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강화도조약》의 조작으로 조선민족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자본주의예속화의 문을 열어놓은 침략의 원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 론고장-
지금으로부터 135년전인 1876년에 일본침략자들은 유미렬강에 앞서 조선봉건정부를 강박하여 침략적이며 불평등적인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를 조작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이 군사적위협과 공갈,기만과 협잡의 방법으로 조작한 《강화도조약》은 장차 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일본통치층의 모략의 산물로서 조선민족의 자주권과 리익을 란폭하게 침해하고 금후 조선에 대한 유미자본주의렬강들의 침략과 식민지각축전을 유발시킨 첫 불평등조약이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는 과거 일본에 의한 《강화도조약》조작 135년을 맞으며 일본침략자들의 범죄적인 《강화도조약》조작책동의 진상과 그 후과를 온 세상에 고발하기 위하여 이 론고장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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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조약》은 명치유신후 호전적인 일본반동지배층이 들고나온 《무력에 의한 조선정복론》,날강도적인 《정한외교》정책의 범죄적인 산물로서 그 직접적인 조작구실로 리용된것은 1875년의 《운양》호사건이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일본은 〈운양〉호사건을 구실로 1876년에 침략적이며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조작하고 우리 나라를 예속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세기 중엽 일본이 명치유신으로써 개화의 길에 들어서자마자 실시한 대조선정책은 《정한외교》정책이였다.이것은 조일간의 새로운 《국교재개》협상을 요구하는 불순한 외교문서(서계)를 리조봉건정부에 강요하는 방법으로 침략적도발을 걸어 무력침공을 감행하여 조선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전변시키기 위한 침략정책이였다.
바로 이러한 강도적인 《정한외교》정책에 따라 일본침략자들은 1875년에 《운양》호사건을 도발하였다.
《운양》호사건은 1875년 9월 일본군함 《운양》호가 항행도중 먹는물을 얻는다는 명색밑에 아무런 통고도 없이 지어 일본국기도 게양하지 않고 조선의 령해인 강화도 초지진앞바다에 불법침범하였다가 조선군사들의 자위적포사격을 받은 사건이였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일본이 조선에 대한 무력침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도발한 모략사건이였다.이에 대하여 륙군대장 야마가다는 《1875년 9월 〈운양〉호 함장 이노우에소좌는 조선연해안으로부터 청나라 우장에 이르는 해로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암암리에 조선에 대한 시위운동을 실시하라는 내적훈령을 해군성으로부터 받았다.》고 하였으며 참의 기도는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이미전부터의 목적을 단숨에 달성하려고 하였다.》고 토설하였다.(《공작 야마가다 아리또모》 중,412~413페지,《기도일기》 명치 8년 12월 7일)
그러나 《운양》호사건의 진상이 내외에 알려지고 저들의 범죄적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일본정부는 그해 11월 《정한외교》정책의 변종인 《평화협상외교》정책을 내놓고 리조봉건정부에 예속적인 《수호통상조약》을 강요하기 위한 이른바 방안이라는것을 꾸미였다.
그 방안이란 첫째로,《운양》호사건의 진상을 은페하고 모든 책임을 조선측에 넘겨씌워 《사죄》와 《배상》을 인정시킨다는것이였다.
태정대신 산죠가 조선측과의 회담에 파견되는 일본전권대신 구로다 기요다까에게 준 《훈령》(총 7개 조항)에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있었다.(《근대일선관계의 연구》상권,일문,423~424페지)
산죠는 이 《훈령》이라는데서 《운양》호사건의 책임을 조선측에 무조건 전가시키는것을 원칙으로 하며 부산과 다른 한 곳을 개항지로 정하고 일본인의 자유래왕과 령사관의 설치를 보장하며 일본배의 조선령해측량과 항행의 자유 및 례조판서급의 대우를 받는 일본사신의 한성체류 등의 강도적요구를 조약문에 반영할것을 지시하였다.
끝으로 《훈령》은 회담시 리조정부가 저들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이러저러한 정황이 조성될 경우 사태정황을 본국에 알리며 차후 정부의 명령을 기다려 행동할것을 지시하였다.(《일성록》병자년 정월 4일)
이것은 청나라측의 있을수 있는 간섭을 타산한것이였다.
일본정부가 꾸민 방안은 둘째로,군사적수단에 의한 위협과 공갈의 방법으로 조선측을 강박하고 《굴복》시킨다는것이였다.
총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것은 사무라이족속들의 포악성과 호전성을 그대로 체현한 일본침략자들의 고유한 기질이였다.일본반동지배층은 《평화협상외교》정책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무력으로 조선을 정복하려는 강도적야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폭력적방법으로 조선봉건정부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기 위한 일본의 책동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와 뒤받침하에 더더욱 악랄하게 감행되였다.
이미전부터 조선에 침략의 마수를 뻗쳐온 미국은 일본을 길잡이로 내세워 저들의 조선침략야욕을 손쉽게 달성해보려는 음흉한 속심밑에 《운양》호사건이후 일본의 대조선침략책동을 각방으로 도와나섰다.당시의 주일미국공사 삥햄은 일본의 조선침략에 《지극히 동의한다.》고 떠벌이며 1871년 《신미양요》때 《실패한 미국의 옛뜻인 조선개방을 일본이 이어나갈것》을 충동질하였으며 1875년 12월 일본외무경 데라지마와의 면담시 페리의 《일본원정소사》를 쥐여주면서 조선의 《개방》을 촉구하기 위해 포함외교를 적용할것을 권고하기까지 하였다.(《일본외교문서》 제8권,일문,152~155페지)(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