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조일관계/朝日関係’ Category

재일동포들 일제과거범죄청산을 요구하여 초불투쟁 전개

주체110(2021)년 3월 6일 로동신문

 

3.1인민봉기 102돐을 계기로 재일동포들이 1일 일본 도꾜의 신쥬꾸역앞에서 일제의 과거범죄청산을 요구하는 초불집회를 가지였다.

일본의 평화애호적인 시민들도 여기에 합세하였다.

발언자들은 일본에서 3.1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집회를 가진것은 과거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지배라는 범죄를 용서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과시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였다.

일제식민지통치의 직접적피해자들이며 그 후손들인 재일조선학생들과 어린이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차별책동이 날로 로골화되고있다고 그들은 단죄하였다.

그들은 일본의 과거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고 조선학교차별책동철회를 위해 투쟁해나갈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조선반도의 긴장격화에 편승하여 《적기지공격능력》보유를 노리고있는 일본의 움직임은 《선제공격을 가능하게 하는 아주 위험한 행위》이라고 그들은 까밝혔다.

그들은 3.1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일본의 재침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에 떨쳐나설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집회참가자들은 《조선학교에 고등학교지원제도적용을!》 등의 프랑카드와 초불을 들고 일본의 과거범죄청산, 조선반도의 평화실현을 강력히 요구하였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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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절하고 고약한 민족배타주의적망동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주체110(2021)년 3월 3일 조선중앙통신

 

(평양 3월 3일발 조선중앙통신)

최근 일본의 지방재판소들이 고등학교무상화대상에서 조선학교들을 제외시킨 당국의 조치에 《적법》의 판결을 내리는짓을 감행하였다.

이것은 법적인 공정성을 상실하고 세계인권선언과 해당 국제법에 위반되는 행위인 동시에 일본반동들의 재일조선인배척과 민족교육탄압을 로골적으로 비호조장하는 너절한 행태이다.

자기 나라에 거주하고있는 외국인들에게 제 나라,제 민족의 말과 문화를 배우고 계승해나갈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해주는것은 일본정부가 비준한 국제인권규약에 명기되여있는 주요내용의 하나이다.

1948년에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에도 모든 사람은 법앞에서 평등하며 어떠한 차별도 없이 평등한 법적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밝혀져있다.

더우기 일제식민지통치의 직접적피해자들인 재일조선인들과 그 후손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온갖 조건을 마련해주는것은 가해자인 일본이 지닌 도덕적의무이며 책임이다.

그러나 일본반동들은 자국땅에 조선학교가 생겨난 첫날부터 그것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장장 수십년세월 갖은 박해를 다하다 못해 조선학교의 교육활동이 저들의 교육내용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터무니없이 걸고들면서 조선학교를 고등학교지원제도적용대상에서 제외시키는 폭거를 감행하였다.

오늘 일본반동들은 조선학교 학생들은 물론 천진란만한 유치반 어린이들에게까지 비렬한 민족차별정책을 실시하고있다.

당국의 이러한 민족배타주의적망동을 공공연히 정당화하는 일본재판기관들의 너절하고 고약한 처사는 우리 공화국과 우리의 존엄높은 합법적해외공민단체인 총련을 적대시하고 재일조선인들의 민족교육을 말살하려는 일본반동들의 악의에 찬 편견과 흉심이 얼마나 극도에 이르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죄악으로 가득찬 과거에 대해 사죄하고 반성할 대신 새로운 범죄를 덧쌓고있는 파렴치한들의 망동은 지금 전체 조선인민의 반일감정을 극도로 고조시키고있다.

일본반동들은 우리 인민의 격앙된 대일결산의지를 똑바로 알고 분별없이 날뛰지 말아야 한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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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강토를 피로 물들인 야만적인 탄압만행

주체110(2021)년 3월 1일 로동신문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

 

강도 일제를 반대하는 3.1인민봉기가 일어난 때로부터 102년이 되였다.

3.1인민봉기는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사에 자기의 뚜렷한 자욱을 남긴 전민족적반일항쟁으로서 오늘도 전체 조선인민의 기억속에 력력히 남아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조선에서 세계력사상 류례없는 잔인무도한 총독정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인민을 야만적방법으로 통치하였습니다.그들은 조선의 가는 곳마다에 군대, 헌병, 경찰을 비롯한 온갖 폭압기구들을 수많이 늘어놓고 조선인민의 초보적인 권리와 자유마저 모조리 빼앗았으며 우리 인민을 가혹하게 탄압학살하였습니다.》

3.1인민봉기는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애국투쟁이였다.그러나 일제는 우리 인민의 정의로운 항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하는 극악한 범죄적만행을 저질렀다.

우리는 3.1인민봉기때 일제가 감행한 반인륜범죄를 다시한번 온 세상에 폭로하기 위하여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실장 박사 부교수 위광남선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자:우선 3.1인민봉기가 어떻게 되여 일어났는가에 대하여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실장: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우리 인민의 반일투쟁을 말살하며 우리 나라에 대한 강점을 영구화하기 위하여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무단통치는 일제가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실시한 중세기적공포정치를 말한다.

일제는 이 기간 각종 폭압기구들과 《범죄즉결령》, 《조선형사령》, 《조선태형령》 을 비롯하여 각종 파쑈적인 악법들을 조작해냈으며 우리 인민의 사소한 반일운동이나 지어 학생들의 운동회까지 탄압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조선총독이였던 데라우찌가 《조선사람은 일본법률에 복종하든가 아니면 죽어야 한다.》는 망발을 서슴없이 늘어놓은것만 보아도 무단통치가 얼마나 극악하였는가를 잘 알수 있다.

더이상 참을수 없었던 우리 인민은 반일봉기에 떨쳐나섰다.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시작된 대중적인 독립시위투쟁을 첫 봉화로 하여 봉기는 전국적판도에로 급속히 번져졌다.

3.1인민봉기는 일제의 야만적인 무단통치하에서 모진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온 조선민족의 쌓이고쌓인 울분과 원한의 폭발로서 자주독립을 위한 우리 인민의 정의의 투쟁이였다.

기자:우리 인민의 거세찬 반일투쟁기운에 겁을 먹은 일제가 세상사람들을 경악케 하는 야수적인 방법으로 3.1인민봉기를 탄압하지 않았는가.

실장:3.1인민봉기는 평화적인 시위였다.

하지만 일제는 완전무장한 침략무력을 동원하였다.

평양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일제헌병과 경찰은 총출동하여 현장에서 평화적시위자들에 대한 폭행을 감행하였다.

많은 지역들에서 놈들은 총칼로 시위군중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기발을 흔들며 《조선독립 만세!》를 웨치던 나어린 한 녀학생의 바른팔을 칼로 잘랐으며 그가 왼손에 기발을 바꿔쥐고 만세를 부르자 왼팔마저 무자비하게 잘라버리였다.3월 3일 안주에서는 일본헌병대 40~50명이 총을 쏘고 검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죽이였다.당시의 실상에 대하여 어느 한 자료에는 《헌병대장이 검을 뽑아서 고수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그 부하로 하여금 총을 쏘게 하여 우리 군중이 총탄에 맞아 넘어진자가 50여명에 달하였다.》라고 기록되여있다.

시위가 벌어진 모든 지역에서 일제침략군과 헌병, 경찰들은 평화적시위군중에게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하였고 각종 흉기를 휘둘러 남녀로소 가림없이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하였다.

기자:일제가 《특별검거반》이라는것까지 조직하여 우리 인민들을 살륙하였다는 자료도 있지 않는가.

실장:일제는 《특별검거반》이라는것을 만들어가지고 시위현장에서만이 아니라 시위가 일어났던 지역의 마을들을 습격하여 애국적인민들에 대한 체포와 투옥, 잔인한 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제암리에서 감행된 학살만행이 대표적인 사건들중의 하나이다.

1919년 4월 중순 일제침략군 보병제79련대소속의 중위 아리다라는 놈은 11명의 살인마들을 끌고 제암리에 기여들어 마을사람들을 할 이야기가 있다고 꼬여냈다.그리고는 교회당에 가두어넣고 문을 페쇄한 다음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하였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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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심판받아야 할 죄악의 력사

주체110(2021)년 3월 1일 《우리 민족끼리》

 

요란한 말발굽소리와 자지러진 총소리, 칼을 휘두르는 소리 …

수많은 군중이 일제군경들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용감히 맞서싸운다.

