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신념에 인생의 영광도, 값높은 영생도 있다 -항일혁명투사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동지들의 고결한 삶을 돌이켜보며-

2025년 3월 10일《로동신문》

 

우리 인민들이 혁명의 철리를 새겨안는 신성한 교정인 대성산혁명렬사릉에는 1945년 3월 10일이라는 희생날자가 꼭같은 네명의 투사들의 반신상이 나란히 서있다.

오늘은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동지들이 조국해방을 불과 다섯달 앞두고 한날한시에 악명높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희생된지 80돐이 되는 날이다.네명의 투사들은 태여난 날과 살아온 고장도, 성격과 경력, 직무도 서로 달랐다.하지만 한가지의 공통점이 그들을 성스러운 조선혁명의 력사에 하나의 꼭같은 초상으로 다시 태여나게 해주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슬하에서 가갸거겨를 배우며 혁명가로 성장한 항일혁명선렬들은 혁명의 폭풍우속에서 사령관동지만 계시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철리를 심장에 새긴 신념의 강자들이였습니다.》

동서고금에 다시 없는 혁명과 인간, 혁명가와 인생에 대한 위대한 철학을 창조한 항일대전사는 어느한 투사의 공적만 놓고보아도, 어느한 사건만 조명하여 론한다 해도 결국은 혁명신념에 대한 이야기로 귀착된다.바로 그 신념으로 하여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동지들은 한날한시에 영생의 언덕에 함께 올라섰으며 조국해방의 민족사적대업이 성취된지 80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조선혁명의 첫 세대로서 후대들의 기억속에 영생하고있다.

네명의 투사들이 가르쳐주는 신념의 메아리, 진정 그것은 조선혁명이 바야흐로 새로운 높은 단계에 들어선 오늘의 중대한 시기에 우리 세대 누구나 다시금 똑똑히 새기고 반드시 실천에 옮겨야 할 혁명의 진리, 인생의 철리이다.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혁명전사이다!》

 

한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든, 열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든, 천고의 밀림속에서 원쑤들과 싸우던 이야기를 하든, 철창속에서 모진 악형을 이겨내던 이야기를 하든 항일혁명투사들의 투쟁과정은 어느것이나 신념에 대한 이야기로 관통되여있다.

그것은 혁명이자 곧 신념이며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의 전 로정이 한치한치 피로써 헤쳐나가야 하는 길, 투철한 혁명신념이 없이는 절대로 끝까지 갈수 없는 길이였기때문이다.

투철한 신념에는 억센 뿌리가 있다.그 뿌리는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다.혁명투쟁을 이끄는 수령의 위대한 사상에 대한 숭배이고 수령께서 지니신 비범한 천품과 고결한 인간적풍모에 대한 매혹이며 수령을 따르는 길에 혁명의 승리가 있고 후손만대의 행복이 담보된다는 확신이다.

조국해방의 날을 불과 다섯달 앞두고 희생된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동지들이 지녔던 혁명신념이 바로 그런 억척같은 신념이였다.

네명의 투사들, 그들중에는 고학으로 중학교를 다니다가 《불온분자》로 지목되여 퇴학당한 사람도 있었고 머슴살이를 하면서 자습으로 피타게 지식을 습득한 노력가도 있었으며 혁명군에 참군하여 체계적으로 성장하며 여러가지 직무를 력임해온 지휘관도 있었다.지어 엄중한 과오를 범하고 강직되였다가 다시 중요한 직무를 맡은 사람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명령을 받고 조선인민혁명군 지하정치공작원으로 파견되기 전까지 그들의 직무와 신분은 각이했다.주력부대의 선전과장, 그후 조직과장, 장백현 20도구 신흥촌 촌장 겸 야학선생, 주력부대의 사무장(오늘의 사관장), 전 7련대 정치위원,

그러나 네명의 투사들이 지닌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위대한 수령님의 가까이에서 직접적인 가르치심을 받으면서 성장한 나날은 불과 1년안팎이였지만 일제가 조작한 《혜산사건》과 그후 련이은 검거선풍으로 원쑤들에게 체포된 후의 6~8년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모진 고문과 회유 지어 죽음앞에서도 혁명적지조를 끝까지 지켜싸웠다는것이다.그 공통점의 뿌리는 다름아닌 혁명신념, 사령관동지만 계시면 혁명은 반드시 승리하고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은 이룩된다는 필승의 신심, 자기를 혁명가로 안아키워준 수령의 사랑과 믿음에 목숨바쳐 보답하겠다는 숭고한 도덕의리에 기초한 투철한 자각과 의지였다.

