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사랑, 조국의 숨결이 애국의 자양분이였습니다》 -한 총련일군의 딸이 쓴 수기중에서-

2025년 4월 27일《로동신문》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주체와 애국으로 자랑높은 총련과 재일동포들의 열렬한 조국애, 민족애의 력사는 승리와 영광으로 가득찬 우리 공화국의 어제와 오늘, 광명한 래일과 더불어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것입니다.》

재일조선인운동사의 갈피마다에는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애국위업의 강화발전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친 총련일군들의 값높은 생의 자욱이 수놓아져있다.

총련이 형언할수 없는 고난속에서도 좌절을 모르고 승리와 영광만을 수놓을수 있은것은 이런 애국자들이 많았기때문이다.

한 총련일군의 딸이 쓴 수기를 통하여서도 그들의 고결한 인생관을 느낄수 있다.

 

* *

 

김숙희녀성은 때없이 한장의 색날은 사진을 들여다본다.비록 손바닥만한것이지만 볼 때마다 하많은 추억이 밀물쳐와 감회를 금할수 없다.사진에는 애기차를 탄 어린애가 공화국기를 손에 들고 인파에 묻혀있는 모습이 찍혀있다.두살때의 그이다.

때는 1960년대초, 장소는 조국에서 온 귀국선이 정박해있는 일본의 니이가다항이다.분명 이역땅의 한 부분이지만 항구는 환희에 넘친 조선사람들로 흥성거리고있었다.동포들은 천대와 학대속에 구부러졌던 허리를 환생의 기쁨으로 곧게 펴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만시름을 가시고 덩실덩실 추는 그들의 춤가락에 검푸른 파도도 넘실넘실 호응하는듯싶었다.

어린 숙희는 그때 그 광경의 의미를, 자기가 손에 든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리 없었다.자라면서 사연을 알게 되였다.

그의 아버지 김순흠은 총련중앙상임위원회에서 사업하였다.총련의 첫 세대 일군이였다.애국사업으로 밤낮없이 뛰여다니느라 딸이 태여난것도 뒤늦게 알게 되였다고 한다.숙희라는 이름은 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일군들이 지어준것이다.

멀리 출장길에 있던 아버지가 금옥같은 딸에게 보내준것은 장난감이 아니라 공화국기발이였다.

그는 안해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고 한다.

《숙희의 가슴속에 애국의 넋을 심어줍시다.자랑스러운 우리 국기를 소중히 안고 살게 합시다.…》

당시 애국운동은 한창 고조되고있었다.

동해의 파도너머로 들려오는 조국의 자랑찬 소식, 민족의 존엄을 온 세계에 떨쳐가는 사회주의조국의 드높은 숨결은 숙희의 아버지를 비롯한 총련일군들에게 있어서 투쟁의 활력소였다.

아버지는 늘 바빴다.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가는지 알수 없었다.

이런 총련일군들을 동포들은 무한히 존경하고 따랐다.

숙희가 학교갈 나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머니는 기쁨도 컸지만 걱정도 많았다.집세를 물고나면 얼마 남지 않는 돈으로 학생복과 학용품 등을 마련해야 하였기때문이다.어느 총련일군가정이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애국사업을 하느라 수고하는분들에게 무엇을 아끼겠는가고 하면서 동포들이 도와나섰다.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나직이 말하였다.

《아버지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지는구나.조국의 믿음, 동포들의 기대에 보답해야겠는데.숙희야, 공화국기가 펄펄 휘날리는 우리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거라.꼭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숙희가 입학한 총련 도꾜조선제1초중급학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있는 곳에 위치하고있는데 동포자녀들이 줄지어 씩씩하게 학교로 가는 광경은 총련기록영화에도 수록되였다.

첫 등교를 하는 날 숙희의 마음은 마냥 날아갈듯하였다.은정어린 교육원조비로 훌륭히 꾸려진 학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20주년기념칭호를 받은 학교, 조국에서 보내준 민족악기를 처음으로 받은 학교 등 자랑이 많았기때문이다.

교실에 들어설 때마다 원수님의 사진은 언제 봐도 기뻐요 우리들이 어느때나 보고싶은 원수님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숙희네는 어버이수령님의 초상화를 우러러 삼가 인사드리군 하였다.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조국의 사랑이 얼마나 따사로운지, 왜 아버지를 비롯한 총련일군들이 애국사업에 그토록 헌신적인지 숙희는 다소나마 알게 되였다.

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되여 숙희는 조국에서 이역의 학생소년들에게 보내준 왕밤을 한아름 받아안게 되였다.

조국의 향취를 한껏 느끼라는 사려깊은 뜻이 어려있는 열매였다.

왕밤이 가득찬 가방을 멘 소녀는 동네동포들에게 《조국에서 왕밤을 보내왔어요!》라고 웨치며 나는듯이 집으로 달려갔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딸에게 갈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직 조국의 형편은 어렵다.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이역의 동포자녀들을 위해 이토록 마음쓰고있구나.너희들이 언제나 조국을 잊지 않고 조선사람으로 당당히 살아가라는것이다.이 사랑, 이 기대를 늘 가슴에 새겨야 한다.》

어느날 집으로 돌아온 숙희는 학교에서 배운 노래 《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워라》를 청아한 목소리로 불렀다.

노래를 마치고 무심히 뒤돌아보던 숙희는 그만 굳어졌다.언제 들어섰는지 자기의 노래를 들은것이 분명한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것이 아닌가.