그속에서 량팔은 일제의 군도에 의해 뭉청 잘리웠어도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일제군경들을 공포에 떨게 한 녀학생의 웨침소리가 들린다.

《조선독립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이것은 영화의 장면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02년전인 3월 1일 온 강토가 피로 물들여졌던 우리 나라에서 실지 있었던 일이다.

1919년 3. 1인민봉기는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온 민족이 일제에 대한 쌓이고쌓인 울분을 터뜨린 분노의 항거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항쟁이였다.

3. 1인민봉기를 통하여 조선인민은 결코 남의 노예로 되기를 원치 않는 인민이라는것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하지만 자기의 강토, 민족의 자주권, 인간의 참다운 삶에 대한 정당한 요구에 날강도 일제는 과연 어떻게 대답해나섰던가.

일제는 완전무장한 조선주둔군무력을 비롯한 헌병, 경찰, 소방대 등 폭압력량을 총동원하여 3. 1인민봉기를 무차별적으로 탄압해나섰으며 그것으로도 성차지 않아 본토의 병력까지 끌어들이였다. 놈들은 숱한 폭압력량을 봉기진압에 내몰면서 주저없이 총탄을 퍼부으라는 지시까지 내리였다.

총살하는것은 《흥미없는 일》이며 조선사람에게는 칼을 쓰는것도 아깝다고 하면서 팔다리를 네마리의 소나 말에 매여 채찍으로 내몰아 사지를 찢어 죽이거나 작두로 목과 팔다리를 잘라 나무에 매달아놓은것을 비롯하여 일제의 야만적인 행위를 일일이 꼽자면 끝이 없다.

3. 1인민봉기에 대한 야수적인 탄압은 강도적인 침략자이며 악독한 살인귀인 일제침략자들만이 감행할수 있는 특대형반인륜적, 반민족적죄악이다. 오죽했으면 일본의 한 어용학자까지도 《일본인들은 차마 볼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탄압에 광분하였다. 일본헌병의 포악성은 형언할수 없는바 그들은 늙은이와 부녀자, 어린이들까지 총검으로 찔러죽이고 목을 달아매여 죽였다.》고 개탄하였겠는가.

이처럼 력사에 류례없는 일제의 폭압에 의하여 불과 몇달사이에 10여만명의 조선사람들이 참혹하게 살륙당하고 삼천리강토는 피바다로 변하였다.

그때로부터 옹근 한세기가 넘었다. 그러나 령토팽창야망과 인간증오사상을 버리지 못한 일본반동들은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피비린 과거죄악에 대해 반성하고 응당 사죄와 배상을 할 대신 파렴치한 력사외곡과 조선반도재침책동에 의연히 매여달리고있다.

어떻게 하나 과거죄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배상을 모면해보려는 일본반동들의 파렴치성, 비인간성은 극도에 이르고있다.

전체 조선민족은 3. 1인민봉기를 야수적으로 탄압한것을 비롯하여 과거 일제가 우리 인민앞에 저지른 죄악의 력사를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며 반드시 그 대가를 청산하고야말것이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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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에 의한 위협공갈로 불평등조약을 강요한 죄악

주체110(2021)년 2월 27일 로동신문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우리 인민에게 온갖 불행과 고통을 들씌운 일제의 죄악에 찬 력사에는 무력에 의한 위협공갈로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강요한 범죄행위도 기록되여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 나라를 침략한 력사를 잊지 않고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45년전인 1876년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봉건정부를 강박하여 《강화도조약》을 조작하였다.

《강화도조약》은 《명치유신》후 호전적인 일본사무라이들이 들고나온 날강도적인 《정한외교》정책의 범죄적인 산물로서 그 직접적인 조작구실로 리용된것이 《운양》호사건이다.

1875년 8월(양력9월) 일본군함 《운양》호는 항행도중 먹는물을 얻는다는 명색밑에 아무런 통고도 없이 우리 나라의 령해인 강화도 초지진앞바다에 불법침입하여 파괴와 략탈을 일삼았다.이 사건은 일본이 무력침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도발한것이였다.

《운양》호의 강도적인 범죄행위는 조선군사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응당한 징벌을 받았다.

이를 구실로 일본은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화하기 위한데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일본정부는 《정한외교》정책의 변종인 《평화협상외교》정책을 내놓고 조선봉건정부에 예속적인 《수호통상조약》을 강요하기 위한 방안이라는것을 꾸미였다.그것은 첫째로 《운양》호사건의 모든 책임을 조선측에 넘겨씌워 《사죄》와 《배상》을 인정시킨다는것이며 둘째로 힘에 의한 위협과 공갈의 방법으로 조선측을 강박하고 《굴복》시킨다는것이였다.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서라도 기어이 조선을 침략하고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심은 조선봉건정부와의 협상과정에 더욱 적라라하게 드러났다.

일본은 《운양》호가 청나라로 항행하던 도중 포격을 받은 실상을 알아보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겠다는 문서를 조선봉건정부에 전달하겠다고 하면서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고 위협하였다.그리고 1876년에 포악무도하고 생트집을 거는데서 유명한 구로다를 우두머리로 한 대표단과 함대를 파견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강도적요구를 들이대는 한편 저들의 병력수를 과장하면서 조선봉건정부를 공공연히 위협공갈하였다.(전문 보기)

 

■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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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강도적인 문서로 조선강점의 발판을 마련한 만고죄악

주체110(2021)년 2월 23일 로동신문

 

지금으로부터 117년전 일제가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강점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려고 조선봉건정부에 강요한 침략적인 문건이 있다.그것이 바로 《한일의정서》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강점이 후안무치한 강도행위였다는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의정서라고 하면 국가들사이의 합의를 표시하는 문건의 하나로 알려져있다.의정서는 철두철미 국가들사이의 호상존중과 쌍방의 리익을 도모하는것을 전제로 하여 체결된다.

하지만 《한일의정서》는 이 원칙을 떠나 일제의 일방적인 폭력과 위협, 압력에 의하여 조작된 날강도적인 문서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렬강들의 움직임은 보다 강화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조선에 대한 군사적강점을 다그치기 위한 또 다른 강도적문서를 조작하려고 날뛰였다.

1903년 9월 일본외무대신은 조선봉건국가주재 자기 나라 공사에게 《일한간의 비밀조약에 관한 건》이라는 비밀지령을 주었다.

뒤이어 일본정부는 《각의》에서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통치하는것이 목적이지만 명목상으로는 《보호적인 조약》을 체결하는것이 가장 편리하다는 내용으로 된 《조선침략안》을 고안해냈다.

그러나 일제의 《의정서》조작책동은 조선봉건정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하여 일제는 로일전쟁의 도발과 함께 침략무력을 우리 나라에 대대적으로 들이밀었다.

일제는 1904년 2월초 미리 편성해놓았던 침략무력에 출동명령을 내리였다.이에 따라 일제의 침략무력은 사세보군항을 출발하였다.한성에 도착한 일본침략군선발대는 위협적인 군사적행동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일제의 파렴치하고 악랄한 침략행위에 대해 당시의 도서 《매천야록》은 이렇게 전하였다.

《왜군이 인천에서 한성에 들어온것이 병졸이 5만명이고 말이 1만여필로서 황궁과 관청, 지어는 일반살림집까지 점령하였으며 남방으로부터는 왜군이 동래를 거쳐 대구로 나아가고 남해를 거쳐 남원으로 나갔으며 군산을 거쳐 전주로 나아갔다.그리고 서로에는 평양, 삼화, 북로에는 원산, 성진에서 호상간의 거리를 수백리로 하여 점차… 나아갔다.》

이렇듯 수많은 침략무력을 끌어들인 일제는 조선봉건정부의 최고통치자와 관리들에 대한 위협공갈과 랍치 등을 감행하며 강압적인 《의정서》체결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였다.

고종황제가 《의정서》체결을 거부하여 피신할수 있다는것을 우려한 일제는 조선의 《황실과 령토보존》을 위한것이라고 떠벌이며 침략무력을 동원하여 황궁을 봉쇄하였다.이와 함께 일제는 《한일의정서》조작책동을 완강히 반대해나선 탁지부대신 겸 내장원경이였던 리용익, 륙군참장 리학균 등을 제거하기 위한 책동에도 집요하게 매여달리였다.결과 리용익은 일제에 의해 랍치당하여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였다.

1904년 2월 23일에 조작된 《한일의정서》는 일제의 끈질기고도 날강도적인 군사적폭압책동의 산물이였다.

