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조일관계/朝日関係’ Category
대조선침략야망의 집중적표현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평양 4월 8일발 조선중앙통신)
얼마전 일본 내각관방 부장관이라는자가 어느 한 기자회견에서 동해라는 용어사용은 부적절하다고 하면서 《일본해》가 유일한 공식 국제적명칭이라는 억지주장을 해댔다.
이것은 일제의 조선침략사를 정당화하고 나아가서 또다시 전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어보려는 일본반동들의 영원히 변할수 없는 대조선침략야망의 집중적인 표현이다.
조선동해에 대한 《일본해》표기에는 지난날 우리 강토를 짓밟고 온갖 범죄를 일삼던 일제의 죄악에 찬 력사가 어리여있다.
《명치유신》이후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강점정책을 단계적으로 추진해온 일제는 1929년 식민지종주국의 지위를 악용하여 우리 민족이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써온 조선동해명칭을 《일본해》로 바꾸어 국제수로기구에 등록하였다.
문제는 일본이 패망후에도 부당한 《일본해》명칭을 주장하며 그를 국제사회에 인정시켜보려고 하고있는 사실이다.
조선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지도를 제작하여 홈페지를 통해 내돌리는가 하면 국제무대에서 《일본해》가 력사적으로 인정되여왔다,저들의 과거 식민지지배와는 관계가 없다고 강변하고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조선봉건왕조실록을 비롯한 우리 나라의 고전문헌들은 물론 일본에서 편찬된 《아시아전도》(1794년),《일본변해략도》(1809년),《대일본사신도》(1872년)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옛 지리문헌들과 지도들에는 명백히 우리 나라의 동쪽바다가 조선동해로 표기되여있다.
조선동해명칭은 바다명칭표기와 관련한 주요국제관례와 원칙인 력사주의적관례,대륙지명우위의 관례,지리학적방위기준의 관례 및 옛 식민지잔재청산의 관례에 비추어보아도 지극히 정당하다.
만일 일제의 식민지잔재인 《일본해》지명이 계속 남아있는 경우 그것은 일본파시즘의 범죄적인 조선침략력사에 합법성을 부여해주고 당국자들에게는 과거청산회피의 더할나위없는 구실을 마련해주는것으로 될것이다.
지금 일본반동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일본해》명칭과 《독도령유권》을 떠들며 섬탈환연습을 비롯한 군사적준비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일본의 억지주장들이 재침의 명분쌓기와 직결되여있다는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일본해》야말로 일제의 식민지통치력사가 응결된 범죄적인 지명이며 군국주의적팽창정책의 산물,제국주의침략의 대명사이다.
오늘 전체 조선민족은 일본이 도수넘게 벌리고있는 력사외곡,령토강탈책동을 더욱 예리하게 주시하고있다.
일본은 시대착오적인 력사외곡책동과 령토팽창책동을 걷어치워야 한다.(전문 보기)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장본인은 누구인가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평양 4월 6일발 조선중앙통신)
얼마전 일본 수상 스가가 우리의 신형전술유도탄시험발사를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유엔안보리사회결의에 대한 위반》으로 걸고들었다.
이것은 우리의 자위권에 대한 로골적인 부정인 동시에 란폭한 침해로서 절대로 스쳐보낼수 없다.
우리의 국방력강화조치는 외부세력의 근원적인 군사적위협들을 제압하여 조선반도의 안전과 평화적환경을 굳건히 수호하기 위한 정정당당한 자위권행사로서 누구도 시비할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나라의 방위력을 끊임없이 다져나가기 위한 우리 국가의 정상적인 활동을 한사코 걸고드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우리에게 죄지은자들이 국제적인 반공화국압박분위기를 조성하여 우리의 비약적인 위력증대를 정체시키는 한편 안보위기를 고조시켜 군사대국화책동의 유리한 형세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일본은 전범국으로서 가지지 못하게 되여있는 교전,참전권은 물론 군대보유의 권리까지 부활시키려 하고있으며 이미 집단적자위권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내용을 담은 안전보장관련법을 채택하고 군사적공격능력보유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해마다 사상최고액수의 군사비를 들여가면서 새로운 전쟁장비개발과 구입,우주작전과 전자전에 대처한 새로운 부대발족과 해외파병,군사연습에 매달리고있다.
국제사회는 어제날 침략전쟁을 일으켰던 전범국이 오늘날 세계적인 군사실체로 또다시 자라나고있는데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고있다.
일본이야말로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엄중히 위협하는 장본인의 하나이다.
전범국 일본은 남을 걸고들기 전에 재침실현을 위해 저들이 실전배비하였거나 개발을 다그치고있는 모든 공격무기들을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게 불가역적으로 페기시켜야 한다.(전문 보기)
일본의 만고죄악을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며 천백배의 피값을 받아내고야말것이다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 유가족협회 대변인담화-
일제가 범죄적인 《국가총동원법》을 조작공포한 때로부터 83년이 된다.
1938년 4월 1일 제1차 고노에내각에 의하여 조작된 《국가총동원법》은 저들의 무모한 침략전쟁확대를 정당화하고 그 수행에 필요되는 인적 및 물적자원을 《총동원》이라는 미명하에 강권으로 략탈하여 충당하기 위한 파쑈적인 전시악법이였다.
일제는 이 법의 제49조에 《본법의 시행은 외지에도 적용》한다는 문구를 박아넣고 식민지조선에서 가장 야만적이고 강도적인 방법으로 철저히 집행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국가총동원법》에 기초하여 《국민근로보국협력령》, 《국민징용령》, 《학도근로령》, 《녀자정신대근로령》, 《조선청년특별련성령》 등 조선의 남녀로소를 가림없이 강제징발하기 위한 각종 악법들과 《징병》제도를 무더기로 꾸며냄으로써 대대적인 조선인강제련행의 《법률적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악법이 조작공포된 때로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까지 무려 840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이 국내는 물론 일본의 탄광, 광산, 조선소, 언제, 철도공사장 등 고역장들과 중국, 남양군도를 비롯한 일제침략군의 전쟁터들에 끌려가 장시간의 가혹한 노예로동과 학대, 비참한 총알받이의 운명을 강요당하였다.
이때부터 일제는 일본군《위안부모집》을 더욱 본격화하였으며 10대의 소녀로부터 유부녀에 이르기까지 20만명에 달하는 조선녀성들을 유괴, 랍치하여 야수화된 일제침략군의 성노예로 만들었다.
참으로 일제가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침략전쟁의 대포밥으로, 로동노예와 성노예로 끌어다 고통과 죽음을 강요한 비인간적만행은 인류사에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특대형의 국가범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당국은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과거의 반인륜범죄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잘못을 빌 대신 한사코 부정하고 정당화하면서 그 책임에서 벗어나보려고 온갖 파렴치한 오그랑수를 다 쓰고있다.
더욱 참을수 없는것은 일본제국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인 우리 공화국을 항상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국제무대에서 악의에 찬 망발을 일삼고 조선반도재침기도를 로골적으로 드러내놓고있을뿐아니라 강제련행피해자들이며 후손인 총련과 재일조선인들을 탄압하고 제재를 가하다 못해 재일조선학생들과 어린이들에게까지 폭압의 마수를 뻗쳐 그들의 교육권과 보육권을 엄중히 침해하고있는것이다.