《나를 낳아준 조국은 어머니이고 혁명투쟁에서 나를 가르쳐주고 길러준 사령관동지는 나의 스승이며 어버이이시다.나는 일편단심 사령관동지께 충성을 다하리라.》

김일성장군님이 계시는 사령부는 조선을 독립시키는 혁명의 심장이요.우리는 그이의 … 팔과 다리가 되여 그이를 받들며 철석같이 보위하여야 하오.이 정신만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목숨을 바쳐 고수하여야 하오.》

권영벽동지가 삶의 좌우명처럼 간직한 이 말이 곧 그의 혁명신조이고 신념의 뿌리였다.

김일성장군님은 우리 조국의 운명, 우리 혁명의 운명이시오.장군님께서 계셔야 우리 조선사람들이 왜놈들을 때려부시고 나라를 찾을수 있고 근로인민이 주인된 새 나라를 일떠세울수 있소.그래서 유격대원들은 장군님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청춘도 생명도 기꺼이 바치는거요.》

사령관동지의 신변안전을 위해 자기 집에 오신분이 김일성장군님이시라는것을 신흥촌부녀회 회장이였던 안해에게조차 숨기였던 리제순동지가 후날 어쩌면 그럴수 있는가고 항의하는 안해에게 한 이 말속에 혁명전사의 삶이 무엇을 위해 필요한가 하는 해답이 있다.

걸음걸음 총검의 숲을 헤쳐야 하는 극악한 조건에서도 사령관동지의 국내진출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두만강연안을 메주밟듯 오르내리며 진출로정과 도강장소, 회의장소확정에 온갖 정력을 기울인 리동걸동지의 가슴속에도, 우리도 사진기가 한대 있기는 있어야겠다고 조용히 하시는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주력부대의 사무장인 자기에게 직접 주신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끝끝내 사진기를 구하여 사랑하는 유격대원들의 모습을 사진화폭으로 남기고싶어하신 사령관동지의 소원을 풀어드리고 빨찌산시절의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사진문헌을 항일혁명사의 고귀한 유산으로 남기는 커다란 공적을 세운 지태환동지의 가슴속에도 바로 이런 신념의 뿌리가 간직되여있었다.

사령관동지를 몸가까이 모시고 그이의 슬하에서 보낸 영광의 순간들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멀리 떨어져있어도, 가까이에 있어도 나는 항상 김일성장군님의 혁명전사이다.혁명을 하다가 이 몸이 쓰러진대도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에 목숨바쳐 보답하리라!

이 신념의 뿌리가 그들을 불굴의 투사로 성장시킨 자양분이였다.

하강구의 7도구로부터 상강구의 25도구에 이르는 수백리의 로정을 한달에도 몇차례씩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당소조들과 조국광복회 지회, 분회들을 조직한 권영벽동지가 보천보전투를 위한 적후정찰임무를 수행한 후에 스스로 그 전투에 참가할것을 열렬히 제기한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치달아오르던 1937년에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에서 백주에 수백명을 동원하여 5.1절의 반일반만시위를 하도록 조직했으며 보천보전투승리후 신흥촌부녀회 성원들을 현지에 파견하여 인민들의 여론을 수집하여 사령부에 보고한 리제순동지의 창발성의 밑바탕에는 과연 무엇이 깔려있는가.