《한일의정서》는 《보호》의 간판밑에 우리 나라의 자주권을 말살하고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기 위한 일제의 범죄적기도로 일관된 파렴치한 침략문서이다.

모두 6개 조항으로 된 《한일의정서》에는 《영원한 친선》이니, 《동양의 평화》이니, 조선의 《독립과 령토의 보존》이니 하는따위의 허울좋은 표현들이 들어가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것은 우리 인민을 노예화하고 우리 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흉심을 가리우기 위한 한갖 위장술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는 《의정서》에서 조선봉건정부가 일본정부의 《시정개선》에 관한 《충고》를 용납하고 일본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주어야 하며 일본군은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용할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조선의 내정에 공공연히 간섭하며 조선봉건정부를 저들의 침략전쟁수행을 위한 부속물로 만들고 우리 나라의 토지와 로력, 재물을 마음대로 강탈할수 있는 권한을 틀어쥐였다.또한 일제는 조선이 《의정서의 취지에 위반되는 협약을 제3국과 체결할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권까지도 심히 유린하였다.

이렇게 일제는 날강도적인 《한일의정서》조작을 통해 우리 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법적》구실을 마련하였다.그후 일제는 《한일의정서》를 기틀로 하여 1905년에는 《을사5조약》을, 1910년에는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하고 우리 나라를 저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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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문 : 일본의 독도강탈야망의 반동성

주체110(2021)년 2월 22일 《우리 민족강당》

 

령토강탈야망에 들뜬 일본반동들의 파렴치성이 극도에 달하고있다.

얼마전 일본은 독도의 령유권이 마치도 저들한데 있는것처럼 세계여론을 오도할 목적밑에 홈페지까지 개설하고 아무러한 타당성도 없는 자료라는것들을 들어가면서 독도강탈야망을 또다시 드러내놓았다.

최근에 들어와 우심해지는 일본반동들의 독도《령유권》론은 력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하나의 망설이며 가장 악랄한 령토강탈야망으로 일관된 반동적인 침략론리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독도는 그 누구도 침해할수 없는 우리 나라의 신성한 령토입니다.》

일본의 독도《령유권》강탈야망의 반동성은 첫째로, 그것이 조선에 대한 가장 악독한 식민지지배정책의 직접적산물이라는데 있다.

근대시기 일본의 해외침략의 첫 대상으로 된것은 조선이였으며 우리 나라는 20세기초에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독도문제는 바로 이러한 일본의 조선침략정책의 발현이다.

지금까지 일본이 들고나오는 독도《령유권》주장의 《신빙성》근거는 1905년 2월 22일에 발포한 《시마네현고시 제40호》이다.

《시마네현고시 제40호》가 조작공포된 전과정을 따져보면 그것이 철저히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의 한 고리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문제의 이 공문서가 조작되기 5년전인 1900년에 조선봉건정부는 근대법적요구에 기초한 법령(칙령 41호)으로 독도가 울릉도에 속한 우리 나라 령토임을 명백히 재확인하고 《관보》(정부기관지)에 그 내용을 공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이러한 사실을 고의적으로 외면하고 독도가 저들의 령토임을 주장하는 《시마네현고시 제40호》라는 낮은 급의 지방행정기관공시문을 발포하였다. 여기에는 그들나름의 음흉한 타산이 있었다.

이 시기 일제는 조선에 대한 독점적지배권을 둘러싸고 짜리로씨야세력과 정치군사적으로 첨예한 대립상태에 있었다. 이로부터의 출로가 짜리로씨야를 군사적으로 제압하는데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1904년 2월 8일 침략적인 로일전쟁을 도발하였으며 그해 2월 23일에는 조선봉건정부를 위협공갈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압적인 방법으로 체결하였다. 6개 조로 된 이 《협정》에서는 전쟁기간 일본군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우리 나라의 임의의 지역을 군용지로 사용할수 있다는것을 못박았으며 그러한 지점의 하나로서 울릉도, 독도도 지정되였다. 뒤이어 일제는 울릉도와 독도에 해군망루를 건설하며 독도주변에 해저전선을 늘여 조선반도 북부와 울릉도-독도-일본령토를 련결하는 전선망가설을 계획하였다.

이렇게 되여 당시까지 일본인들에게 어로적《가치》로만 인정되여오던 독도가 일약 군사적요충지로 되였으며 일제는 그 지정학적가치가 새롭게 부각된 독도를 아예 일본령토로 편입하려는 야망밑에 해군성, 외무성 등 여러 성들을 발동하여 탈취작전을 벌렸다.

교활한 일제는 독도탈취에 정부가 공개적으로 나서는 경우에 일어나게 될 국제적물의를 피하기 위하여 이미 독도수역에서 어업활동을 벌리고있던 민간인어로기업가를 추동하여 《어업독점권》을 신청하게 하고 그것을 농상무성, 해군성, 내무성, 외무성 등이 《심의》하도록 하였다. 1905년 1월 10일 그 《청원》을 접수한 일본내각은 같은 해 1월 28일 독도를 일본령토로 편입한다는것을 결정하고 2월 15일에는 내무대신《훈령》으로 시마네현지사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고 현내에 고시할것을 지시하였다. 이렇게 되여 1905년 2월 22일 《다께시마편입》에 대한 《시마네현고시 제40호》가 조작되였으며 오끼도로부터 서북쪽으로 85n.mile이나 상거하고있는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다는것과 섬을 《다께시마》로 부른다는것을 내용으로 하는 고시문이 《현보》에 게재되고 이 사실이 2월 24일부 《산잉신붕》에 자그마한 보도기사로 실렸다.

이러한 음모에 뒤이어 일본 해군성은 1905년 7월 25일 독도에서 망루설치작업을 시작하여 같은 해 8월 19일에 완성하고 6명의 인원까지 배치하였다. 또한 10월 8일에는 독도와 울릉도를 련결하는 해저전선을 늘이였으며 11월 9일에는 독도와 일본본토를 련결하는 해저선부설을 완료하였다. 이 모든것은 일제가 로일전쟁을 도발하고 우리 나라를 군사적으로 강점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였으며 국제사회계도 조선봉건정부도 전혀 모르게 진행된것이였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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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대국화를 노린 진부한 《위협》타령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주체110(2021)년 2월 19일 조선중앙통신

 

(평양 2월 19일발 조선중앙통신)

일본이 케케묵은 《위협》설을 또다시 늘어놓고있다.

얼마전 아이찌현에 위치한 륙상《자위대》의 가스가이주둔지에서 진행된 항공《자위대》의 《패트리오트》요격미싸일의 기동전개훈련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북조선의 탄도미싸일발사 등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것》이라고 떠들어댔다.

일본이 년초부터 지역나라들의 경계심과 우려를 자아내는 군사적망동을 벌려놓은것도 모자라 《북조선위협》타령을 해대며 감히 우리를 걸고드는데 대해 엄중시하지 않을수 없다.

《자위대》호전광들이 《북조선위협》설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며 위험천만한 군사적망동에 광분하는것은 일본사회에 반공화국대결의식을 고취하여 저들의 군사대국화책동의 명분을 마련하고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실현해보려는 흉심의 발로이다.

지금 일본정객들은 자국민심이 군사대국화야망실현에 장애물로 되고있는데 대해 불안을 금치 못하고있다.

이로부터 세력확장과 안보불안조성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군국주의해외팽창야망실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보려 하고있다.

지난해 수상 스가가 일본학술회의 새 회원으로 추천된 일부 학자들의 임명을 무작정 보류한것을 비롯하여 정부와 민간소속 단체들에 일본의 군국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입되는것을 극력 가로막고있으며 우리의 《위협》을 떠들며 군사연습을 대대적으로 감행하고있다.

그러나 그러한 책동들은 일본의 장래에 어두운 그늘만을 던지고있다.

《북조선위협》을 떠들며 증강된 《자위대》의 활동반경이 본토범위를 벗어나 전세계에로 확대되고 그 타격력이 방위수요를 초월한데 대해 일본인민들과 국제사회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있다.

이런 안팎의 분노가 일본에 어떤 화를 몰아오겠는지는 너무도 명백하다.

제반 사실은 렬도에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장본인,본토의 안전을 위협하는 당사자는 다름아닌 일본반동들이라는것을 실증해주고있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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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말살을 노린 일제의 만고죄악

주체110(2021)년 2월 6일 로동신문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

 

남포시계급교양관에는 식민지통치시기 일제침략자들이 온천군 원읍로동자구에 위치한 어느 한 산에 박아놓았던 쇠말뚝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이 쇠말뚝에도 우리 인민의 민족정신을 거세말살하려든 일제의 흉심이 비껴있다.