일본당국이 이와 같은 악랄한 반공화국, 반조선인책동을 끈질기게 감행하고있는 목적은 백일하에 드러나는 천인공노할 반인륜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저들에게로 쏠리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딴데로 돌려 과거범죄청산을 모면하며 그 누구의 《위협》을 구실삼아 군사대국화를 다그침으로써 이루지 못한 《대동아공영권》의 망상을 기어이 실현해보려는데 있다.
전체 과거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은 근 반세기동안 조선을 불법강점하고 갖은 악법을 휘둘러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강요한 죄많은 과거를 뉘우치고 속죄할 대신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우리 공화국과 총련,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제재와 압박소동에 미쳐날뛰고있는 일본반동들의 악착하고 무분별한 망동에 치솟는 분노와 적개심을 금치 못하면서 이를 준렬히 단죄규탄한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여도 우리는 일본의 만고죄악을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며 천백배의 피값을 받아내고야말것이다.
일본당국은 과거청산의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다는것을 명심하고 시대착오적인 반공화국적대시정책과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비렬한 인권유린행위를 당장 걷어치워야 하며 하루빨리 우리 나라의 과거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철저히 사죄하고 배상하여야 한다.
주체110(2021)년 4월 1일
평양
우리 인민에게 불행과 고통만을 들씌운 일제의 과거죄악
지난 세기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조선인민에게 식민지노예의 비참한 운명을 강요한 일제의 범죄적책동은 그 교활성과 악랄성, 파렴치성에 있어서 인류력사의 어느 갈피에서도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것이였다.
지금으로부터 83년전인 1938년 4월 1일 일제가 침략전쟁에 요구되는 인적, 물적자원을 강제로 동원하기 위하여 파쑈적이며 략탈적인 《국가총동원법》을 조작공포한것이 그 대표적실례들중의 하나이다.
당시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에 《본법의 시행은 외지(식민지나라들)에도 적용한다.》는 날강도적인 문구를 박아넣고 수백만명에 달하는 조선의 청장년들을 강제련행, 랍치하는 특대형반인륜범죄를 저질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난날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다음 정치적폭압과 경제적략탈을 강화하는것과 함께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면서 못된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1930년대 후반기에 들어와 일제는 침략전쟁확대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일제의 이러한 책동은 막대한 인적자원의 소모를 초래하였으며 이것은 그대로 로동력의 고갈에로 이어졌다.
바빠난 일제는 부족되는 로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였다.뒤따라 《국민징용령》, 《장년전원에 대한 징용령》, 《녀자정신대근로령》 등 악법들을 련이어 조작개정하면서 조선사람들을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강제련행, 랍치하여 죽음의 고역장들에 내몰았다.
일본의 한 도서에는 《징용이 강제련행형식의 성격을 띠고있었기때문에 조선인〈응징사(징용에 응한 사람이라는 뜻)〉들속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고 기록되여있다.1944년 7월 일본내무성에 제출된 보고서에는 조선국내에서의 강제련행이 《랍치》라고 명기되였다.1942년 8월 일본후생성에서 진행된 회의를 기록한 문서에는 고위인물들이 《조선반도에서 많은 사람들을 랍치하여 주로 군관계의 공사를 시켰다.》, 《강제적으로 끌고와 가혹한 로동을 시키니 도망가는자가 나왔다.》고 조선인강제련행이 랍치였다는것을 인정한 발언내용들이 적혀있다.
이것은 징용이 명백히 강제련행, 랍치의 방법으로 진행되였다는것을 실증해주고있다.
강제련행, 랍치된 조선사람들은 일본렬도는 물론 남양군도, 필리핀을 비롯하여 일제의 침략의 발길이 닿는 그 어디에나 끌려가 중세기적인 노예로동을 강요당하였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강제수용소에 가두고 인간의 초보적인 자유와 권리마저 박탈하였으며 최소한의 로동조건조차 보장해주지 않았다.조선사람들이 죽으면 얼마든지 로동력을 보충할수 있기때문에 마지막기력이 남을 때까지 부려먹어도 일없다는것이 일제의 흉심이였다.
렬악한 로동환경속에서 조선사람들은 그야말로 소나 말처럼 혹사당하였다.조선사람들은 일제에게 있어서 《말하는 도구》, 《일하는 동물》에 불과하였다.일제는 군사시설물공사장이나 탄광, 광산, 언제건설장과 같은 가장 위험하고 고된 부문에 조선사람들을 내몰아 그들의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깡그리 짜내였다.일본에서 발견된 어느 한 자료에는 일본전국에 있었던 500개이상의 군사시설물공사장들에서 조선사람들이 노예로동을 강요당하였다고 밝혀져있다.
주린 창자를 그러안고 피골이 상접한 연약한 몸으로 하루 14~16시간이상의 고역을 치른 조선사람들에게 있어서 강제로동판은 말그대로 죽음의 함정이였다.《침목 1대에 조선사람 1명》, 《석탄 한삽에 피 한방울》이라는 말도 바로 이때에 생겨났다.
일본의 한 탄광에 끌려가 노예로동을 강요당하였던 한 피해자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둘이 한조가 되여 한사람은 캐내고 다른 한사람은 운반하는 일을 하였다.기준량으로 정해진 작업을 끝마치지 못하면 밖으로 내놓지 않았으므로 어떤 때에는 아침 7시부터 19시간을 일하였으며 다음날 새벽 3시에 밖으로 나오는 때도 있었다.식사는 보통 대두박이 위주였고 돼지도 먹지 않을 그런것을 주었는데 배가 고파 힘을 쓸수 없었다.》(전문 보기)
외곡된 력사교과서를 검정통과시킨 일본정부를 강력히 규탄
남조선언론들이 지난 3월 30일 일본정부가 력사를 외곡하는 주장을 담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검정통과시킨것과 관련하여 이를 강력히 규탄하였다.
언론들은 이날 일본정부가 자국중심의 력사관에 따라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지 않은 교과서를 검정통과시킨데 대해 강력히 비판하였다.
특히 력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민족의 고유한 령토인 독도를 《일본고유의 령토》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담긴 교과서를 일본정부가 또다시 검정통과시킨데 대해 준절히 단죄규탄하였다.
또한 일부 교과서들에는 일본군성노예범죄와 관련한 기록이 전혀 없다면서 일본정부가 일본군성노예피해자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고 사죄와 반성의 정신에 립각하여 그와 관련한 력사교육에 림해나가야 한다, 새 세대들에 대한 교육에서 보다 책임적인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전문 보기)
조선사람들에게 노예로동과 죽음을 강요한 일제의 극악한 죄악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
지난날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그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략탈할 목적밑에 각종 악법을 조작하여 수많은 조선의 청장년들을 탄광, 광산, 군수공장, 군사기지건설장들에 끌고가 강제적인 노예로동을 강요하고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과거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근 반세기동안 조선을 강점하고 야만적인 식민지통치를 실시하였으며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들씌웠습니다.》
일본 하리마조선소도 일제가 숱한 조선사람들을 마소처럼 부려먹으면서 악착하게 고혈을 짜낸 곳이다.
당시 이곳에서는 조선사람들을 가리켜 《응징사》(징용에 응한 사람이라는 뜻)라고 불렀다.하지만 말이 그렇지 누구라 할것없이 강제징발되여 끌려간 사람들이였다.
일본도서 《아이오이시력사》에도 《조선인응징사들은 중대로 편성되여 집단작업에 종사하였다.그러나 징용이 강제련행형식의 성격을 띠고있었기때문인지 조선인응징사들속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 그 정착률은 좋지 않았다.》고 씌여져있다.
