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1. 고난의 행군 -김일성동지회고록《세기와 더불어》(계승본) 7
 제20장 혁명의 새로운 고조를 향하여-

주체107(2018)년 11월 25일 웹 우리 동포

 

1938년 12월초부터 이듬해 3월말까지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행군을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그 행군이 있은 때로부터 어언 반세기이상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우리 인민은 지금도 이 행군에 대하여 잊지 않고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이 행군을 통하여 이룩하신 위대한 업적과 항일유격대원들이 발휘한 불굴의 혁명정신은 우리 인민이 천추만대를 두고 따라배워야 할 귀중한 유산으로 되고있다.

이 절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력사가들과 작가들에게 들려주신 고난의 행군에 대한 회고담을 편집하였다.

 

동무들이 그동안 우리 당이 이룩한 혁명전통을 체계화하고 그것을 소개선전하는데서 많은 일을 해놓았습니다. 작가들도 혁명전통을 주제로 하는 교양적가치가 큰 문학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습니다.

고난의 행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동무들의 요청을 받은지도 이제는 퍼그나 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좀 품을 놓고 말해주자고 합니다.

우리가 고난의 행군을 한 1938년말-1939년초는 항일무장투쟁력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의 정세를 보면 우리가 대부대를 데리고 조국으로 나갈 형편이 못되였습니다. 엄광호와 같은 사람이 혁명의 저조기가 왔다고 공공연하게 떠들 정도로 정국은 우리한테 매우 불리했습니다. 그런 때에 대부대가 국내진출을 단행한다는것은 사실상 하나의 큰 모험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담하게 국내진출을 위해 압록강연안에로의 행군을 단행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우리 혁명앞에 닥쳐온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앉아서 걱정만 해가지고서는 문제를 풀수 없었습니다. 물론 밀영 같은데 들어가서 배겨있으면 한해 겨울을 무사히 보낼수도 있고 력량은 보존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현상유지나 해가지고서야 어떻게 혁명앞에 조성된 난국을 타개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힘이 들더라도 고난의 행군을 해서 조국에 나가기로 했습니다.

혁명을 계속 앙양시키자면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1938년은 서간도지구와 국내인민들의 사기가 떨어졌던 때입니다. 《혜산사건》으로 해서 수많은 지하조직원들이 잡혀가게 되자 국내혁명운동은 시련을 겪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적들은 인민혁명군이 다 망했다고 드립다 선전해대고있었습니다. 망하지 않은것을 망했다고 했지만 그런 선전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갔습니다. 적들의 선전이 가짜라는것을 잘 아는 사람들조차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수 없을 정도로 인민들한테 굴러들어가는것은 모두가 흉흉한 소식들뿐이였습니다. 한다하는 혁명가들조차도 신심을 잃고 백두산쪽만 바라보았습니다.

선전활동을 하는데서는 적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들은 막강한 선전수단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선전활동을 할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어디에서 혁명군이 《전멸》되였다는 충격적인 기사를 신문에 그럴듯하게 실어 수만부 내보내면 그 기사를 수천수만명이 보았습니다. 방송도 그 선전에 합세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선전수단이란 대내에서 발간하는 몇종의 신문, 잡지들과 선동삐라, 격문 같은것들이 고작이였습니다. 거기에 각 지방의 지하조직들에서 찍어내는 얼마간의 인쇄물이 있었을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힘들게 배포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한장의 삐라를 뿌린것때문에 목숨을 내놓은 애국자들도 있었습니다. 한배낭쯤 되는 삐라를 지고 국내에 들어가자고 해도 지하공작원들은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혁명군이 녹아났다고 적들이 선전할 때 그것을 허위라고 까밝히며 혁명군이 살아있다고 선전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국내에 들어가서 총소리를 내는것이였습니다. 총소리만 내면 지하조직도 많이 내올수 있었습니다.

서간도에서 온 련락원의 말에 의하면 장백지구의 지하조직들은 대부분 파괴되였다고 하였습니다. 국내에서도 숱한 사람들이 검거되였는데 살아남은 조직원들은 어디에 가 숨었는지 련계를 지을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보고들을 받고나서 아무리 다 마사졌다고 해도 그루터기야 좀 남아있을수 있지 않겠는가, 그루터기만 남아있으면 조직들을 다시 부활시킬수 있을것이다, 어쨌든 장백에 나가서 조직을 수습해놓고 그런 다음 조국에도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마당거우에서처럼 한해 겨울동안 밀영에 들어앉아 군정학습을 하다가 날씨가 따뜻해진 다음에 새로운 작전을 펼쳐도 되지 않는가, 엄동설한에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을 따를수 없었습니다. 국내의 반일투쟁이 준엄한 시련을 겪고있는 때에 어떻게 앉아서 보고만 있을수 있겠습니까. 고생이란거야 혁명초기부터 밥먹듯 해온것이니 새삼스러울것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뭐 력사에 없는 고생을 한두번만 해왔습니까. 국내의 반일투쟁이 시련을 겪고있고 국내인민들이 백두산쪽만 쳐다보는데 조국해방의 사명을 스스로 걸머지고 나선 혁명군이 팔짱을 끼고 그것을 강건너 불보듯할수야 없지 않습니까.(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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