이것은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책동이 얼마나 악랄한가를 고발하는 력사의 증거물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본제국주의는 지난날 근 반세기동안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재난과 고통을 들씌운 피맺힌 원쑤입니다.》

지난 세기 전반기 일제는 우리 나라를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조선민족을 아예 말살하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주권유린행위, 민족말살책동은 시작부터 우리 인민의 거세찬 항거에 부딪쳤다.의병투쟁과 3.1인민봉기, 6.10만세시위투쟁 등 나라의 곳곳에서 반일투쟁들이 세차게 벌어졌다.일제의 총칼에 맞아 피흘리며 쓰러지면서도 우리 인민은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며 굴함없이 싸웠다.

군사적폭력에만 의거해서는 우리 인민의 독립의지와 반항심을 꺾을수 없다고 본 일제는 우리 민족의 기를 꺾고 넋을 짓밟아버리기 위한데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수많은 어용학자들을 내몰아 우리 나라의 력사와 문화, 전통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하던 일제는 조선사람들이 산을 매우 중시하고 명산들을 신성시하고있다는것과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짊어질 뛰여난 인재배출에 대한 념원을 산에 의탁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일제는 우리 나라의 모든 지맥을 살아있는 인체로 보고 그 지맥들에 쇠말뚝을 박으면 땅이 병들며 땅이 병들면 사람도 병들어 재앙이 따르게 된다고 떠벌이면서 우리 나라의 주요산들과 지점들에 쇠말뚝을 박아놓는 전대미문의 망동을 부리였다.

쇠말뚝은 조선민족의 정기를 꺾어버리기 위해 일제가 감행한 극악무도한 책동의 산물이다.

오늘의 온천군일대에 우리 민족이 창조한 민족유산들이 많다는것을 알게 된 왜놈들은 이곳의 력사유적과 유물들을 닥치는대로 도굴략탈하는 한편 산에 쇠말뚝을 박아놓았다.

쇠말뚝이 박힌 곳에서 100m정도 떨어진 언덕에는 일제가 쇠말뚝을 박으려고 구멍을 뚫고 류황을 부어넣은 자리도 있다.

세월은 많이 흘렀어도 일제가 남긴 극악한 죄악의 흔적은 이 땅의 곳곳에 남아있다.

2011년에도 개성지구의 송악산, 천마산(당시), 지네산에서도 일제가 우리 나라 강점시기에 박은 쇠말뚝들과 그것이 꽂혀있던 자리들이 발견되였다.료해과정에 모든 쇠말뚝의 절반부분이 세멘트와 류황으로 매몰되였다는것이 확증되였다.

1946년에 처형된 한 전범자의 고백자료에 의하면 일제는 우리 나라의 수백곳에 쇠말뚝을 박았다.

동서고금에 있어본적 없는 극악한 민족말살책동을 감행한 일제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악한이며 비렬하기 그지없는 날강도이다.

지금도 계속 발견되고있는 쇠말뚝들은 지난날 일본의 극악무도한 조선민족말살책동을 만천하에 폭로해주고있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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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대의 랍치범죄를 덮어버리려는 파렴치한 망동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주체110(2021)년 2월 2일 조선중앙통신

 

(평양 2월 2일발 조선중앙통신)

얼마전 일본수상이 우리 공화국을 걸고드는 황당무계한 망언을 또다시 늘어놓았다.

중의원 본회의에서 우리의 그 무슨 일본인랍치를 운운하며 《나자신이 선두에 서서 관계국들과 긴밀히 련대하면서 전력을 다하겠다.》고 객기를 부린것이다.

도적이 도적이야 하는 격의 철면피한 이 추태는 지금 섬나라에 대한 우리 인민의 적개심을 더욱 끓어오르게 하고있다.

일본이 그토록 떠드는 랍치문제는 이미 되돌릴수 없게 다 해결된것으로서 더는 론의할 여지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를 정치적목적에 악용하고 돈벌이공간으로 써먹는 한편 철면피하게 《피해자》로 분장하며 저들이 과거에 저지른 세계최대의 국가적인 랍치범죄를 비롯한 반인륜행위들을 한사코 덮어버리려 하고있다.

일본이 다른 나라도 아닌 우리에게 감히 랍치문제를 거론한다는것자체가 어불성설이며 이것은 곧 일본의 간특성,도덕적저렬성에 대한 실증으로 된다.

사실 일본정객들이 《북조선에 의한 랍치가능성》을 떠들며 지금도 우겨대고있는 《피해자》들을 보면 하나와 같이 섬나라의 썩어빠진 정치풍토,말세기적사회풍조가 낳은 행방불명자들로서 우리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우리에게 《랍치》되였다고 하던 행불자들이 자국내에서 계속 발견되고있는 사실은 일본반동들이 떠드는 랍치타령의 허황성을 더욱더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최악의 랍치범죄국인 일본이 랍치문제를 떠들며 국제사회앞에서 노죽을 부리는 목적은 명백하다.

적대세력들과 야합하여 존엄높은 우리 공화국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정당화하는것과 함께 이를 기화로 세계면전에서 《피해자》의 억울한 흉내를 계속 내는것으로써 과거에 저지른 반인륜범죄 특히 세계최대의 랍치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나보려는데 있다.

일본이 비렬한 광대극으로 저들이 지닌 과거청산의 의무를 어물쩍 회피할수 있다고 타산하였다면 이보다 더 큰 오산은 없을것이다.

과거 수많은 조선의 청장년들을 유괴,랍치,강제련행하여 죽음의 전쟁판과 고역장으로 내몰고 20만에 달하는 우리 녀성들을 성노예로 끌고다닌 일본의 특대형범죄는 그 어떤 오그랑수로도 절대로 가리울수 없다.

일본반동들은 부질없는 랍치문제에 계속 집착하며 어리석게 놀아댈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에게 감행한 천인공노할 반인륜범죄부터 성근히 사죄하고 철저히 배상해야 한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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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最大の拉致犯罪を覆い隠そうとする破廉恥な妄動 -朝鮮中央通信社論評-

チュチェ110(2021)年 2月 2日 朝鮮中央通信

 

【平壌2月2日発朝鮮中央通信】先日、日本首相がわが朝鮮に言い掛かりをつける荒唐無稽(こうとうむけい)な妄言をまたもや並べ立てた。

衆院本会議でわれわれのいわゆる日本人拉致をうんぬんし、「私自らが先頭に立ち、関係国と緊密に連携しつつ全力を尽くす」と虚勢を張ったのである。

盗人猛々しいこの鉄面皮な醜態は今、島国に対するわが人民の敵愾心(てきがいしん)をさらに沸き返らせている。

日本がそれほど騒ぎ立てる拉致問題はすでに逆戻りできないように解決済みのもので、これ以上論議する余地さえない。

にもかかわらず、日本はこれを政治的目的に悪用し、金儲けのテコに利用する一方、鉄面皮に「被害者」に装い、自分らが過去に働いた世界最大の国家的な拉致犯罪をはじめとする反人倫行為をあくまでも覆い隠そうとしている。

日本が他の国でもないわれわれにあえて拉致問題を取り上げるということ自体が理屈に合わず、これはすなわち日本のずる賢さ、道徳的低劣さに対する実証となる。

事実上、日本の政客らが「北朝鮮による拉致可能性」を言い立てて、今も言い張っている「被害者」を見れば、一様に島国の腐り切った政治風土、世紀末的社会風潮が生んだ行方不明者であって、われわれとは縁もゆかりもない。

われわれに「拉致」されたと言っていた行方不明者らが自国内で次々と発見されている事実は、日本の反動層が騒ぎ立てる拉致うんぬんの荒唐無稽さをよりいっそう如実に示している。

最悪の拉致犯罪国である日本が拉致問題をけん伝し、国際社会の前でこびを売っている目的は明白である。

敵対勢力と結託して尊厳あるわが朝鮮の地位をこき下ろし、対朝鮮敵視政策を正当化するとともに、これをきっかけにして世界の面前で「被害者」の無念のまねをし続けることで過去に働いた反人倫犯罪、特に世界最大の拉致犯罪の責任から逃れてみようとするところにある。

日本が卑劣な茶番劇で自分らが負った過去清算の義務をうやむやにして回避することができると打算したなら、それより大きな誤算はないであろう。

過去、数多くの朝鮮の青壮年を誘拐、拉致、強制的に連行して死の戦場と苦役場に駆り出し、20万に及ぶわが女性たちを性奴隷に連れて行った日本の特大型拉致犯罪は、いかなる術策を弄しても絶対に覆い隠すことはできない。

日本の反動層は、たわいない拉致問題に執着し続けながら愚かに振る舞うのではなく、わが人民に働いた天人共に激怒する反人倫犯罪から誠実に謝罪し、徹底的に賠償すべきである。(記事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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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말살을 노린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책동

주체110(2021)년 1월 30일 로동신문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

 

남포시 온천군 원읍로동자구에서 과거 일본의 조선민족말살책동을 실증해주는 신사비가 발견되였다.