실지 그때 일제의 강제징발범죄는 우리 나라 그 어디에서나 감행되였다.피해자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본인은 물론 그 가족들에게도 위협과 강제가 동반되였다.
하리마조선소에 끌려간 사람들의 경우도 결코 례외가 아니였다.
이에 대하여 피해자 박용수는 《1944년 5월경 어느날 면서기의 지시를 받은 구장이 집에 들이닥쳐 징용에 나가라고 하였다.구장은 나에게 〈네가 징용에 가지 않으면 가족을 모조리 멸살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당시 결혼한 몸이였지만 집에 화가 미치는것이 두려워 끌려가지 않으면 안되였다.》고 증언하였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화물자동차에 물건짝처럼 걷어싣고 역까지 끌고가 그곳에서 기차에 태웠다.호송인들은 일본사민들이나 순사들이였으며 그들은 저들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사정을 보지 않고 마구 때리였다.조선사람들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감시를 받으며 부산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제는 조선청장년들을 하리마조선소에 끌고가 《지성료》라는 합숙에 들이밀었는데 조선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조선인합숙》으로도 불리웠다.
왜놈들은 조선사람들을 한방에 40~50명씩 들이밀고 군대와 같은 규률을 적용하였다.사감은 이전 일본군 중위였는데 강제징발되여온 조선사람들로 편성한 대대의 대대장도 겸하고있었다.중대장들은 일제침략군에서 복무한 전적을 가지고있는 일본인들이였다.이자들은 조선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게 행동하면 뺨후려갈기기, 야구방망이로 치기, 각목을 끼우고 꿇어앉히기, 바께쯔를 든채로 오래동안 서있기 등 벌칙을 적용하면서 관리통제하였다.
조선사람들의 급식형편은 참으로 한심하였다.
아침과 저녁은 합숙에서 먹고 점심은 작업현장에서 먹었는데 주는것은 2~3번 숟가락질을 하면 바닥이 나는 콩또래밥이였다.왜놈들이 얼마 되지도 않는 점심밥도 현장에서 먹게 한것은 어떻게 하나 시간을 짜내여 더 많은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다.(전문 보기)
대륙침략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한 무분별한 광증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평양 3월 11일발 조선중앙통신)
일본반동들이 독도강탈책동에 계속 집요하게 매달리고있다.
얼마전 내각관방장관이라는자가 기자회견에서 독도가 《일본고유의 령토》라는 억지주장을 또다시 늘어놓으며 《단호히 수호하겠다.》는 극히 호전적인 망발을 줴치였다.
그러면서 《국제사회의 옳바른 리해》를 얻기 위해 세계각국에 있는 일본대사관들과 국내유식자들의 해외파견 등을 통해 정확한 정보발신을 강화할것이라고 희떱게 놀아댔다.
이것이 내외여론을 오도하여 대륙침략의 합법적명분을 마련함으로써 또다시 이 땅우에 피묻은 군화발소리를 내보려는 군국주의자들의 무분별한 광증의 발로라는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일본이 오래전부터 《령유권》문제를 놓고 주변나라들과 마찰을 일으켜왔다는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독도강탈책동은 그 파렴치성과 횡포성,위험성에 있어서 극치를 이루고있다.
최근에도 일본은 외상을 비롯한 정부각료들을 적극 내세워 독도《령유권》주장을 계속 여론화하도록 하고 정부홈페지에 날조된 독도관련자료들을 57점이나 새로 게재하였는가 하면 내외의 비난과 엄중한 악성전염병사태에도 불구하고 정부관료의 참석하에 《다께시마의 날》행사를 끝끝내 강행하였다.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이라는자는 자국내 일부 언론들이 아직도 독도와 관련한 보도에서 《다께시마》와 《조선명 독도》를 계속 함께 사용하고있다고 앙탈을 부리면서 《일본의 고유한 령토라고 인정하지 않고있는듯 한 표현으로 될 우려가 있다.》는 나발을 불어댔다.
지금 일본은 독도《령유권》에 관한 지속적인 여론화로 그 수역을 분쟁지역으로 국제사회에 각인시킨 다음 《령토주권회복》의 구실밑에 세계의 면전에서 대륙침략의 포성을 뻐젓이 울리려 하고있다.
일본의 끊임없는 령토야욕,날로 로골화되는 재침야망,《전수방위》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급격히 팽창되고있는 《자위대》무력,외딴섬탈환훈련 등 빈번히 벌어지는 침략적인 군사연습이 그를 실증해주고있다.
독도는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우리 민족의 신성한 령토이다.
만일 일본이 이 엄연한 력사적사실,국제법적으로 공인된 명백한 현실을 뒤집으려고 발악한다면 돌이킬수 없는 큰 재앙에 부딪칠수밖에 없다.
일본은 독도강탈야망이 가져올 파국적후과에 대하여 숙고해야 할것이다.(전문 보기)
일제의 야수적본성을 보여주는 극악한 대학살범죄
지난날 우리 나라를 군사적으로 강점한 일제는 급격히 높아가는 우리 인민의 반일기운을 폭력으로 억누르고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일제는 총독통치를 실시하는 첫 시기부터 각종 폭압기구들과 《범죄즉결령》, 《조선형사령》, 《조선태형령》을 비롯한 파쑈적인 악법들을 조작하여 아무러한 법적수속이나 재판도 없이 조선사람들을 마음대로 살해할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일제는 식민지통치 전기간 자주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하면서 대중적학살만행을 일삼았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본제국주의의 력사는 조선인민에게 커다란 불행과 재난만을 가져다준 죄악의 력사로 얼룩져있습니다.》
대구참살사건을 비롯하여 3.1인민봉기때 일제가 감행한 대중적학살만행들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산물이였다.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시작된 대중적인 독립시위투쟁을 봉화로 하여 력사적인 인민봉기가 전국각지에서 일어났다.8일 대구에서도 수많은 학생들과 애국적인민들이 거리로 떨쳐나왔다.그들은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며 일제와 맞서 용감히 싸웠다.
봉기자들은 일제침략자들의 야만적인 무단통치로 말미암아 쌓이고쌓인 민족적울분을 터뜨렸다.
대구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려고 달려든 일제침략자들은 적수공권의 평화적시위대렬에 총탄을 마구 퍼부어댔다.
시위자들이 무리로 쓰러지고 거리와 마을이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하였다.일제는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려는 유가족들에게까지 칼을 휘두르며 폭행을 가하였다.지어 부상자를 치료한다고 하여 의사들과 그 가족들을 총칼로 위협하고 체포해갔으며 악착한 고문을 들이댔다.
일제는 한 청년이 아버지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랑독하자 그에게 달려들어 일본도로 찔러 피투성이로 만들어놓았다.그리고는 그와 아버지를 감옥에 끌고가 악행을 가하던 끝에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였다.
일제의 만행에 의하여 대구에서는 숱한 사상자가 나고 수많은 무고한 인민들이 검거투옥되였다.
다른 지역들에서도 눈뜨고 볼수 없는 참혹한 살인만행들이 감행되였다.
3월 3일 황해도 수안에서 일제는 시위에 떨쳐나선 인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하여 15명을 죽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상을 입히였다.한 로인이 놈들의 만행에 항의하자 그를 즉사시키였으며 로인의 안해는 남편의 시체앞에서 통곡을 한다고 하여 총으로 쏘아죽이였다.