언제인가 조국에서 총련일군들의 가정에 식료품과 옷감을 보내주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좋아라 환성을 올리는 자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렇게 눈시울을 적시였었지.

돈이 모든것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일본땅에서 조국을 마음속으로 우러르며 애국의 발걸음을 순간도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총련일군들이다.

자기들의 남모르는 수고를 속속들이 헤아려주는 조국의 사려깊은 은정이 너무도 고마와 아버지가 어깨를 들먹이였다는것을 숙희는 퍽 후날에야 알게 되였다.

숙희가 총련의 주요행사에 재일본조선소년단축하단 성원으로 뽑히였을 때였다.축하시랑송련습을 하면서 제일 난해한것이 바로 《주체적해외교포운동》이라는 말이였다.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딸의 초롱초롱한 눈을 들여다보며 아버지는 오랜 시간에 걸쳐 들려주었다.

암담한 세월 우리 동포들이 일본땅에 끌려오게 된 피눈물나는 사연으로부터 조국이 해방된 후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주체의 대로따라 보람찬 애국의 길을 걷게 된 이야기를.

어느날 숙희는 학급동무들과 함께 총련중앙회관을 구경하였다.회관은 도꾜 지요다구의 높은 둔덕에 위치하고있어 멀리서도 펄펄 휘날리는 공화국기를 확연하게 알아볼수 있었다.

회관을 돌아보던 숙희네는 조국에서 보내온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의 배분문제를 토의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그날 밤 딸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재일동포자녀들을 위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라는 동서고금에 없는 예산항목이 우리 공화국의 국가예산에 포함되게 된 사연에 대하여 눈물겹게 이야기해주었다.

황금만능의 자본주의일본땅에서 돈을 벌지 않고서는 생계조차 유지할수 없었지만 총련일군들은 돈벌이가 아니라 애국사업을 선택하였다.온갖 유혹과 협박을 물리치며 조국을 위해 묵묵히 일하였다.

늘 아침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군 하던 아버지가 하루는 가족사진을 찍자고 약속한적이 있다.

숙희는 신새벽부터 마음이 들떠 노상 시계만 쳐다보았다.그런데 야속하게도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제기된 중요한 사업때문에 자식들과 모처럼 한 약속을 지킬수 없었던것이다.목빠지게 기다리던 숙희의 남매는 그만 울상이 되였다.

사진을 찍으면서 숙희는 애꿎은 어머니에게 투정질하였다.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이라고 하지 않겠는가고.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숙희는 물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없나요?》

철없는 딸의 투정질에 한동안 묵묵해있던 아버지는 조용히 말하였다.

《조국은 우리 총련일군들에게 일본에 있는 조선사람들의 존엄과 운명을 맡기였다.그래서 아버지는 늘 동포들속에 들어가 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거란다.》

아버지가 자주 출장길에 있다나니 자식들과의 간격이 생겨나게 되였다.

이에 왼심을 쓰던 어머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당과류를 미리 장만해놓고 아버지가 돌아오면 슬쩍 손에 들려주군 하였다.

총련일군의 안해들은 누구보다도 걱정이 많았으며 부담도 컸다.

더우기 숙희의 어머니는 남편의 뒤바라지를 하느라 고생하는 속에서 녀성동맹사업도 하고 총련에서 처음으로 세운 유치원에서 원장사업까지 하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루는 퇴근시간이 훨씬 지났으나 어머니가 오지 않았다.숙희의 남매는 허기증을 달래면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런데 밤늦게 집에 들어선 어머니가 하는 말은 숙희를 아연케 하였다.

이제부터 매일 늦어지니 맏딸인 네가 구실을 잘하여 동생들을 돌봐주어야 한다는것이 아닌가.

그래서 또 투정질하였다.유치원아이들이 자기 자식들보다 더 중한가고.

하지만 동포들로부터 《우리 원장선생님》으로 존경받는 어머니를 보며 생각을 달리하게 되였다.

숙희의 부모는 총련일군자녀들은 화려한 생활을 부러워하지 말고 소박하고 검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늘 말하군 하였다.

딸이 등교할 때에는 물론이고 그 어디에 갈 때에도 무조건 조선치마저고리를 입도록 하였다.

깡패들의 란동이 무서워 그가 치마저고리를 입는것을 삼가하려 할 때 아버지는 준절하게 말하였다.

《우리는 조선사람이다.우리에게는 위대한 조국이 있다.무엇이 무서우냐.당당하게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거라.》

이것은 오래동안 총련일군으로, 교육자로 사업한 부모에 대한 김숙희녀성의 추억의 일부이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였지만 그는 애국의 길에서 언제나 변함없던 아버지를 비롯한 총련의 첫 세대 일군들의 모습을 잊을수 없어한다.

그리고 말한다.조국의 사랑, 조국의 숨결이 바로 애국의 자양분이였다고.

 

* *

 

인간에게 있어서 천만금의 재부보다 귀중한것은 믿고 의지할 운명의 품이다.

그 품이 있을 때 인간은 외롭지 않고 어떤 고난속에서도 비관을 모르며 긍지높고 떳떳한 삶을 누릴수 있다.

총련의 전세대 일군들이 바로 그렇게 살았고 오늘의 총련일군들도 그렇게 생을 이어가고있다.

황금만능이 지배하는 거치른 이역땅에서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성심과 열렬한 애국심을 지니고 재일조선인운동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헌신분투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총련이 그처럼 강하고 애국의 대가 굳건히 이어지고있는것이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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