너비가 60㎝, 두께가 28㎝되는 신사비의 앞면에는 《귀성신사》, 뒤면에는 《소화 14년 10월 길일》이라는 글이 씌여져있다.이 비는 그곳에 귀성신사가 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해방전 이 지역에서는 대부분 제염공들과 그 가족들이 살았다.왜놈들은 우리 인민을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이곳에도 신사를 세우고 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원읍로동자구에 살고있는 한 로인은 일제가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어떻게 강요하였는가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였다.

《귀성신사는 1939년에 세워졌다.우리는 수업을 하다가 운동장에 모여 훈육주임의 강요하에 동쪽을 향하여 두손을 합장하고 궁성요배를 하군 하였다.

일요일이면 신사에 가서 교장의 선창에 따라 〈선서〉를 하였다.》

이 신사비는 우리 민족의 얼을 뽑고 정기를 거세말살하기 위하여 미쳐날뛴 일제의 만고죄악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력사의 증거물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는 조선인민의 민족성을 없애버리고 우리 인민을 〈황국신민화〉하려고 날뛰였으며 우리의 민족문화를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일제는 조선강점초시기부터 우리 인민을 철저히 노예화하는것을 국가시책으로 삼았다.

조선통치의 궁극적목적을 《첫째도 동화, 둘째도 동화》로 규정한 일제는 민족성을 거세말살하는것을 그 실현방도의 하나로 내놓았다.그를 위해 일제는 식민지통치시기 신사설치에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1915년에 《신사규칙》이라는것을 발표하고 1918년부터 1925년 10월까지 경성 남산에 조선신궁이라는것을 세워놓았다.그후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전국도처에 각이한 급의 신사들을 대대적으로 만들어놓았다.

일제는 신사들을 세우는 한편 조선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악착하게 강요하였다.

신사참배라는것은 일본의 토착종교인 신도의 절간신사에 찾아가 일본의 하늘과 땅, 사람을 창조한 건국신이라고 하는 《아마데라스 오미까미》(천조대신)와 그의 적자로서 《현인신》이라고 하는 왜왕에게 절을 하고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허황하기 그지없는것이였다.

중일전쟁도발이후 조선총독 미나미는 직접 조선신궁을 찾아가 일제침략군의 《무운장구》를 빌어 참배하고는 즉시 각 도청에 명령하여 전국적으로 본격적인 신사참배를 단행할것을 지시하였다.

그에 따라 일제는 《기원절》, 《명치절》, 《천장절》 등 《국가명절》들과 《흥아봉공일》, 《애국일》에 각종 《기념행사》놀음을 벌려놓고 우리 인민들을 강제로 끌어내여 신사에 절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각급 학교의 학생들에게 1주일에 한번씩 의무적인 집단참배를 강요하였으며 일반주민들이 신사앞을 지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절을 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이 신사참배에 대해 불응하거나 불평할 때에는 《불온사상》이 있다는 딱지를 붙여 범죄시하면서 체포구금하거나 《비국민》으로 취급하고 각종 행정적 및 경제적제재를 가하였다.

목적은 다른데 있지 않았다.

저들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정신을 주입하자는데 있었다.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는 철두철미 조선인민을 《황국신민화》 즉 왜왕에게 절대복종하는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였다.

세계력사에는 타민족을 억압하고 말살하기 위한 침략자들의 반인륜범죄행위들이 수많이 기록되여있다.하지만 일제가 감행한 조선민족말살책동처럼 그렇게 집요하고 그토록 악랄한것은 없었다.

세월은 흐르고 세대는 바뀌였다.

허나 일제가 우리 인민에게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하면서 들씌운 온갖 불행과 고통은 전체 조선민족의 가슴속에 오늘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과거 일본이 식민지통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민족말살책동은 반드시 계산되여야 할 특대형반인륜범죄이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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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에 용납 못할 일제의 극악한 국권유린행위

주체110(2021)년 1월 22일 로동신문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

 

조선봉건정부의 최고주권자였던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된지 102년이 되였다.

고종황제를 독살한 주범이 일제라는것은 이미 여러 자료를 통하여 확증되였다.

《…사실의 진상은 드디여 폭로되였다.일본은 적신(역적) 한상학을 시켜 독약을 친 식사를 진상시켰던것이다.황제(고종)는 한시간도 못되여 중병을 일으키고 〈무엇을 먹었기에 이리도 괴로운것인가.〉고 웨치다가 돌아갔다.페하의 두눈은 벌겋고 온몸에 반점이 돋아나 썩고있었다.시녀 두명도 또한 급사하였다.그 녀자들이 사실의 진상을 목격하였기때문이다.》

이것은 일본도서가 일제의 고종황제독살에 관한 진상을 폭로한 글이다.

2010년에 어느 한 국제학술대회에서 1919년 당시 일본궁내청의 회계심사국 장관이였던 구라또미 유자부로의 일기가 공개되였다.

일기에는 일제의 초대조선총독 데라우찌가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에게 《을사5조약》을 인정하지 않는 고종황제를 독살할것을 지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내용이 씌여져있었다.

고종황제독살사건은 그 어느 나라의 식민지지배력사에도 있어본적이 없는 가장 포악하고 야만적이며 파렴치한 반인륜범죄로서 오늘도 우리 인민의 치솟는 증오와 분노를 자아내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본제국주의의 력사는 조선인민에게 커다란 불행과 재난만을 가져다준 죄악의 력사로 얼룩져있습니다.》

고종황제독살은 철두철미 일제에 의해 계획되고 꾸며진 특대형국권유린행위이다.

고종황제를 제거하려는 일제의 책동은 1907년에 있은 헤그밀사사건을 계기로 로골화되였다.

당시 일제는 《을사5조약》의 강압적인 날조로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고 통감통치를 실시함으로써 우리 인민을 저들의 식민지노예로 전락시켜 온갖 민족적멸시와 굴욕을 강요하고있었다.

한편 반일감정이 강한 고종황제는 비밀리에 《을사5조약》의 불법무도성과 일제의 죄행을 까밝히기 위한 활동을 벌렸다.그 일환으로 1907년 6월 네데를란드의 헤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리준을 비롯한 3명의 밀사들을 파견하였다.

고종은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5조약》의 비법성을 선포하고 세계의 정의와 인도주의에 호소하여 국권을 보존하려고 하였다.그러나 일제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그와 공모결탁한 제국주의자들의 모략책동으로 하여 렬강들에게 동정을 호소하는 밀사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걸음걸음 좌절되였고 고종황제의 국권보존시도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일제는 헤그밀사사건을 트집잡아 고종을 강제퇴위시킬 흉계를 꾸미였다.《을사5조약》에 의해 외교권을 일본에 《이관》한 조선이 통감의 허가도 없이 국제회의에 특사를 파견한것은 저들에 대한 모독으로서 고종이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것이였다.

끈질긴 강박과 위협공갈로 고종을 끝내 황제자리에서 내쫓고 순종을 올려앉힘으로써 교활한 일제는 《정미7조약》을 손쉽게 조작해낼수 있었다.아무런 법적효력도 가지지 못하는 날치기사기협잡문서의 강압날조로 조선봉건정부는 형식상으로나마 존재하고있던 내정권마저 일제에게 강탈당하였으며 조선에 대한 일제의 통감통치와 식민지지배권은 더욱 강화되게 되였다.

고종에 대한 일제의 박해는 강제퇴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제1차 세계대전종결후인 1919년 1월 프랑스의 빠리에서 제국주의렬강들이 전후의 분배몫을 둘러싸고 강화회의를 열자 일제는 이 기회를 리용하여 고종이 또다시 헤그밀사사건과 같은 일을 벌려놓을수 있다는 우려를 감추지 못하였다.하여 일제는 67살의 고종을 잔인하게 독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범죄적만행을 저질렀다.그날은 1919년 1월 22일이였다.