3월 4일 함흥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놈들은 쇠망치와 쇠갈구리, 곤봉과 기타 살인흉기들을 들고 시위군중에게 달려들어 까고 찌르고 하여 삽시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중상을 입혔다.일제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조선사람들을 경찰서에 끌고갔는데 이날 구금된 사람만 해도 약 700명에 달하였다.
3월 7일 곽산일대에서는 적지 않은 인민들이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합세하여나섰다.급기야 달려온 일제군경들은 긴칼과 쇠갈구리로 시위자들에 대한 살륙만행을 감행하였다.이것도 모자라 이 지방의 여기저기를 싸다니며 무고한 주민들을 체포하여 악행을 가하였다.
당시 일제는 검거투옥한 봉기자들을 짐승도 낯을 붉힐 야만적인 방법으로 살해하였다.
교형리들은 총살하는것은 《흥미없는 일》이며 조선사람에게는 칼을 쓰는것도 아깝다고 하면서 팔과 다리를 네마리의 소나 말에 비끄러매고 채찍으로 때려몰아 사지를 찢어죽이거나 작두로 목과 팔다리를 잘라 나무에 매달아놓았다.또한 검거한 봉기자들을 앉혀놓고 쇠몽둥이와 갈구리로 뒤통수를 때려 머리뼈를 부스러뜨리였고 단도로 온몸을 마구 찔러 피범벅을 만들었으며 일본도로 내리쳐 몸을 두동강내여 죽이였다.(전문 보기)
소식 : 력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미래는 없다
일본이 유엔인권리사회 제46차회의에서 과거 일제의 특대형반인륜범죄를 청산할데 대한 우리의 주장이 무근거한것이라는 철면피한 궤변을 내뱉아놓았다.
세계최대의 랍치범죄국인 일본의 뻔뻔스러운 력사외곡행위가 처음이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피해자들을 2중, 3중으로 중상모독하고 칼질하려 드는데 대해 엄중시하지 않을수 없다.
부언하건대 과거의 특대형반인륜범죄에 대해 그 근거조차 부정해버리면서 강변해나서는것은 체질적으로 굳어진 전범국 일본특유의 악습이다.
시궁창의 악취를 덮을수 없듯이 일본이 전대미문의 반인륜범죄행위를 부정하려들면 들수록 그 침략성과 야만성, 도덕적저렬성과 파렴치성은 더 부각될뿐이다.
과거 일제가 조선에서 감행한 온갖 악행들은 그 무엇으로써도 정당화될수 없고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극악한 반인륜범죄이다.
돌이켜보면 1919년 3.1인민봉기의 야수적탄압과 1920년《경신년대토벌》의 감행, 1923년 간또대지진시의 조선인대학살, 1926년 6.10만세시위투쟁의 진압, 731부대의 세균전과 생체실험만행 등은 이르는곳마다에서 적수공권의 무고한 인민들과 애국자들의 피가 바다를 이루게 하였으며 그 야수성과 악랄성에 있어서 히틀러파쑈도당도 무색케 하는것이였다.
일제가 지난 세기 우리 나라를 비롯한 아시아나라들을 침략하고 강제랍치련행, 대량학살, 성노예강요 등을 국책으로 삼고 자행한데 대해서는 생존피해자들과 가해자들, 목격자들의 증언,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들과 일제의 조선강점통치기구들의 자료들, 일본과 세계각국의 언론출판물들에 의하여 국가적범죄라는 사실이 이미 적라라하게 폭로되였으며 오늘날에도 계속 발굴되는 조사자료들에 의해 립증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당국자들이 국제무대에서까지 침략력사를 부정하는 망발을 늘어놓고 일본군성노예들을 추모하는 소녀상들이 세계도처에 세워질 때마다 줄줄이 나서서 철거시키지 못해 안달복달하는것은 세계의 정의와 인류의 량심에 도전하는 오만한 행태이다.
물고기는 대가리부터 썩는다는 말이 있다.
일본에서 강행되고있는 정부에 의한 력사외곡행위는 일본사회를 반동화의 길로 몰아가는 근본원인으로 되고있다.
최근 일본국내에서 《새 력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비롯한 극우익반동세력들이 어느 한 출판사가 발행한 중학교력사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의 기술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망동을 벌려놓은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덕과 정이 메마를대로 메말라 혈육간에 서로 죽일내기가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일본사회의 말세기적풍조도 명백히 반동화되고 우경화된 정치풍토에 기인되는것이다.
일본이 잘못된 과거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과 사죄를 하지 않는것은 피비린내나는 과거사를 답습하겠다는것이나 같다.
이런 나라가 언제가도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을수 없다는것은 자명하다.
력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미래는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일본연구소 연구원 김설화
[사진과 글] : 더욱 굳세여지는 반일의지
과거 일제의 천인공노할 살륙만행으로 삼천리강토가 피바다로 변하였던 3.1인민봉기!
그때로부터 한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르고 강산은 열번도 더 변하였지만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반일의지는 조금도 변함이 없으며 더욱더 굳세여지고있다.
아래의 사진을 보라.
지난 1일 남조선의 민주로총과 《한국로총》이 3.1인민봉기날을 맞으며 서울 룡산역광장에 위치한 일제강제징용로동자상앞에서 일본의 과거죄악을 반드시 청산하고야말 맹세를 다지는 모습이다.
조선을 비법강점한 후 40여년간 류례없이 가혹한 식민지통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노예의 운명을 강요하고 조선에서 인적, 물적자원을 수많이 략탈해가다 못해 조선사람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았던 불구대천의 원쑤가 바로 일본침략자들이였다.
오늘 일본반동들은 지난날 저들이 저지른 죄과에 대해 사죄하고 반성하며 배상할대신 과거범죄를 한사코 부정하면서 사죄와 배상의 책임에서 벗어나보려고 교활하게 책동하고있다. 지어 파렴치하게 력사를 외곡하며 령토강탈야망을 실현해보려고 날뛰고있다.
하기에 남조선인민들은 일본반동들의 망동을 준렬히 단죄규탄하면서 과거범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청산하고야말 굳은 결의를 다지는것이다.
그들은 똑똑히 알고있다. 과거 일제의 죄악을 청산하지 않는다면 일제식민지통치의 피눈물나는 력사가 또다시 되풀이될수 있다는것을.
일본반동들이 파렴치하게 놀아댈수록 전체 조선민족의 반일의지는 더욱더 굳세여질것이다.(전문 보기)
재일동포들 일제과거범죄청산을 요구하여 초불투쟁 전개
3.1인민봉기 102돐을 계기로 재일동포들이 1일 일본 도꾜의 신쥬꾸역앞에서 일제의 과거범죄청산을 요구하는 초불집회를 가지였다.
일본의 평화애호적인 시민들도 여기에 합세하였다.
발언자들은 일본에서 3.1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집회를 가진것은 과거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지배라는 범죄를 용서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과시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였다.
일제식민지통치의 직접적피해자들이며 그 후손들인 재일조선학생들과 어린이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차별책동이 날로 로골화되고있다고 그들은 단죄하였다.
그들은 일본의 과거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고 조선학교차별책동철회를 위해 투쟁해나갈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조선반도의 긴장격화에 편승하여 《적기지공격능력》보유를 노리고있는 일본의 움직임은 《선제공격을 가능하게 하는 아주 위험한 행위》이라고 그들은 까밝혔다.