주력부대 사무장의 중임을 맡아한 후에도 《혜산사건》으로 초래된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죽음의 고비를 무수히 넘나들며 낮과 밤이 따로없이 주구청산과 원호물자마련, 군사정보수집 등 눈부신 활동을 벌리면서 파괴된 조직들을 수습해나간 지태환동지와 청봉밀영의 정치책임자로서 엄중한 과오를 범하였으나 사령관동지의 한량없는 사랑속에 엄한 처벌을 면했을 때 사령관동지께 좀더 무거운 책벌을 받고싶다고, 자기를 가장 위험한 곳에 보내달라고 스스로 제기하고 과감한 투쟁을 전개한 리동걸동지의 행동을 통하여 우리가 느끼는것은 무엇인가.

조선혁명을 보위하고 수령의 명령관철을 위함이라면 스스로 적진속에도 주저없이 뛰여들고 필요하다면 생명도 아낌없이 내댄 투신력, 그것은 바로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 기초한 신념으로부터 우러나온것이라는것이다.

그들 매 사람의 직책상임무는 각이했어도 네명의 투사들에게는 언제나 인생의 가장 큰 영광으로 자부하는 꼭같은 하나의 직무가 있었다.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혁명전사이다!

이것은 사령관동지만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신념으로 그들이 받아안은 꼭같은 직무였다.

김일성장군님의 혁명전사, 네명의 투사들만이 아니라 주작봉마루에서 영생하는 항일혁명투사들모두가 이 하나의 직무로 불리우고있다.

오늘 우리는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령도따라 사회주의의 전면적발전을 앞당기기 위한 거창한 투쟁을 벌리고있으며 그이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보다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도약해야 할 중대한 전환의 시기에 살고있다.

오늘의 시대는 수령께서 바라신다면 생눈길과 진창길도 앞장에서 헤치고 사지판에도 주저없이 뛰여들며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도 응당 자기자신이 해야 할 과업으로 간주하고 스스로 맡아 끝까지 해제끼는 그런 신념의 강자들을 절실히 요구한다.

이 땅에 태를 묻은 사람들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물어보라.나는 지금 수령의 혁명전사라는 부름을 가장 큰 긍지로, 영광으로 간직하고 투쟁한 항일혁명투사들의 그 억척불변의 신념으로 살고있는가를.

 

《우리는 일심동체!》

 

누구에게나 자기의 신념과 지조를 검증받을 그런 시각이 언젠가는 있기마련이다.

네명의 투사들은 피비린내나는 원쑤들의 감옥에서 자신들의 신념을 립증하였다.

쇠고랑을 차고 독감방에 갇힌 그때부터, 적들로부터 끊임없이 전향을 강요당하는 그 순간부터 신념과 배신의 싸움이 시작된다.

산에서 싸울 때에는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기아와 추위, 전투에서의 희생으로 오는 상실과 아픔은 있어도 자유로운 몸이였고 전우들도 곁에 있었다.

그러나 감옥에서는 사정이 달랐다.누가 보는이 없고 통제하는이도 없고 더우기는 그처럼 믿고 따르는 사령관동지의 가르치심도 받을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매일같이 일제교형리들에 의해 살이 찢기고 손톱을 뽑히우고 뼈가 부서지는 고문을 당해야 하는 끔찍한 하루하루는 산에서 투쟁할 때의 백날, 천날맞잡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혜산사건》은 매개 사람들이 지니고있는 혁명에 대한 충실성과 신념과 의지의 강도를 검증하는 일대 시련이였다고 할수 있다고, 이 사건은 진짜혁명가와 가짜혁명가를 가르는 하나의 엄혹한 검열과정이였다고 하시면서 신념과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혁명가로서의 절개를 지켜 원쑤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였고 반대로 신념과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혁명가로서의 존엄을 버리고 배신과 굴종의 길에 떨어졌다고 쓰시였다.

천고밀림의 설한풍속에서 인간이 겪을수 있는 온갖 곤난은 가까스로 견디여냈을지언정 형장에서의 고문만은 이겨내지 못하고 혁명가로서의 체면과 지조를 버린 변절자들에게는 맞아죽을 각오가 없었다.

굶어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와 함께 맞아죽을 각오까지 되여있는 그런 신념이라야 공고한 기초우에 선 신념이라고 할수 있다.