미국 하와이대학 교수는 이에 대하여 《일본은 고종황제가 조선인들에게 독립운동을 고취시킬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다고 본다.바로 이런 정황이 일본이 고종황제를 독살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있다.》라고 밝혔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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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나는 력사를 잊지 말자

주체109(2020)년 12월 26일 로동신문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

 

반제계급교양의 거점으로 훌륭히 개건된 배천군계급교양관의 2호실에 들어서면 눈에 뜨이는 하나의 조각상이 있다.

어린 동생을 홀로 남겨두고 기약없는 길을 떠나야만 하는 가슴찢어지는 아픔의 눈물로 두볼적시는 주인공처녀, 헤여지지 않겠다고 누나의 옷자락을 꼭 부여잡고 품에 안겨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남동생.

조각상은 중일전쟁발발이후 840만여명의 조선청장년들을 강제련행하여 침략전쟁터와 죽음의 고역장에서 혹사시키다 못해 야수적으로 학살한 살인악마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보여주는 사진자료들, 꽃같은 조선처녀들을 일본군성노예로 끌고가 그들의 청춘을 마구 유린하고 생명까지 앗아간 특대형반인륜죄행을 폭로하는 사진자료들을 배경으로 전시되여있다.

보면볼수록 한창 피여나는 조선처녀들을 강압적으로 끌어다가 그들의 청춘시절과 운명을 무참히 짓밟고 롱락한 일제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게 한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본제국주의는 지난날 근 반세기동안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재난과 고통을 들씌운 피맺힌 원쑤입니다.》

벽성군 석담리에서 살던 일본군성노예피해자 리종녀녀성에게도 그런 쓰라린 과거사가 있었다.

1920년대초 4남매의 맏딸로 태여난 리종녀는 어리광을 부려야 할 애어린 나이때부터 지주집에서 종살이를 하였다.천대와 멸시만을 받으며 눈물속에 살아가던 그는 청춘시절에 들어서자 마을의 한 청년과 약혼을 하고 새살림의 꿈을 꾸게 되였다.그런데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약혼자가 징용에 끌려갔던것이다.사랑하는 약혼자와 생리별당한지 몇달만에는 그의 사망통지서가 마을에 날아들었다.

눈물속에 날과 달을 보내고있던 어느날 그는 마을에 달려든 왜놈들에게 유괴되였다.

그가 다른 처녀들과 함께 끌려간 곳은 인천에 있는 크지 않은 벽돌집이였다.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왜놈들이 미친듯이 달려들었다.그렇게 되여 처녀들은 매일 15~20명씩 달려드는 짐승같은 침략군무리로부터 참기 어려운 치욕을 당해야 했다.

저들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하여 놈들의 군화발에 걷어채이고 칼에 찔리운적이 몇번인지 모른다.죽음의 고비도 넘겨야 했다.

한번은 지겹게 달려드는 왜놈의 짐승같은 만행에 분격한 리종녀가 이발로 놈을 물어뜯었다.그러자 그놈은 그를 때리다 못해 옷을 벗겨 알몸으로 만들어놓고는 바줄로 꽁꽁 묶은 다음 그의 몸에 불질을 해댔다.

생살을 태우는 냄새가 온 방안을 꽉 채웠다.리종녀가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며 놈은 좋다고 히히닥거렸다.리종녀는 끝내 의식을 잃고말았다.

그가 한참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왜놈들은 더이상 살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외진 산골짜기에 내다버리였다.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고마운 사람들에 의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숨어살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되였다.

해방의 기쁨과 함께 그에게도 여러명의 청혼자들이 나섰다.

그때마다 그들의 진정을 뿌리쳐야만 했던 리종녀녀성.(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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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대의 랍치범죄국의 흉상부터 털어버려야 한다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주체109(2020)년 12월 23일 조선중앙통신

 

(평양 12월 23일발 조선중앙통신)

얼마전 일본내각관방장관 가또가 도꾜도에서 진행된 국제토론회에서 랍치문제에 대해 횡설수설하였다.

《모든 랍치피해자들의 귀국을 하루빨리 실현하기 위해 정부도 총력을 다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계속하고있다.》고 력설하였다.

또한 어느 한 회의에서도 《랍치문제가 스가정권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과제》이니,《랍치피해자들의 조속한 귀국실현》이니 하면서 《랍치문제를 해결하여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정상화를 지향해나가는것》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주제넘은 망발까지 해댔다.

랍치문제담당상이라는 직분을 다하느라 안깐힘을 쓰는지 최근 렬도에서 가또의 가시박힌 망언이 계속 울려나오는것을 보면 우리에 대한 적대감이 골수에 배인자가 분명하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일본이 떠드는 랍치문제는 이미 다 해결된 문제이다.

이를 모를리 없는 일본정객들이 계속 랍치문제를 거들면서 《국제사회와의 련대》를 떠들어대는것은 국제무대에서 우리 공화국의 영상을 깎아내리고 랍치문제를 정치적목적실현에 악용하자는데 그 더러운 속심이 있다.

랍치문제에서 《피해자》흉내를 내는것은 수백만명의 조선사람들을 강제랍치하여 온갖 정신육체적고통을 들씌운 반인륜범죄를 덮어버리고 과거청산을 한사코 회피해보려는 일본특유의 파렴치성의 극치이다.

랍치문제에서 피해자는 바로 우리이다.

력사가 증명하는바와 같이 일본은 력사상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세계최대의 전범국이며 랍치범죄국이다.

지난 세기 조선을 무력으로 강점하고 840만여명이나 되는 무고한 우리 인민들을 랍치,련행하여 전쟁터와 중세기적인 노예로동의 고역장으로 내몰고 100여만명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20만명의 녀성들을 일본군성노예로 유린한 일본의 과거죄악은 그 무엇으로써도 부정할수 없다.

우리 인민에게 천추만대에 씻지 못할 특대형랍치범죄를 저지르고도 일본은 잘못된 과거를 성근하게 반성하고 청산할 대신 죄악에 죄악만을 덧쌓고있다.

지어 《특정실종자문제조사회》같은 악명높은 반공화국모략단체들을 내세워 어리석은 《랍치》극들을 계속 꾸며내고 행방불명자들을 《북에 의한 랍치피해자》로 둔갑시키는짓도 서슴지 않고있다.

이런 범죄국가 일본이 그 누구의 랍치문제에 대하여 떠들어대는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다.

실지로 국제화하여야 할 문제,반드시 해결해야 할 정치적인 문제는 일본의 과거청산이다.

일본이 죄악의 력사를 정당화하고 과거청산을 회피하려고하는것은 우리 인민에 대한 참을수 없는 모독이고 도전이며 인류량심에 대한 우롱이다.

일본은 랍치문제라는것을 입에 올리기 전에 세계최대의 랍치범죄국의 흉상부터 털어버려야 한다.

과거청산을 외면하고 우리에 대한 적대행위에 동분서주할수록 우리 인민들의 대일적개심을 배가해주게 될뿐이라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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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교육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총련의 투쟁

주체109(2020)년 12월 22일 로동신문

 

올해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은 단결된 힘으로 재일조선인운동의 뿌리이고 생명선인 민족교육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그 어느때보다 과감히 전개하였다.

총련중앙상임위원회는 일본당국의 민족교육말살책동을 폭로규탄하고 민족교육을 고수하기 위한 실천투쟁을 조직전개하였다.

재일본조선청년동맹(조청) 도꾜도본부에서는 《전임일군들부터 운동의 앞장에 서자!》라는 구호밑에 1월부터 지부를 동부, 도꾜 제1학구, 도꾜 제3학구, 서남지역으로 나누어 조선학교 유치반에 대한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적용을 요구하여 항의행동을 벌렸다.

조청 효고현본부도 일본의 산노미야, 히메지, 아마가사끼에서 거리선전활동을 진행하였으며 혹가이도조선초중고급학교 학생들과 교원들, 조청원들을 비롯한 재일동포들도 인쇄물배포 등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통하여 일본당국의 부당한 민족교육말살책동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2월 21일 총련중앙일군들과 재일조선학생들, 교직원들, 중앙단체, 사업체 일군들, 동포학부모들, 일본의 여러 단체와 각계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일본문부과학성앞에서 진행된 금요행동은 민족교육을 기어이 지키기 위한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의 의지를 과시하였다.