그들은 3.1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일본의 재침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에 떨쳐나설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집회참가자들은 《조선학교에 고등학교지원제도적용을!》 등의 프랑카드와 초불을 들고 일본의 과거범죄청산, 조선반도의 평화실현을 강력히 요구하였다.(전문 보기)
너절하고 고약한 민족배타주의적망동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평양 3월 3일발 조선중앙통신)
최근 일본의 지방재판소들이 고등학교무상화대상에서 조선학교들을 제외시킨 당국의 조치에 《적법》의 판결을 내리는짓을 감행하였다.
이것은 법적인 공정성을 상실하고 세계인권선언과 해당 국제법에 위반되는 행위인 동시에 일본반동들의 재일조선인배척과 민족교육탄압을 로골적으로 비호조장하는 너절한 행태이다.
자기 나라에 거주하고있는 외국인들에게 제 나라,제 민족의 말과 문화를 배우고 계승해나갈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해주는것은 일본정부가 비준한 국제인권규약에 명기되여있는 주요내용의 하나이다.
1948년에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에도 모든 사람은 법앞에서 평등하며 어떠한 차별도 없이 평등한 법적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밝혀져있다.
더우기 일제식민지통치의 직접적피해자들인 재일조선인들과 그 후손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온갖 조건을 마련해주는것은 가해자인 일본이 지닌 도덕적의무이며 책임이다.
그러나 일본반동들은 자국땅에 조선학교가 생겨난 첫날부터 그것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장장 수십년세월 갖은 박해를 다하다 못해 조선학교의 교육활동이 저들의 교육내용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터무니없이 걸고들면서 조선학교를 고등학교지원제도적용대상에서 제외시키는 폭거를 감행하였다.
오늘 일본반동들은 조선학교 학생들은 물론 천진란만한 유치반 어린이들에게까지 비렬한 민족차별정책을 실시하고있다.
당국의 이러한 민족배타주의적망동을 공공연히 정당화하는 일본재판기관들의 너절하고 고약한 처사는 우리 공화국과 우리의 존엄높은 합법적해외공민단체인 총련을 적대시하고 재일조선인들의 민족교육을 말살하려는 일본반동들의 악의에 찬 편견과 흉심이 얼마나 극도에 이르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죄악으로 가득찬 과거에 대해 사죄하고 반성할 대신 새로운 범죄를 덧쌓고있는 파렴치한들의 망동은 지금 전체 조선인민의 반일감정을 극도로 고조시키고있다.
일본반동들은 우리 인민의 격앙된 대일결산의지를 똑바로 알고 분별없이 날뛰지 말아야 한다.(전문 보기)
온 강토를 피로 물들인 야만적인 탄압만행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
강도 일제를 반대하는 3.1인민봉기가 일어난 때로부터 102년이 되였다.
3.1인민봉기는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사에 자기의 뚜렷한 자욱을 남긴 전민족적반일항쟁으로서 오늘도 전체 조선인민의 기억속에 력력히 남아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조선에서 세계력사상 류례없는 잔인무도한 총독정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인민을 야만적방법으로 통치하였습니다.그들은 조선의 가는 곳마다에 군대, 헌병, 경찰을 비롯한 온갖 폭압기구들을 수많이 늘어놓고 조선인민의 초보적인 권리와 자유마저 모조리 빼앗았으며 우리 인민을 가혹하게 탄압학살하였습니다.》
3.1인민봉기는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애국투쟁이였다.그러나 일제는 우리 인민의 정의로운 항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하는 극악한 범죄적만행을 저질렀다.
우리는 3.1인민봉기때 일제가 감행한 반인륜범죄를 다시한번 온 세상에 폭로하기 위하여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실장 박사 부교수 위광남선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자:우선 3.1인민봉기가 어떻게 되여 일어났는가에 대하여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실장: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우리 인민의 반일투쟁을 말살하며 우리 나라에 대한 강점을 영구화하기 위하여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무단통치는 일제가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실시한 중세기적공포정치를 말한다.
일제는 이 기간 각종 폭압기구들과 《범죄즉결령》, 《조선형사령》, 《조선태형령》 을 비롯하여 각종 파쑈적인 악법들을 조작해냈으며 우리 인민의 사소한 반일운동이나 지어 학생들의 운동회까지 탄압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조선총독이였던 데라우찌가 《조선사람은 일본법률에 복종하든가 아니면 죽어야 한다.》는 망발을 서슴없이 늘어놓은것만 보아도 무단통치가 얼마나 극악하였는가를 잘 알수 있다.
더이상 참을수 없었던 우리 인민은 반일봉기에 떨쳐나섰다.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시작된 대중적인 독립시위투쟁을 첫 봉화로 하여 봉기는 전국적판도에로 급속히 번져졌다.
3.1인민봉기는 일제의 야만적인 무단통치하에서 모진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온 조선민족의 쌓이고쌓인 울분과 원한의 폭발로서 자주독립을 위한 우리 인민의 정의의 투쟁이였다.
기자:우리 인민의 거세찬 반일투쟁기운에 겁을 먹은 일제가 세상사람들을 경악케 하는 야수적인 방법으로 3.1인민봉기를 탄압하지 않았는가.
실장:3.1인민봉기는 평화적인 시위였다.
하지만 일제는 완전무장한 침략무력을 동원하였다.
평양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일제헌병과 경찰은 총출동하여 현장에서 평화적시위자들에 대한 폭행을 감행하였다.
많은 지역들에서 놈들은 총칼로 시위군중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기발을 흔들며 《조선독립 만세!》를 웨치던 나어린 한 녀학생의 바른팔을 칼로 잘랐으며 그가 왼손에 기발을 바꿔쥐고 만세를 부르자 왼팔마저 무자비하게 잘라버리였다.3월 3일 안주에서는 일본헌병대 40~50명이 총을 쏘고 검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죽이였다.당시의 실상에 대하여 어느 한 자료에는 《헌병대장이 검을 뽑아서 고수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그 부하로 하여금 총을 쏘게 하여 우리 군중이 총탄에 맞아 넘어진자가 50여명에 달하였다.》라고 기록되여있다.
시위가 벌어진 모든 지역에서 일제침략군과 헌병, 경찰들은 평화적시위군중에게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하였고 각종 흉기를 휘둘러 남녀로소 가림없이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하였다.
기자:일제가 《특별검거반》이라는것까지 조직하여 우리 인민들을 살륙하였다는 자료도 있지 않는가.
실장:일제는 《특별검거반》이라는것을 만들어가지고 시위현장에서만이 아니라 시위가 일어났던 지역의 마을들을 습격하여 애국적인민들에 대한 체포와 투옥, 잔인한 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제암리에서 감행된 학살만행이 대표적인 사건들중의 하나이다.
1919년 4월 중순 일제침략군 보병제79련대소속의 중위 아리다라는 놈은 11명의 살인마들을 끌고 제암리에 기여들어 마을사람들을 할 이야기가 있다고 꼬여냈다.그리고는 교회당에 가두어넣고 문을 페쇄한 다음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하였다.(전문 보기)
반드시 심판받아야 할 죄악의 력사
요란한 말발굽소리와 자지러진 총소리, 칼을 휘두르는 소리 …
수많은 군중이 일제군경들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용감히 맞서싸운다.
그속에서 량팔은 일제의 군도에 의해 뭉청 잘리웠어도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일제군경들을 공포에 떨게 한 녀학생의 웨침소리가 들린다.
《조선독립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이것은 영화의 장면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02년전인 3월 1일 온 강토가 피로 물들여졌던 우리 나라에서 실지 있었던 일이다.
1919년 3. 1인민봉기는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온 민족이 일제에 대한 쌓이고쌓인 울분을 터뜨린 분노의 항거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항쟁이였다.