신념의 진가는 어디서 더 잘 검증되는가.혁명가의 지조는 어떻게 낱낱이 검증되는가.그것은 철창속에서, 모진 악형을 꿋꿋이 견디여내는데서 검증된다.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동지들은 그저 견디여낸것이 아니라 한마음한뜻으로 뭉쳐 철창속에서도 싸운 견결하고 참된 투사들이였다.

옥중투쟁이란 무엇인가.그럭저럭 감옥에서 목숨이나 연장하는것이 감옥살이라면 혁명가의 신념을 지켜 죽음도 맞받아 투쟁하는것은 김일성장군님께 충직한 혁명전사의 옥중투쟁이다.우리는 여기서 감옥살이가 아니라 옥중투쟁을 해야 한다.

이런 비상한 의지로 그들은 일심동체가 되여 옥중에서도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다.

보통사람들같으면 누구나 자기의 목숨부터 생각했겠지만 투사들은 사령부의 안전, 사령관동지께서 주신 명령관철, 다른 혁명동지들을 구출하는 문제만을 두고 고심했다.사령부의 안전과 조직의 운명을 앞에 놓고 자기의 목숨을 뒤에 놓는다는것은 오직 신념의 강자들만이 할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고 비장한 결심이였다.

《모든것을 부인하라.놈들은 아직 조직의 내막을 모르고있다.목숨으로 혁명과 조직의 비밀을 지키자.》

이것은 혜산경찰서에서 옥중투쟁을 처음 시작할 때 권영벽동지가 다른 동지들에게 보낸 통방신호였다.

그러나 그후 변절자의 너절한 배신행위로 조직의 비밀이 적지 않게 탄로나게 되자 권영벽동지는 혁명조직들이 당할수 있는 피해를 최대한으로 막아보려고 리제순동지에게 《모든것을 나에게 밀것!》이라는 백글쪽지를 보내였다.그의 의도와 결심을 알아차린 리제순동지는 지체없이 《우리는 일심동체!》라는 회답쪽지를 보냈다.

손톱으로 한자한자 쪼아박은 백글쪽지의 그 글자들을 정녕 무심히 대할수 없다.그것은 선혈로 쓴 신념의 맹세나 같은것이다.

김일성장군님을 옹위하는 길에서, 장군님께 다진 전사의 맹세를 지키는 길에서 오직 한모습으로 투쟁하겠다는 신념의 분출이였다.

함흥형무소로 압송될 때 자동차에서 권영벽동지의 선창에 따라 투사들모두가 함께 부른 《적기가》의 힘찬 합창, 그것은 적들을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하고 인민들에게 신심을 안겨준 일심동체의 우렁찬 메아리였다.

공판장들에서도 하나의 목소리로 일제의 죄행을 단죄하는 그들의 폭탄선언은 적들을 당황망조케 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자기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혁명가들이다.이러한 숭고한 리념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죄는 우리에게 있는것이 아니라 남의 나라를 강점하고 주인행세를 하는 바로 너희들에게 있다.그렇기때문에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너희들 일본제국주의자들을 구축하기 위하여 계속 싸울것이며 제국주의는 반드시 공산주의에 의하여 소멸될것이다.…》

네명의 투사들은 철창속에서도 다른 수감자들에게 혁명가요를 배워주었고 못을 얻어 감방의 벽과 문기둥들에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한자한자 새겨놓았으며 《조선혁명 만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의 글발도 새기였다.

감옥속의 그 누가 언제, 어느때 보아도 좋다.만약 우리 사람이라면 혁명의 숨결과 투지를 느끼며 고무를 받을것이고 적들이 보면 공포를 느낄것이 아닌가.원쑤들은 질겁하라! 이렇게 그들은 감옥을 수감자들을 각성시키고 적들을 벌벌 떨게 하는 혁명의 학교로 만들었다.

옳다고 믿는것만으로는 신념이 아니다.모진 고문에도 굴함없이 일심동체가 되여 옥중투쟁을 벌린 투사들의 그 불굴의 기개와 정신이야말로 진짜혁명가의 신념이다.신념이 굳센 사람에게 옥중투쟁은 있어도 감옥살이는 있을수 없는것이다.

