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들처럼 살며 투쟁하자! : 나라의 신경을 지켜 복무의 자욱을 변함없이 새겨가는 참된 일군 -황해남도체신관리국 과장 리명호동무에 대한 이야기-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그 어떤 난관과 시련앞에서도 주저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참된 애국의 한길을 걷는 사람, 조국과 인민이 맡겨준 혁명과업을 한치의 드팀도 없이 제때에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 진짜애국자입니다.》
황해남도체신관리국에 제대배낭을 푼 때로부터 지난 10여년간 우리의 주인공이 걸어온 삶의 자욱에는 참으로 의미심장하고도 값진 인생의 철리가 새겨져있다.
자기가 맡은 초소를 나라의 신경, 혈맥으로 여기고 불타는 열정과 완강한 실천력으로 짧은 기간에 도내 체신부문의 현대화와 물질기술적토대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였으며 농업과 교육을 비롯한 여러 부문의 정보화실현에 적극 기여하고있는 황해남도체신관리국 과장 리명호동무,
우리는 그의 삶과 투쟁을 통하여 다시금 확신하게 된다.
조국과 시대앞에 지닌 자기의 의무를 심장으로 자각할 때, 그 의무를 지키는 길에서 변함없는 복무자의 자세로 살며 일할 때 그런 삶은 조국이 기억하고 인민이 평가하는 값높은 삶으로 된다는것을.
나의 군사복무는 끝나지 않았다
긍지스럽고 보람찼던 나날에 대한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다.
리명호동무에게 있어서 혁명의 군복을 입고 조국보위초소에서 보낸 30여년은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한생의 귀중한 재부였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기가 할바앞에서 주저하거나 물러서지 말거라.》
이것은 김책공업대학(당시) 입학통지서를 조선인민군입대증으로 바꿔쥐고 조국보위초소에로 떠나던 날 환송열기로 끓어번지는 역두에서 그에게 아버지가 한 부탁이다.이것은 아버지이기 전에 전세대가 새 세대에게 의무에 대한 자각을 심어준 첫 당부였다.
때는 1976년 8월, 판문점사건으로 온 세계가 떠들썩하던 그 시각 리명호동무는 전쟁로병인 아버지의 당부를 심장에 새기고 전선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시작된 군사복무였다.즐거움과 랑만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어려움도 많았던 시절이였다.눈보라치는 겨울에도, 뙤약볕 내려쪼이는 한여름에도 부대의 지휘통신보장을 위해 늘 무선통신기재를 둘러메고 조국의 산야를 누벼가던 나날 그는 복무자의 자각을 말이나 글줄이 아닌 병사의 땀젖은 군복속에 새겨넣으며 성장했다.
하기에 입대한지 한해도 못되여 유능한 통신병이 된 리명호동무는 21살의 애젊은 나이에 조선로동당원의 영예를 지니였고 그후 어깨에 별을 단 군관으로 복무의 길을 이어가는 나날에도 맡겨진 전투임무수행의 앞장에 섬으로써 언제나 부대의 자랑으로 되였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리명호동무는 제대되여 황해남도체신관리국 부원으로 배치받았다.
첫 출근을 앞둔 날 밤 그는 잠을 이룰수 없었다.이제는 그토록 정이 든 군복을 다시 입을수 없다고 생각하니 허전한 심정을 금할수 없었고 그럴수록 한생 마음의 군복만은 벗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다졌다.다음날 아침 거울앞에서 오래도록 옷매무시를 바로잡는 그에게로 안해가 다가왔다.
《대렬검열을 받기 위해 군복차림새를 깐깐히 살펴보던 그 습관은 여전하구만요.》
리명호동무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난 군사복무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소.》
얼마후 그는 단정한 옷차림새로 집뜨락을 나섰다.그리고 힘찬 발걸음을 내짚었다.비록 초소는 바뀌고 맡은 임무도 다르지만 조국을 위한 복무자의 변함없는 그 자세로!
그가 도체신관리국 부원으로 임명되여 첫 과업을 받았을 때였다.그것은 도내 어느 한 지역의 통신망구성에 대한 자료작성이였는데 별로 큰 품을 들이지 않아도 될 과제였다.
다음날 저녁이였다.리명호동무가 내여민 문건에 눈길을 주던 관리국일군은 저으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자료의 정확성이 나무랄데 없는데다가 과제에 밝혀져있지 않은 통신망의 불합리한 구조와 그 해결대책까지 구체적으로 첨부되여있었던것이다.
《자료작성을 위해 그 먼곳까지 직접 다녀왔소?》
일군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리명호동무를 바라보았다.바지가랭이에 묻은 흙탕물이며 땀배인 자욱이 채 마르지 않은 옷…
얼마후 관리국에서는 새로 온 부원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갔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