3. 1인민봉기를 통하여 조선인민은 결코 남의 노예로 되기를 원치 않는 인민이라는것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하지만 자기의 강토, 민족의 자주권, 인간의 참다운 삶에 대한 정당한 요구에 날강도 일제는 과연 어떻게 대답해나섰던가.
일제는 완전무장한 조선주둔군무력을 비롯한 헌병, 경찰, 소방대 등 폭압력량을 총동원하여 3. 1인민봉기를 무차별적으로 탄압해나섰으며 그것으로도 성차지 않아 본토의 병력까지 끌어들이였다. 놈들은 숱한 폭압력량을 봉기진압에 내몰면서 주저없이 총탄을 퍼부으라는 지시까지 내리였다.
총살하는것은 《흥미없는 일》이며 조선사람에게는 칼을 쓰는것도 아깝다고 하면서 팔다리를 네마리의 소나 말에 매여 채찍으로 내몰아 사지를 찢어 죽이거나 작두로 목과 팔다리를 잘라 나무에 매달아놓은것을 비롯하여 일제의 야만적인 행위를 일일이 꼽자면 끝이 없다.
3. 1인민봉기에 대한 야수적인 탄압은 강도적인 침략자이며 악독한 살인귀인 일제침략자들만이 감행할수 있는 특대형반인륜적, 반민족적죄악이다. 오죽했으면 일본의 한 어용학자까지도 《일본인들은 차마 볼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탄압에 광분하였다. 일본헌병의 포악성은 형언할수 없는바 그들은 늙은이와 부녀자, 어린이들까지 총검으로 찔러죽이고 목을 달아매여 죽였다.》고 개탄하였겠는가.
이처럼 력사에 류례없는 일제의 폭압에 의하여 불과 몇달사이에 10여만명의 조선사람들이 참혹하게 살륙당하고 삼천리강토는 피바다로 변하였다.
그때로부터 옹근 한세기가 넘었다. 그러나 령토팽창야망과 인간증오사상을 버리지 못한 일본반동들은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피비린 과거죄악에 대해 반성하고 응당 사죄와 배상을 할 대신 파렴치한 력사외곡과 조선반도재침책동에 의연히 매여달리고있다.
어떻게 하나 과거죄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배상을 모면해보려는 일본반동들의 파렴치성, 비인간성은 극도에 이르고있다.
전체 조선민족은 3. 1인민봉기를 야수적으로 탄압한것을 비롯하여 과거 일제가 우리 인민앞에 저지른 죄악의 력사를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며 반드시 그 대가를 청산하고야말것이다.(전문 보기)
무력에 의한 위협공갈로 불평등조약을 강요한 죄악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우리 인민에게 온갖 불행과 고통을 들씌운 일제의 죄악에 찬 력사에는 무력에 의한 위협공갈로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강요한 범죄행위도 기록되여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 나라를 침략한 력사를 잊지 않고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45년전인 1876년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봉건정부를 강박하여 《강화도조약》을 조작하였다.
《강화도조약》은 《명치유신》후 호전적인 일본사무라이들이 들고나온 날강도적인 《정한외교》정책의 범죄적인 산물로서 그 직접적인 조작구실로 리용된것이 《운양》호사건이다.
1875년 8월(양력9월) 일본군함 《운양》호는 항행도중 먹는물을 얻는다는 명색밑에 아무런 통고도 없이 우리 나라의 령해인 강화도 초지진앞바다에 불법침입하여 파괴와 략탈을 일삼았다.이 사건은 일본이 무력침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도발한것이였다.
《운양》호의 강도적인 범죄행위는 조선군사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응당한 징벌을 받았다.
이를 구실로 일본은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화하기 위한데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일본정부는 《정한외교》정책의 변종인 《평화협상외교》정책을 내놓고 조선봉건정부에 예속적인 《수호통상조약》을 강요하기 위한 방안이라는것을 꾸미였다.그것은 첫째로 《운양》호사건의 모든 책임을 조선측에 넘겨씌워 《사죄》와 《배상》을 인정시킨다는것이며 둘째로 힘에 의한 위협과 공갈의 방법으로 조선측을 강박하고 《굴복》시킨다는것이였다.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서라도 기어이 조선을 침략하고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심은 조선봉건정부와의 협상과정에 더욱 적라라하게 드러났다.
일본은 《운양》호가 청나라로 항행하던 도중 포격을 받은 실상을 알아보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겠다는 문서를 조선봉건정부에 전달하겠다고 하면서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고 위협하였다.그리고 1876년에 포악무도하고 생트집을 거는데서 유명한 구로다를 우두머리로 한 대표단과 함대를 파견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강도적요구를 들이대는 한편 저들의 병력수를 과장하면서 조선봉건정부를 공공연히 위협공갈하였다.(전문 보기)
■ 관련자료:
날강도적인 문서로 조선강점의 발판을 마련한 만고죄악
지금으로부터 117년전 일제가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강점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려고 조선봉건정부에 강요한 침략적인 문건이 있다.그것이 바로 《한일의정서》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강점이 후안무치한 강도행위였다는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의정서라고 하면 국가들사이의 합의를 표시하는 문건의 하나로 알려져있다.의정서는 철두철미 국가들사이의 호상존중과 쌍방의 리익을 도모하는것을 전제로 하여 체결된다.
하지만 《한일의정서》는 이 원칙을 떠나 일제의 일방적인 폭력과 위협, 압력에 의하여 조작된 날강도적인 문서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렬강들의 움직임은 보다 강화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조선에 대한 군사적강점을 다그치기 위한 또 다른 강도적문서를 조작하려고 날뛰였다.
1903년 9월 일본외무대신은 조선봉건국가주재 자기 나라 공사에게 《일한간의 비밀조약에 관한 건》이라는 비밀지령을 주었다.
뒤이어 일본정부는 《각의》에서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통치하는것이 목적이지만 명목상으로는 《보호적인 조약》을 체결하는것이 가장 편리하다는 내용으로 된 《조선침략안》을 고안해냈다.
그러나 일제의 《의정서》조작책동은 조선봉건정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하여 일제는 로일전쟁의 도발과 함께 침략무력을 우리 나라에 대대적으로 들이밀었다.
일제는 1904년 2월초 미리 편성해놓았던 침략무력에 출동명령을 내리였다.이에 따라 일제의 침략무력은 사세보군항을 출발하였다.한성에 도착한 일본침략군선발대는 위협적인 군사적행동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일제의 파렴치하고 악랄한 침략행위에 대해 당시의 도서 《매천야록》은 이렇게 전하였다.
《왜군이 인천에서 한성에 들어온것이 병졸이 5만명이고 말이 1만여필로서 황궁과 관청, 지어는 일반살림집까지 점령하였으며 남방으로부터는 왜군이 동래를 거쳐 대구로 나아가고 남해를 거쳐 남원으로 나갔으며 군산을 거쳐 전주로 나아갔다.그리고 서로에는 평양, 삼화, 북로에는 원산, 성진에서 호상간의 거리를 수백리로 하여 점차… 나아갔다.》
이렇듯 수많은 침략무력을 끌어들인 일제는 조선봉건정부의 최고통치자와 관리들에 대한 위협공갈과 랍치 등을 감행하며 강압적인 《의정서》체결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였다.