그들은 일심동체의 위력으로 사령부의 안전을 굳건히 지켜냈고 혁명조직이 당할수 있는 피해를 최대한 막았으며 조국해방을 향해가는 승리의 계단들을 자기들의 피와 목숨으로 하나하나 만들어놓았다.

과연 그 무엇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6~8년간 각기 독감방에 갇혀있은 그들을 일심동체로 단합시켰는가.

신념이였다.오직 자기의 수령만을 굳게 믿고 수령이 이끄는 혁명위업에 무한히 충실하겠다는 그 불굴의 신념은 두터운 감방벽도 뚫고 철창들도 날아넘으며 투사들모두를 하나의 사상의지로 단합시켜 《적기가》의 구절처럼 투쟁하게 한 무서운 힘이였다.

오늘날에도 《오너라 감옥아 단두대야 이것이 고별의 노래란다》라고 《적기가》를 너무도 쉽게 부르는 사람은 많다.그러나 우리에게 일제식민지통치시기와 같은 저주로운 감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렇듯 가혹한 정신육체적고통을 주는 물리적수단과 환경이 없다고 하여 혁명신념을 검증할 정황이나 계기가 따로 없는것은 아니다.

이 땅에 나서자란 새세대라면 응당 자기의 량심에 물어보아야 한다.당이 부르는 어렵고 힘든 초소로 용약 달려나가야 하는 시각에 자기 하나의 안락을 위해 몸을 사린적은 없었는가, 그 누구의 눈길도 미치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자기를 희생해야 하는 운명적인 선택을 앞두고 동요하며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한적은 없었는가를.

그런 때에 뒤걸음치는것부터가 변절과 배신에로 가는 첫걸음이다.당과 국가의 고민과 고충을 풀기 위해 서슴없이 한몸을 내댈 대신 개인주의와 리기주의에 중독되여 저 하나의 리익을 챙기며 보신의 갑속에 웅크리는것은 원쑤가 내흔드는 전향서에 지장을 찍는것이나 같다.

수령의 뜻을 따르고 받드는 길에서 일심동체가 되는가 그렇지 못한가, 앞에서도 옆에서도 뒤에서도 지어 절해고도에서도 한모습으로 사는가 마는가는 다름아닌 신념이 결정한다.

누구나 철창속에서도 일심동체가 되여 혁명적지조를 지켜싸운 투사들의 숭고한 정신세계에 자기를 비추어보며 오늘의 전구마다에서 자기의 신념을 과감한 실천행동으로 증명하자.

 

최후의 순간에도 미래를 내다보았다

 

사람에게는 생이 한번밖에 차례지지 않는다.그처럼 귀중한 생을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고싶은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체포될 당시 권영벽동지의 나이는 28살, 리제순동지의 나이는 27살, 리동걸동지의 나이는 30살, 지태환동지의 나이는 35살이였다.

그들이야말로 산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더 많은 20대, 30대의 혈기왕성한 사나이들이였다.그들이라고 어찌 따뜻한 제집 아래목과 부모처자가 그립지 않으며 생을 오래오래 즐기고싶지 않았으랴.하다면 무엇때문에 그들은 최후의 마지막유혹까지도 꿋꿋이 물리치고 죽음의 길을 택했는가.

사람들이여, 주작봉마루에 나란히 서있는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라.한번뿐인 생이 아깝지 않았는가, 넘치는 젊음이 땅속에 너무도 빨리 묻히는것이 아쉽지 않았는가고.

그러면 투사들은 이렇게 대답할것이다.아까왔다.하지만 원쑤놈들에게 전향하여 개처럼 사는 천날, 만날보다 생을 마감짓는 그 한순간마저도 김일성장군님의 혁명전사답게 떳떳이 총화지어야 하겠기에 유감없이 죽음을 택했다고.

최후의 순간이 곧 그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말이 있다.혁명가의 신념은 수령의 사상과 령도를 받들어 혁명의 첫걸음을 내짚을 때에도, 감옥에서 모진 악형을 당할 때에도 검증되지만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 최종적으로 검증되는 법이다.

적들은 1941년 8월 당시 함흥지방법원 공판장에서 《혜산사건판결서》로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동지를 비롯한 6명에게 이미 사형판결을 내렸었다.