《일본당국은 조선고급학교 학생들에게 고등학교지원제도를 적용하라!》,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적용에서의 조선유치원배제를 반대한다!》, 《문부과학성은 어린이들의 배움의 권리를 당장 보장하라!》, 《조선유치원에 대한 민족차별 절대반대!》 등 참가자들이 터친 웨침은 일본반동들을 전률케 하였다.

일본 혹가이도의 조청원들과 조선초중고급학교 어머니회 성원들, 도꾜, 교또, 오사까, 히로시마, 아이찌, 효고, 야마구찌의 재일동포들은 10월 3일과 30일 기자회견, 집회를 가지고 후꾸오까고등재판소판결의 부당성을 폭로하면서 조선학교에 대한 일본당국의 차별책동이 철회될 때까지 싸울 의지를 피력하였다.

후꾸오까조선학원은 일본반동들의 비렬한 민족교육말살책동을 규탄하는 항의성명을 발표하였다.

조선학교 유치반들의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적용을 위한 100만명서명운동도 보다 광범히 전개하였다.

100만명서명운동에 적극 참가할것을 호소하는 지역별, 조직별집회들과 긴급행동, 거리선전활동, 시위행진 등이 벌어졌으며 그 과정은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이 불굴의 신념과 애국충정의 마음을 더욱 굳게 가다듬는 계기로 되였다.7월부터는 신형코로나비루스전파로 집체행동을 할수 없는 조건에 맞게 즉시 인터네트를 통한 서명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총련일군들과 학부모들, 재일동포들의 적극적인 투쟁에 의해 5월말까지 46만 6 87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서명에 참가하였다.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은 전세계를 휩쓸며 인류의 생명안전을 위협하는 대류행전염병전파사태속에서도 민족차별책동에 미쳐날뛰는 일본반동들을 반대하여 힘차게 싸웠다.

총련 사이다마현본부, 지부일군들, 사이다마조선초중급학교 유치반 원장과 교직원들, 학교교육회 리사들과 보호자들,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 회장과 사무국장, 변호사들을 비롯한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은 시안의 보육원, 유치원 등에 신형코로나비루스감염방지를 위해 마스크를 공급하면서 사이다마조선초중급학교의 유치반만을 배제한 일본 사이다마시당국의 치졸한 망동을 단죄하였다.

신형코로나비루스감염증과 관련한 학생지원금지불대상에서 조선학교 학생들을 또다시 제외시킨 일본당국에 항의하여 6월 19일과 25일, 26일 도꾜와 니시도꾜, 사이다마지역 조선학교 유치반관계자들과 보호자들, 총련일군들은 일본 내각부와 문부과학성, 후생로동성에 조선학교 유치반에 대한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적용을 요구하는 서명문과 요망서를 제출하였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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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조국을 목숨바쳐 지켜야 한다 -보통강구역 신원동 29인민반에서 사는 한명화할머니의 해방전 생활에서-

주체109(2020)년 12월 19일 로동신문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과거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청년들과 소년들에게 가장 적은 임금을 주고 그들을 마소와 같이 밤낮으로 부렸으며 그들로 하여금 헐벗고 굶주리고 무지와 질병에 시달리여 쓰러지게 하거나 또는 불구자로 되여 절망의 길에서 헤매게 하였습니다.》

보통강구역 신원동 29인민반에서 살고있는 한명화할머니에게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로 잊을수 없는것이 있다.그것은 자기가 해방전에 겪은 피눈물나는 노예살이이다.

아흔살을 가까이하는 할머니의 가슴아픈 추억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새겨주고있는가.

 

노예의 설음

 

1931년 한명화할머니는 6남매중의 둘째로 태여났다.당시로 말하면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파쑈통치가 더욱 악랄하게 감행되던 때였다.

그가 8살 나던 해였다.그가 나서자란 중화군 풍동면 릉성리(오늘의 상원군 릉성리)에 전해의 흉년으로 극심한 기아가 휩쓸었다.

어느날 해종일 굶은 명화는 어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날이 어두워져서야 어머니는 쑥을 한보따리 이고 돌아왔다.이윽고 저녁상에는 쑥버무리가 올랐다.

낟알이 섞이지 않은 그것은 써서 먹기가 역했다.

그래도 배가 고팠던 명화는 억지로라도 쓰거운 쑥버무리를 삼켜야 하였다.

날이 갈수록 살림에 쪼들린 명화의 부모는 하는수없이 그를 지주집아이보개로 보내기로 하였다.지주집에 들어가면 명화가 찬밥덩어리라도 좀 얻어먹을수 있겠지 하는 순진한 생각에서였다.

지주녀편네는 집을 찾아온 연약해보이는 명화를 마뜩잖게 훑어보더니 깨진 소반에다 밥과 찌개를 조금 가져다주었다.명화가 밥술을 놓기가 바쁘게 지주녀편네는 손바닥만 한 그의 잔등에 자기의 아이를 올려놓았다.

《이년아, 밥 한그릇이 공짜인줄 알아.》

이렇게 시작된 그의 노예살이는 그야말로 고된것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지주녀편네는 명화에게 이제부터 자기 아이를 한시도 등에서 떼놓지 말고 업어재우라고 떠벌이였다.하여 그는 지주년놈들이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잘 때에도 밤깊도록 아이를 업은채 마당가를 오락가락해야 하였다.하지만 몰려오는 피곤은 끝끝내 명화를 쓰러뜨렸다.

이것을 보게 된 지주녀편네는 빌어먹을 년이 남의 집 귀동자에게 찬이슬을 맞혔다고 고아대면서 그를 마구 때리였다.

참을길 없었던 명화는 지주놈의 집에서 뛰쳐나왔다.

집에 돌아온 명화는 어머니가 주는 쑥버무리를 먹으며 말하였다.

《엄마, 쑥버무리가 참 맛있어요.지주집밥은 살로 안가요.》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명화의 상처투성이얼굴을 쓸어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착취자들의 억압과 학대는 쓰디쓴 쑥버무리를 먹기보다 몇갑절 참기 어렵다는것을 사무치게 깨달았습니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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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대조선적대시정책의 발로

주체109(2020)년 12월 18일 조선중앙통신

 

일본의 민족배타적망동이 극도에 이르고있다.

얼마전 일본당국은 세계적인 보건위기속에서 학생들을 지원하는 《학생긴급지원금》제도적용대상에서 조선대학교 학생들을 제외하는 차별조치를 취하였다.

일본의 국립,사립대학과 단과대학,전문학교는 물론 일본어교육기관이나 외국대학의 일본분교들도 지원대상에 포함시키면서 유독 조선대학교만 빼놓은것은 참으로 고약하고 너절한 처사가 아닐수 없다.

고등학교지원제도와 《유아교육,보육무상화》제도에서의 부당한 차별에 이어 이번에 또다시 감행된 조선대학교배제조치는 일본의 뿌리깊은 대조선적대시정책의 연장으로서 절대로 용납할수 없는 반인륜적인 민족차별책동의 극치이다.

섬나라 졸부들의 란폭한 처사에 국제사회가 경악하고 일본사회도 부끄러워하고있다.

일본의 대학교수대표들은 당국의 처사를 《의도적인 정치적배제》로 항의하면서 공평한 지원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으며 이에 수백명의 대학교수들이 찬동하였다.

유치반으로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재일조선인교육체계전반에 대한 일본반동들의 차별과 박해는 민주주의적민족교육을 기어이 말살하고 재일조선인운동의 대를 끊어버리려는 파쑈적폭거이다.

패망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여온 일본반동들의 민족교육말살책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 치졸하고 포악해지고있다.

돌이켜보면 재일조선학교는 일제통치하에서 학교문앞에도 가보지 못한 재일동포들이 자식들만이라도 공부시키려는 필생의 소원을 안고 극심한 생활난속에서도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혜있는 사람은 지혜를 내여 우리 학교를 세우자!》는 구호밑에 피와 땀을 바쳐 세운 동포사회의 기쁨이고 희망이였다.

그러나 일본반동들은 민족교육발전의 싹부터 짓뭉개버리려고 미쳐날뛰면서 조선학교의 설립을 인정하지 않았을뿐아니라 1949년에 이르러 강제적인 《조선인학교페쇄령》으로 무려 348개의 조선학교들을 없애버리는 범죄적망동을 감행하였다.

그 이후에도 조선말과 글을 배워주고 조국의 력사와 지리,문화전통을 가르쳐주는것을 《치외법권》,《일본국익에 배치되는 반일교육》이라고 헐뜯으며 동화교육을 강요하고 조선학생들에 대한 극악한 민족차별을 실시하였다.