고종황제가 《의정서》체결을 거부하여 피신할수 있다는것을 우려한 일제는 조선의 《황실과 령토보존》을 위한것이라고 떠벌이며 침략무력을 동원하여 황궁을 봉쇄하였다.이와 함께 일제는 《한일의정서》조작책동을 완강히 반대해나선 탁지부대신 겸 내장원경이였던 리용익, 륙군참장 리학균 등을 제거하기 위한 책동에도 집요하게 매여달리였다.결과 리용익은 일제에 의해 랍치당하여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였다.
1904년 2월 23일에 조작된 《한일의정서》는 일제의 끈질기고도 날강도적인 군사적폭압책동의 산물이였다.
《한일의정서》는 《보호》의 간판밑에 우리 나라의 자주권을 말살하고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기 위한 일제의 범죄적기도로 일관된 파렴치한 침략문서이다.
모두 6개 조항으로 된 《한일의정서》에는 《영원한 친선》이니, 《동양의 평화》이니, 조선의 《독립과 령토의 보존》이니 하는따위의 허울좋은 표현들이 들어가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것은 우리 인민을 노예화하고 우리 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흉심을 가리우기 위한 한갖 위장술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는 《의정서》에서 조선봉건정부가 일본정부의 《시정개선》에 관한 《충고》를 용납하고 일본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주어야 하며 일본군은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용할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조선의 내정에 공공연히 간섭하며 조선봉건정부를 저들의 침략전쟁수행을 위한 부속물로 만들고 우리 나라의 토지와 로력, 재물을 마음대로 강탈할수 있는 권한을 틀어쥐였다.또한 일제는 조선이 《의정서의 취지에 위반되는 협약을 제3국과 체결할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권까지도 심히 유린하였다.
이렇게 일제는 날강도적인 《한일의정서》조작을 통해 우리 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법적》구실을 마련하였다.그후 일제는 《한일의정서》를 기틀로 하여 1905년에는 《을사5조약》을, 1910년에는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하고 우리 나라를 저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전문 보기)
론문 : 일본의 독도강탈야망의 반동성
령토강탈야망에 들뜬 일본반동들의 파렴치성이 극도에 달하고있다.
얼마전 일본은 독도의 령유권이 마치도 저들한데 있는것처럼 세계여론을 오도할 목적밑에 홈페지까지 개설하고 아무러한 타당성도 없는 자료라는것들을 들어가면서 독도강탈야망을 또다시 드러내놓았다.
최근에 들어와 우심해지는 일본반동들의 독도《령유권》론은 력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하나의 망설이며 가장 악랄한 령토강탈야망으로 일관된 반동적인 침략론리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독도는 그 누구도 침해할수 없는 우리 나라의 신성한 령토입니다.》
일본의 독도《령유권》강탈야망의 반동성은 첫째로, 그것이 조선에 대한 가장 악독한 식민지지배정책의 직접적산물이라는데 있다.
근대시기 일본의 해외침략의 첫 대상으로 된것은 조선이였으며 우리 나라는 20세기초에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독도문제는 바로 이러한 일본의 조선침략정책의 발현이다.
지금까지 일본이 들고나오는 독도《령유권》주장의 《신빙성》근거는 1905년 2월 22일에 발포한 《시마네현고시 제40호》이다.
《시마네현고시 제40호》가 조작공포된 전과정을 따져보면 그것이 철저히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의 한 고리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문제의 이 공문서가 조작되기 5년전인 1900년에 조선봉건정부는 근대법적요구에 기초한 법령(칙령 41호)으로 독도가 울릉도에 속한 우리 나라 령토임을 명백히 재확인하고 《관보》(정부기관지)에 그 내용을 공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이러한 사실을 고의적으로 외면하고 독도가 저들의 령토임을 주장하는 《시마네현고시 제40호》라는 낮은 급의 지방행정기관공시문을 발포하였다. 여기에는 그들나름의 음흉한 타산이 있었다.
이 시기 일제는 조선에 대한 독점적지배권을 둘러싸고 짜리로씨야세력과 정치군사적으로 첨예한 대립상태에 있었다. 이로부터의 출로가 짜리로씨야를 군사적으로 제압하는데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1904년 2월 8일 침략적인 로일전쟁을 도발하였으며 그해 2월 23일에는 조선봉건정부를 위협공갈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압적인 방법으로 체결하였다. 6개 조로 된 이 《협정》에서는 전쟁기간 일본군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우리 나라의 임의의 지역을 군용지로 사용할수 있다는것을 못박았으며 그러한 지점의 하나로서 울릉도, 독도도 지정되였다. 뒤이어 일제는 울릉도와 독도에 해군망루를 건설하며 독도주변에 해저전선을 늘여 조선반도 북부와 울릉도-독도-일본령토를 련결하는 전선망가설을 계획하였다.
이렇게 되여 당시까지 일본인들에게 어로적《가치》로만 인정되여오던 독도가 일약 군사적요충지로 되였으며 일제는 그 지정학적가치가 새롭게 부각된 독도를 아예 일본령토로 편입하려는 야망밑에 해군성, 외무성 등 여러 성들을 발동하여 탈취작전을 벌렸다.
교활한 일제는 독도탈취에 정부가 공개적으로 나서는 경우에 일어나게 될 국제적물의를 피하기 위하여 이미 독도수역에서 어업활동을 벌리고있던 민간인어로기업가를 추동하여 《어업독점권》을 신청하게 하고 그것을 농상무성, 해군성, 내무성, 외무성 등이 《심의》하도록 하였다. 1905년 1월 10일 그 《청원》을 접수한 일본내각은 같은 해 1월 28일 독도를 일본령토로 편입한다는것을 결정하고 2월 15일에는 내무대신《훈령》으로 시마네현지사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고 현내에 고시할것을 지시하였다. 이렇게 되여 1905년 2월 22일 《다께시마편입》에 대한 《시마네현고시 제40호》가 조작되였으며 오끼도로부터 서북쪽으로 85n.mile이나 상거하고있는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다는것과 섬을 《다께시마》로 부른다는것을 내용으로 하는 고시문이 《현보》에 게재되고 이 사실이 2월 24일부 《산잉신붕》에 자그마한 보도기사로 실렸다.
이러한 음모에 뒤이어 일본 해군성은 1905년 7월 25일 독도에서 망루설치작업을 시작하여 같은 해 8월 19일에 완성하고 6명의 인원까지 배치하였다. 또한 10월 8일에는 독도와 울릉도를 련결하는 해저전선을 늘이였으며 11월 9일에는 독도와 일본본토를 련결하는 해저선부설을 완료하였다. 이 모든것은 일제가 로일전쟁을 도발하고 우리 나라를 군사적으로 강점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였으며 국제사회계도 조선봉건정부도 전혀 모르게 진행된것이였다.(전문 보기)
군사대국화를 노린 진부한 《위협》타령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평양 2월 19일발 조선중앙통신)
일본이 케케묵은 《위협》설을 또다시 늘어놓고있다.
얼마전 아이찌현에 위치한 륙상《자위대》의 가스가이주둔지에서 진행된 항공《자위대》의 《패트리오트》요격미싸일의 기동전개훈련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북조선의 탄도미싸일발사 등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것》이라고 떠들어댔다.
일본이 년초부터 지역나라들의 경계심과 우려를 자아내는 군사적망동을 벌려놓은것도 모자라 《북조선위협》타령을 해대며 감히 우리를 걸고드는데 대해 엄중시하지 않을수 없다.
《자위대》호전광들이 《북조선위협》설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며 위험천만한 군사적망동에 광분하는것은 일본사회에 반공화국대결의식을 고취하여 저들의 군사대국화책동의 명분을 마련하고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실현해보려는 흉심의 발로이다.