판결을 내리고도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또다시 이감하면서 형집행을 몇해동안 더 끈데는 적들의 음흉한 술책이 있었다.놈들의 기본목적은 사형수가 된 그들의 심리를 부단히 압박하고 자극시켜 종당에는 전향에로 유도하자는것이였다.

그러나 적들의 어리석은 잔꾀가 통할리 만무하였다.

네명의 투사들은 1945년 3월 10일 적들이 오늘은 우리 일본 황군의 륙군절이다, 당신들이 이제라도 전향을 하면 사형을 면할수 있다고 마지막으로 회유할 때에도 단호히 물리쳤다.

최후를 앞두고 그들 매 사람이 남긴 말은 억만금의 무게를 가진다.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사업을 검토해야 하오.내가 혁명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바로 이것이 혁명가인 우리들의 임무요.》

권영벽동지는 혁명가로서의 한생을 이렇게 총화짓는것과 함께 감방에 있던 청년이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되였을 때 그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당부했다.

《조국은 멀지 않아 해방될거요.해방된 조국! 생각해보오.우리 나라가 해방된다는것을.생각만 해도 나는 숨이 가쁘도록 흥분되오.조국의 해방을 위해 얼마나 많은 투사들이 자기의 귀중한 청춘을 바쳤소? 이 땅에서 생을 받고 태여난 사람으로서 그 휘황한 해방의 날을 앉아서 맞을수는 없소.학생도 힘차게 싸워야 하오.》

권영벽동지는 또한 감방에 남아있는 동지들에게는 이런 부탁도 남겼다.

《나는 이 세상에 아들 하나를 남기고 간다.나한테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아들이 자라서 아버지가 하던 일을 계속해달라는것이다.》

리제순동지가 최후를 앞두고 감옥에서 지은 시는 또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격정에 젖어들게 하는것인가.

《청사초롱에 불밝혀라 그리운 장군의 모습 다시 보자…》

사형장에 나가기 전에 리제순동지는 장군님을 우러러 이렇게 아뢰이였다.

《장군님! 저는 잠시후 사형장에 나갑니다.그렇다고 저의 투쟁이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저에게는 아직도 공산주의자가 어떻게 죽음을 타승하는가를 놈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어야 할 무거운 임무가 남아있습니다.저는 장군님께서 키워주신 공산주의자답게 이 마지막임무도 영예롭게 수행할것입니다.죽음을 앞에 둔 저의 눈에는 조국의 앞날이 보입니다.장군님 령도밑에 활짝 꽃필 조국의 미래가 똑똑히 보입니다.장군님! 부디부디 안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말은 옥중의 투사들의 신념을 대표하여 올린 그의 마지막보고였다.

사형판결을 받은 다음에도 절망이나 비관에 빠지지 않고 조국의 찬란한 미래, 세계의 광명한 미래를 끝없이 그려보며 안해에게 사식 대신 세계지도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던 리제순동지는 마지막편지에 이런 글도 남겼다.

《사랑하는 안해에게…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바로 김일성장군님의 전사였다는것과 또한 그이의 위대한 풍모에 대해서 당신이 알고있는 모든것을 다 이야기해주오.그들이 자기 아버지가 무엇을 위해서 싸우다 어떻게 죽었는가를 잘 알게 되면 그들도 반드시 김일성장군님의 충직한 전사가 될것이요.》

리동걸동지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원쑤놈들을 전률케 하였다.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혁명전사다.장군님의 위대한 령도를 받들고 조선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조선의 아들이다.…비록 네놈들이 오늘은 나를 죽일수 있어도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를 받는… 우리 인민을 다 없애지는 못할것이며 우리 한사람한사람의 죽음은 수천수만의 새로운 혁명가들을 낳을것이다.…김일성장군 만세! 조선혁명 만세!》

사령관동지를 위해, 혁명동지들을 위해 사진기를 구해왔어도 산에서 싸울 때 언제한번 자기의 사진을 찍겠다고 나서지 않았던 지태환동지는 태연하게 웃으며 웨쳤다.