조선인자녀들을 조선학교에 다니는가,일본학교에 다니는가 하는데 따라 구별하고 조선학교졸업생들의 학력을 인정하지 않는것과 같은 차별은 지금도 계속되고있다.

재일조선인들에게 일본인들과 꼭같은 납세의무를 지우고도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을 당치않은 리유로 차단하고 동포들이 모아보내는 조선학교기부금에도 세금을 부과하며 조선학교의 교육환경과 물질적토대축성을 각방으로 방해하고있다.

일본반동들은 조선학교들이 사상이나 운영면에서 공화국의 영향을 받고있기때문에 지원대상으로 될수 없다고 하면서 비렬한 압박행위도 서슴지 않고있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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根深い対朝鮮敵対政策の発露である民族教育抹殺策動を直ちに撤回すべきである -朝鮮日本研究所・研究員談話-

チュチェ109(2020)年 12月 18日 朝鮮中央通信

 

朝鮮外務省傘下の日本研究所は12月18日、李スクキョン研究員名義で、民族教育に対する差別と抑圧を執拗に続ける日本政府を非難する談話を発表した。(以下全文)

日本の民族排他的妄動が極に達している。先日、日本当局は世界的保健危機の中で学生を支援する「学生緊急支援金」制度の適用対象から朝鮮大学校の学生を除外する差別措置を取った。日本の国立、私立大学と単科大学、専門学校はもちろん、日本語教育機関や外国大学の日本分校も支援対象に含ませながら唯一朝鮮大学校だけを除外したことは、実に不届きでけしからぬ行為と言わざるを得ない。

高等学校支援制度と「幼児教育、保育無償化」制度での不当な差別に続き、今回再び敢行された朝鮮大学校排除措置は、日本の根深い対朝鮮敵対政策の延長として絶対に容認できない反人倫的民族差別の極致である。

にわか成金の島国の暴挙に、国際社会が驚愕し日本社会も恥じている。日本の大学教授代表らは、当局の措置を「意図的な·政治的排除」として抗議し、公平な支援を求める声明を出し、数百人の大学教授らが賛同した。

幼稚園から大学に至る在日朝鮮人の教育体系全般に対する日本反動の差別と迫害は、民主主義的民族教育を抹殺し在日朝鮮人運動を根絶やしにしようとするファッショ的暴挙である。

敗戦直後から今日に至るまで、絶えず続いてきた日本の反動による民族教育抹殺策動は日増しに稚拙で暴悪になっている。

ふり返えれば、在日朝鮮学校は、日帝統治下で学校の門前にも行けなかった在日朝鮮人たちが子供たちだけは勉強させたいという終生の願いを抱き、極まりない生活苦の中でも「金ある者は金を出し、力ある者は力を出し、知恵ある者は知恵を出して、われわれの学校を建てよう!」というスローガンの下、血と汗を捧げた同胞社会の喜びであり希望だった。

しかし、日本の反動は民族教育を萌芽期から踏み潰そうと躍起になり、朝鮮学校の設立を認めなかっただけでなく、1949年には強制的な「朝鮮人学校閉鎖令」を出し348校もの朝鮮学校を廃校にする犯罪的妄動を行った。

その後も朝鮮の言葉と文字を学ばせ、祖国の歴史と地理、文化的伝統を教えることを「治外法権」、「日本の国益に反する反日教育」と決めつけ、同化教育を強要し朝鮮の学生たちに対する極めて悪辣な民族差別政策を実施した。

朝鮮人子女を朝鮮学校に通うか、日本学校に通うかによって区別し、朝鮮学校卒業生の学歴を認めないなどの差別は今も続いている。

在日朝鮮人に日本人と同様の納税義務を課しながら、朝鮮学校に対する補助金を不当な理由で断ち、同胞たちが集めて送る朝鮮学校への寄付金にも税金を課し、朝鮮学校の教育環境と物質的土台の蓄積を各方面で妨害している。

日本の反動は、朝鮮学校が思想や運営面で共和国の影響を受けているので支援対象にはなれないとしながら、卑劣な圧迫行為もためらっていない。

世紀をまたいで続く憎むべき民族教育抹殺策動によって、在日同胞たちが受けた被害は実に計り知れない。

在日朝鮮人たちは日本の植民地統治の直接的被害者とその子孫であり、日本当局には、歴史的経緯や倫理・道徳的見地から、彼らの人権を保障し、民族教育の発展を奨励し、朝鮮学校生徒たちを保護すべき法的、人道的責任がある。特に在日朝鮮人の民族教育の権利は、世界人権宣言と経済・社会および文化的権利に関する国際協約など、日本が受諾した国際法や国内法規にも全面的に合致する権利である。

しかし日本は、自らに課された当然の責任を拒否し、むしろ共和国を敵視し在日同胞の民族教育の発展を妨げ、初歩的な人権までも踏みにじる反人倫的で民族排他主義的な罪を犯し続けている。(記事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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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강토를 피로 물들인 철천지원쑤

주체109(2020)년 12월 9일 로동신문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는 이르는 곳마다에서 사람들을 중세기적방법으로 야수적으로 학살하였으며 침략전쟁을 위하여 인적, 물적자원을 깡그리 징발, 략탈하였습니다.》

평안북도계급교양관에는 조선인강제련행과 학살만행, 우리 나라의 자연부원략탈만행을 비롯하여 일제가 조선인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여러 범죄자료가 전시되여있다.

중일전쟁도발후 일제는 840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을 강제련행하여 노예로동과 침략전쟁터에 내모는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으며 우리 나라와 일본의 로천채굴장들, 동발목도 세우지 않은 수천척지하막장들에서 그리고 망망대해의 외진 섬들에서 고역에 시달리다가 눈도 감지 못하고 원통하게 숨졌다.

일제가 강제련행자들을 어떻게 잔인하게 학살하였는가는 2014년 천마군 서고리에서 발견된 수백구의 유골들을 찍은 사진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당시 서고리에서의 광석탐사과정에 한 페갱이 발견되였는데 그안에는 관통상을 입은 두개골들과 총알이 박혀있는 대퇴골, 탄피, 불발탄 그리고 고무신과 로동화들, 미쯔이회사상표가 있는 혁띠고리, 징용자표식나무패쪽들, 단추를 비롯하여 일제의 야수적인 살인만행을 폭로하는 많은 유골들과 유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광업령》을 조작하고 우리 나라의 귀중한 지하자원을 대대적으로 략탈하기 위해 환장이 되여 날뛴 일제는 평안북도 천마지구에서만도 숱한 금, 은광산들을 개발하고 우리 인민의 고혈을 짜냈다.

그 앞장에는 미쯔이를 비롯한 일본독점재벌들이 서있었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에게 초보적인 로동조건, 생활조건도 갖추어주지 않고 그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패망이 가까와오자 일제는 이곳 위치와 저들의 죄행을 은페시킬 흉심밑에 거기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가족들을 모두 100m도 안되는 갱안에 강제로 몰아넣고 마구 총질하였으며 나중에는 갱입구를 폭파시켜 무참히 학살하였다.

일제에 대한 우리 인민의 피맺힌 원한은 도안의 여러곳에 서리여있다.부라벌(당시)의 옥백미를 략탈해갈 목적으로 5리나 되는 구간에 물길굴공사를 벌려놓고 많은 인부들을 소나 말처럼 부려먹었다.매일같이 공사에 내몰린 인부들이 맥없이 쓰러져 버럭더미에 묻히였다.

또한 일제는 누에알독점을 위해 의주군에 그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놓고 수백명에 달하는 로동자들과 농민들을 징집하여 그들에게 장시간의 고된 로동을 강요하였다.

어느 한 저수지공사장에서는 제방뚝을 쌓으면서 어린 소녀를 콩크리트혼합물과 함께 처넣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르는 곳마다에서 우리 인민의 신음소리, 원한소리가 그칠새없었다.

계급교양관에는 일제가 우리 인민의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해 발악적으로 날뛴 자료들도 있었다.

일제는 식민지통치시기 우리 나라의 민족문화유산들에 대한 전대미문의 파괴략탈행위를 감행하였다.

우리 나라 그 어디에서나 그러하였듯이 평안북도에서도 일제는 《조사》라는 명목밑에 귀중한 력사유적들을 닥치는대로 파괴하였을뿐아니라 강도적으로 빼앗아갔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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