아볼수 없었다.산 사람에게 포부가 없다면 숨쉰다는것을 내놓고 죽은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1945년 8월 15일 그날도 부덕수에게는 지겨운 고역의 하루로 평범하게 밝아왔다.그런데 바로 그날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일본이 망하고 조선이 해방되였다는것이다.
동포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해방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였다.모진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가혹한 고역살이를 강요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사람들이 눈물범벅이 되여 환희를 터치였다.
부덕수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희망의 빛이 비끼였다.
추위에 떨어본 사람일수록 태양의 열과 빛을 더 소중히 여기고 인생고초를 겪어본 사람만이 행복의 귀중함을 더 잘 아는 법이다.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장군님의 력사적인 조국개선연설에 접하고 부덕수는 흥분을 금치 못하였다.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할 열의를 안고 애국운동에 용약 떨쳐나섰다.
우선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우리 말과 글을 익히였고 유구한 력사와 문화에 대하여 배웠다.16살에야 비로소 학교문턱을 넘어 문맹을 퇴치하게 된것이다.청년조직에도 선참으로 들었다.정말 사는 보람이 있었다.모든것이 해방덕이였다.
재일조선인들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일본반동들은 우리 동포들의 애국열의를 총칼로 무자비하게 말살하려들었다.
부덕수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그러쥐였다.
력사에 4.24교육투쟁으로 기록된 교육권리사수투쟁에서도 공화국기게양투쟁에서도 그는 동포들의 앞장에서 견결히 싸웠다.
조국앞에 엄혹한 시련이 닥쳐왔다.미제가 전쟁을 도발하였다.오사까에서 청년사업을 하던 부덕수는 재일동포들을 조국수호성전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투쟁에 용약 나섰다.
당시 오사까항으로는 조선전선으로 무기와 탄약을 실어나르는 화물선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부덕수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항구에 들어가 반전삐라를 뿌리고 시위투쟁도 조직하였다.
반전투쟁을 벌리다가 경찰에 잡히면 무작정 간첩으로 몰려 중형을 선고받던 살벌한 시기였다.하지만 이역의 애국청년은 조국인민들과 운명을 함께 할 의지 안고 용감하게 싸웠다.
경찰에 체포되여 철쇄에 묶인 몸이 되였을 때에도 그의 신념은 변함없었다.형언할수 없는 악행도 그를 굴복시킬수 없었다.그는 2년동안 묵묵부답으로 항거해나섰다.후날 그는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마음속으로 부르며 고문장으로 나가면 교형리들의 악형도 두렵지 않았다고 회억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재일조선인운동의 주체적로선전환방침에 따라 총련이 결성된 후 그의 애국열의는 더욱 불타올랐다.
총련지부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그가 제일 힘을 넣은것은 교육사업이였다.
비록 유리창 하나 변변한것 없는 낡은 판자집교사이지만 우리 말과 글을 배우니 정말 좋다고 웃고떠드는 아이들, 그 순진한 모습을 눈물겹게 바라보는 부덕수의 뇌리에는 한창 배울 나이에 동냥길에 나서고 오물장을 헤집지 않으면 안되였던 자기의 비참한 지난날이 떠올랐다.
(김일성장군님의 뜻대로 저 아이들모두를 애국의 역군으로 자래워야 한다.그것이 총련일군으로서 나의 의무이다.번듯한 학교를 일떠세우자.누구나 부러워할 그런 학교를.)
그는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학교건설자금확보에로 동포들을 불러일으켰다.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이였지만 자기 가정에서부터 한푼두푼 자금을 마련하였다.안해가 아득바득 피나게 번 돈의 대부분이 남편이 하는 사업에 흘러들어갔다.
안해 김춘화는 한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동포사회의 단합과 리익을 위하여 한몸바쳐 일하는 남편을 리해하고 적극 받들어주었다.부모의 이런 모습을 보며 자라난 둘째아들 부승민도 후날 교육후원사업에 헌신하였다.
학교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자금사정이 긴장하여 부덕수는 자기 집까지 저당잡히였다.그러다가 빚을 제때에 물지 못하여 집과 가산을 빼앗기였다.금이야옥이야 하던 외동딸도 돈이 없어 병치료를 제때에 해주지 못해 잃었다.그 아픔은 일생 마음의 응어리로 되였다고 한다.머리칼은 때이르게 희여지고 얼굴의 주름살은 하나둘 늘어만 갔다.
부덕수도 인간이였다.자기때문에 고생하는 처자에 대해 무관심할수 없어 생계유지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해보았지만 오히려 가정에 부담만 주게 되였다.그러는 그에게 안해는 허거프게 웃으며 부탁하였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지부사업에 전념해주세요.》
바로 이러한 때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감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사랑의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주시였던것이다.부덕수는 감격의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종일 가야 뚝하기만 하던 사람이 하염없이 눈물흘리는것을 안해는 처음 보았다.
《슬플 때보다 기쁠 때 눈물을 더 많이 흘릴수 있다는것을 난 오늘에야 알았소.》
부덕수는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였다.하지만 어머니조국의 손길아래 애국의 길을 걸으면서 기쁨의 눈물, 보람의 눈물을 많이도 흘리였다.
총련 기따오사까조선초중급학교가 오사까지역에서 처음으로 판자집교사를 털어버리고 보란듯이 일떠섰을 때 학교건설문제로 누구보다 고심이 많았던 그의 눈가에는 뜨거운것이 맺히였다.
조국으로 떠나보낸 맏아들 부공민이 주체교육의 최고전당인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여 장학금까지 받으며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공부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그리고 이역에서 애국사업에 헌신하는 총련일군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조국의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조국은 정녕 어머니품이구나.그 품속에서 애국사업을 하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천만금의 재부보다 귀중한것은 믿고 의지할 운명의 품이다.그 품이 있을 때 인간은 외롭지 않고 어떤 고난과 시련속에서도 비관을 모르며 긍지높고 떳떳한 삶을 누릴수 있다.
부덕수는 절세위인들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재일동포들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것을 천직으로, 보람으로 여기면서 뛰고 또 뛰였다.매 집에 찾아가서 애로되는것을 풀어주고 생계유지를 어려워하는 가정에 가서는 고민거리를 함께 나누었으며 자녀들이 말썽을 부리는 집에 가서는 부모다운 심정으로 타일렀다.
동포들은 이런 지부위원장을 무척 따르고 존경하였다.
살림살이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한번도 그때문에 고민한적이 없었다.한발자국만 뒤로 물러서면 자기만을 위한 생을 살수도 있었지만 그는 조국과 조직앞에 다진 맹약을 지켜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묵묵히 애국의 길을 걸었다.
총련결성세대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였다.조국에 무한히 충실한 이런 사람들이 억척같은 뿌리가 되여 애국위업이라는 거목을 떠받들어왔다.
* *
조국해방 80돐이 하루하루 다가오고있다.환희로운 그날을 마중하면서 온 나라 인민은 수령께 충성다하며 고결한 삶을 빛내인 애국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고있다.그 유명무명의 사람들속에는 이역에서 애국의 신념 변치 않고 억세게 싸운 총련의 1세동포들도 있다.(전문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