《나는 일제놈들에게서 피값을 다 받아냈다.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동이 밝아온다.김일성장군 만세! 조선혁명 만세!》

일제교형리들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굴하지 않은 그들의 당당한 모습에 전률하지 않을수 없었다.실로 그들 한사람한사람은 원쑤들에게 있어서 한개 사단, 한개 군단이상으로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뻔히 패망이 박두했다는것을 알면서도 투사들의 육체적생명이라도 빼앗아 불안과 공포로 떠는 제놈들을 위안하자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수천수만의 혁명가들이 불패의 력량으로 더더욱 장성강화되는것을 조금이라도 지체시키자고 원쑤들은 끝끝내 네명의 투사들에 대한 사형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교수대에서 투사들의 육체적생명은 빼앗을수 있었어도 그들의 신념만은 꺾을수도 허물수도 없었다.

최후의 순간에도 사령관동지의 안녕을 축원한 그 순결한 량심에, 죽음도 원쑤와의 마지막싸움으로 여기며 웃으며 맞받아나간 그 백절불굴의 신념에, 조국해방의 밝은 래일과 후손들의 행복을 확신성있게 그려본 그 락관의 정신에 정녕 머리가 숙어진다.

1945년 3월 10일은 원쑤들의 교수대에서 네명의 투사가 희생된 날이다.허나 최후를 마치였다고 하여 과연 그들의 생이 끝났던가.아니다.그 순간부터 그들은 불굴의 혁명신념으로 영생하고있다.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죽음도 이기는 힘은 공산주의자에게 있다.그 힘이 바로 신념이다.그들은 불굴의 혁명신념으로 최후의 순간에도 눈부신 미래를 내다본 조선의 훌륭한 아들들, 참된 공산주의자의 전형들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찾으신 날에 권영벽, 리제순, 리동걸, 지태환동무들은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그들의 혁명정신과 공적은 우리 조국청사에 영원히 남아있을것이라고 뜨겁게 추억하시였다.

신념은 그렇듯 평범하던 사람들도 불굴의 투사로 자라나게 하여 인생의 값높은 영광과 영생을 안겨준다.

 

* *

 

철창밖에서도 철창속에서도 신념이 같았고 지어 최후의 죽음도 함께 맞이하고 영생의 언덕에도 꼭같이 오른 네명의 투사들은 백두산대학의 신념의 교사가 되여 오늘도 새세대들에게 한목소리로 가르치고있다.

수령의 품속에서 하루를 배웠든 10년동안 가르치심을 받았든, 멀리에 있든 가까이에 있든 단 한순간도 수령과 자기의 운명을 떼여놓을수 없는 명줄로 간직하는 마음, 혁명가로 키워주고 내세워준 수령의 은혜를 목숨바쳐 갚겠다는 투철한 신념을 지녀야 한다.신념이자 곧 혁명이고 신념을 지키는 사람이 참된 혁명가이다.신념을 지키는 길에 인생의 영광도, 값높은 영생도 있다.

이 땅의 새세대들이여, 우리 후손들을 지켜보며 가르치는 투사들의 이 신념의 강의를 비문에 글자를 쪼아박듯 가슴에 새기고 앞으로 800년, 8 000년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열백번 바뀌여도 그 불굴의 신념으로 투쟁해나가자.

위대한 김정은시대를 더욱 빛내이는 거창한 창조대전의 전구들은, 우리들이 지켜선 혁명초소들은 매 각자의 신념을 검증하는 엄격한 시험장이다.

그가 누구이든 이 땅에 태를 묻고 자란 사람이라면 항일선렬들의 피가 스미고 넋이 깃들어있는 조국땅 방방곡곡에서 투사들이 그려본 더 아름답고 휘황한 래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소중한 창조물들을 끊임없이, 더 많이 일떠세우자.

그리고 투사들에게 단 한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떳떳한 자욱자욱을 값있게 하나둘 새길적마다 주작봉마루에 올라 영생의 모습으로 서있는 그들앞에 삼가 인사드리며 굳게 맹세다지자.

항일빨찌산의 후손답게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 영원히 신념의 한길을 줄기차게 이어가겠다고.(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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