지금 일본정객들은 자국민심이 군사대국화야망실현에 장애물로 되고있는데 대해 불안을 금치 못하고있다.
이로부터 세력확장과 안보불안조성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군국주의해외팽창야망실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보려 하고있다.
지난해 수상 스가가 일본학술회의 새 회원으로 추천된 일부 학자들의 임명을 무작정 보류한것을 비롯하여 정부와 민간소속 단체들에 일본의 군국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입되는것을 극력 가로막고있으며 우리의 《위협》을 떠들며 군사연습을 대대적으로 감행하고있다.
그러나 그러한 책동들은 일본의 장래에 어두운 그늘만을 던지고있다.
《북조선위협》을 떠들며 증강된 《자위대》의 활동반경이 본토범위를 벗어나 전세계에로 확대되고 그 타격력이 방위수요를 초월한데 대해 일본인민들과 국제사회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있다.
이런 안팎의 분노가 일본에 어떤 화를 몰아오겠는지는 너무도 명백하다.
제반 사실은 렬도에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장본인,본토의 안전을 위협하는 당사자는 다름아닌 일본반동들이라는것을 실증해주고있다.(전문 보기)
민족말살을 노린 일제의 만고죄악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
남포시계급교양관에는 식민지통치시기 일제침략자들이 온천군 원읍로동자구에 위치한 어느 한 산에 박아놓았던 쇠말뚝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이 쇠말뚝에도 우리 인민의 민족정신을 거세말살하려든 일제의 흉심이 비껴있다.
이것은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책동이 얼마나 악랄한가를 고발하는 력사의 증거물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본제국주의는 지난날 근 반세기동안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재난과 고통을 들씌운 피맺힌 원쑤입니다.》
지난 세기 전반기 일제는 우리 나라를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조선민족을 아예 말살하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주권유린행위, 민족말살책동은 시작부터 우리 인민의 거세찬 항거에 부딪쳤다.의병투쟁과 3.1인민봉기, 6.10만세시위투쟁 등 나라의 곳곳에서 반일투쟁들이 세차게 벌어졌다.일제의 총칼에 맞아 피흘리며 쓰러지면서도 우리 인민은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며 굴함없이 싸웠다.
군사적폭력에만 의거해서는 우리 인민의 독립의지와 반항심을 꺾을수 없다고 본 일제는 우리 민족의 기를 꺾고 넋을 짓밟아버리기 위한데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수많은 어용학자들을 내몰아 우리 나라의 력사와 문화, 전통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하던 일제는 조선사람들이 산을 매우 중시하고 명산들을 신성시하고있다는것과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짊어질 뛰여난 인재배출에 대한 념원을 산에 의탁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일제는 우리 나라의 모든 지맥을 살아있는 인체로 보고 그 지맥들에 쇠말뚝을 박으면 땅이 병들며 땅이 병들면 사람도 병들어 재앙이 따르게 된다고 떠벌이면서 우리 나라의 주요산들과 지점들에 쇠말뚝을 박아놓는 전대미문의 망동을 부리였다.
쇠말뚝은 조선민족의 정기를 꺾어버리기 위해 일제가 감행한 극악무도한 책동의 산물이다.
오늘의 온천군일대에 우리 민족이 창조한 민족유산들이 많다는것을 알게 된 왜놈들은 이곳의 력사유적과 유물들을 닥치는대로 도굴략탈하는 한편 산에 쇠말뚝을 박아놓았다.
쇠말뚝이 박힌 곳에서 100m정도 떨어진 언덕에는 일제가 쇠말뚝을 박으려고 구멍을 뚫고 류황을 부어넣은 자리도 있다.
세월은 많이 흘렀어도 일제가 남긴 극악한 죄악의 흔적은 이 땅의 곳곳에 남아있다.
2011년에도 개성지구의 송악산, 천마산(당시), 지네산에서도 일제가 우리 나라 강점시기에 박은 쇠말뚝들과 그것이 꽂혀있던 자리들이 발견되였다.료해과정에 모든 쇠말뚝의 절반부분이 세멘트와 류황으로 매몰되였다는것이 확증되였다.
1946년에 처형된 한 전범자의 고백자료에 의하면 일제는 우리 나라의 수백곳에 쇠말뚝을 박았다.
동서고금에 있어본적 없는 극악한 민족말살책동을 감행한 일제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악한이며 비렬하기 그지없는 날강도이다.
지금도 계속 발견되고있는 쇠말뚝들은 지난날 일본의 극악무도한 조선민족말살책동을 만천하에 폭로해주고있다.(전문 보기)
세계최대의 랍치범죄를 덮어버리려는 파렴치한 망동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평양 2월 2일발 조선중앙통신)
얼마전 일본수상이 우리 공화국을 걸고드는 황당무계한 망언을 또다시 늘어놓았다.
중의원 본회의에서 우리의 그 무슨 일본인랍치를 운운하며 《나자신이 선두에 서서 관계국들과 긴밀히 련대하면서 전력을 다하겠다.》고 객기를 부린것이다.
도적이 도적이야 하는 격의 철면피한 이 추태는 지금 섬나라에 대한 우리 인민의 적개심을 더욱 끓어오르게 하고있다.
일본이 그토록 떠드는 랍치문제는 이미 되돌릴수 없게 다 해결된것으로서 더는 론의할 여지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를 정치적목적에 악용하고 돈벌이공간으로 써먹는 한편 철면피하게 《피해자》로 분장하며 저들이 과거에 저지른 세계최대의 국가적인 랍치범죄를 비롯한 반인륜행위들을 한사코 덮어버리려 하고있다.
일본이 다른 나라도 아닌 우리에게 감히 랍치문제를 거론한다는것자체가 어불성설이며 이것은 곧 일본의 간특성,도덕적저렬성에 대한 실증으로 된다.
사실 일본정객들이 《북조선에 의한 랍치가능성》을 떠들며 지금도 우겨대고있는 《피해자》들을 보면 하나와 같이 섬나라의 썩어빠진 정치풍토,말세기적사회풍조가 낳은 행방불명자들로서 우리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우리에게 《랍치》되였다고 하던 행불자들이 자국내에서 계속 발견되고있는 사실은 일본반동들이 떠드는 랍치타령의 허황성을 더욱더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최악의 랍치범죄국인 일본이 랍치문제를 떠들며 국제사회앞에서 노죽을 부리는 목적은 명백하다.
적대세력들과 야합하여 존엄높은 우리 공화국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정당화하는것과 함께 이를 기화로 세계면전에서 《피해자》의 억울한 흉내를 계속 내는것으로써 과거에 저지른 반인륜범죄 특히 세계최대의 랍치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나보려는데 있다.
일본이 비렬한 광대극으로 저들이 지닌 과거청산의 의무를 어물쩍 회피할수 있다고 타산하였다면 이보다 더 큰 오산은 없을것이다.
과거 수많은 조선의 청장년들을 유괴,랍치,강제련행하여 죽음의 전쟁판과 고역장으로 내몰고 20만에 달하는 우리 녀성들을 성노예로 끌고다닌 일본의 특대형범죄는 그 어떤 오그랑수로도 절대로 가리울수 없다.
일본반동들은 부질없는 랍치문제에 계속 집착하며 어리석게 놀아댈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에게 감행한 천인공노할 반인륜범죄부터 성근히 사죄하고 철저히 배상해야 한다.(전문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