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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 유가족협회 대변인담화
인류력사에는 수많은 반인륜적대량학살사건들이 기록되여있지만 일본처럼 제땅에서 일어난 자연재해까지 타민족말살의 기회로 삼고 광란적인 살륙만행을 벌려놓은 례는 없었다.
1923년 9월 1일 돌발적으로 일어난 대지진과 그로 인한 화재로 하여 도꾜, 요꼬하마를 비롯한 일본의 간또지방은 불바다로, 페허로 화하였으며 수많은 사상자, 행방불명자가 발생하고 사람들속에서는 아무런 구제대책도 취하지 않고있는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였다.
일본정부는 지진으로 인하여 조성된 심각한 사회정치적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조선사람들에 대한 학살만행을 조작하였다.
언론기관들을 내세워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있다.》, 《조선인이 일본인을 전멸시키고 일본을 빼앗으려 한다.》는 허위와 기만에 찬 선전을 대대적으로 벌리면서 민족적대립감정을 격화시켰으며 《도로에 나타나거나 가옥 및 기타 장소에 숨어있는 조선인들을 남녀로소의 구별없이 모조리 살해할것》이라는 살인명령을 하달하였다.
군대와 경찰은 물론 《자경단》, 《청년단》과 같은 어용단체들까지 사람잡이에 미쳐돌아가면서 불과 열흘남짓한 기간에 2만 3 000여명에 달하는 무고한 조선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간또대지진을 계기로 감행된 조선인살륙만행은 결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나 몇몇 고위인물들에 의하여 꾸며진 개별적인 테로행위가 아니라 정권유지를 위한 출로를 타민족에 대한 배타주의를 고취하는데서 찾은 일본정부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감행된 무차별적인 대량학살범죄였다.
일본사무라이고유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그대로 보여준 간또조선인학살사건은 마땅히 이미 오래전에 그 진상이 밝혀지고 주모자들은 력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하였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일본당국은 간또조선인학살사건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느니, 《력사가들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느니 하면서 그에 대한 국가적책임을 부정하고있다.
뿐만아니라 지난 시기의 수법그대로 반공화국모략선전으로 우리 공화국에 대한 거부감,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총련과 재일조선공민들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고 자국민들을 재침야욕실현의 동조자로 만들려 하고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땅이 조금만 흔들려도 인터네트에 재일조선공민들에 대한 혐오스러운 발언들이 나돌면서 간또조선인학살사건때의 악몽을 되살리게 하고있으며 그들의 생명과 권익이 엄중한 위협을 받고있다.
죄는 지은데로 가기마련이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뀐다 해도 우리는 간또조선인학살사건을 비롯하여 일본이 조선민족에게 저지른 가지가지의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들에 대하여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며 반드시 천백배의 대가를 받아내고야말것이다.
일본당국은 우리 인민의 대일결산의지를 똑바로 알고 이제라도 조선민족에게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들에 대하여 성근하게 사죄하며 철저히 배상하여야 할것이다.
주체111(2022)년 9월 1일
평양
투고 : 언제가도 정치난쟁이의 신세에서 벗어날수 없다
오늘 국제정치무대를 살펴보면 제아무리 거인행세를 하려고 해도 난쟁이취급을 당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섬나라 일본이다.
이른바 《경제발전》을 떠들면서 서방렬강들의 틈에도 끼우고 돈주머니를 흔들며 그 무슨 《공헌》에 대해 목이 쉬도록 열변을 토하지만 일본은 정치난쟁이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과거 일제의 반인륜적죄악에 대해 사죄는커녕 미화분식을 일삼고 력사를 외곡하면서 피해자들의 아물지 않는 상처에 칼질을 해대는 패륜아집단, 군국주의부활과 우경화에로 맹렬히 질주하는 일본을 우리 민족과 국제사회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기때문이다.
일본의 과거력사는 그 한페지한페지가 조선민족과 아시아나라 인민들의 피로 얼룩져있다.
지난세기초 간악한 음모와 군사적강권으로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수십년간에 걸치는 식민지파쑈통치기간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으며 그러한 만행은 일본본토에서도 끊임없이 자행되였다. 간또조선인대학살만행은 그 실례에 불과하다.
1923년 9월 1일 일본의 간또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인하여 당국에 대한 각계층의 불만이 높아가자 일본반동들은 고조되는 자국민들의 반감과 불만을 재일조선인들에게 돌려 정부에 대한 분노를 눅잦히는 한편 이를 조선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학살의 기회로 삼을 무서운 살인흉계를 꾸미였다. 이에 따라 민심안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데 대한 명령이 하달되고 일본반동들은 《조선인이 방화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친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요설을 퍼뜨렸으며 《조선인폭동설》이라는것까지 날조해냈다.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할데 대한 일본왕의 《칙령》이 공포되고 가장 악질적인 장교들로 간또계엄사령부가 조직되였으며 군대와 경찰은 물론 《자경단》, 《청년단》을 비롯한 우익반동단체들과 불량배들까지 동원되여 감행된 일제의 조선인대학살범죄로 무려 2만 3 000여명에 달하는 무고한 조선사람들이 무참히 학살되였다. 결국 간또지방은 말그대로 조선사람들의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생지옥으로 변하였다.
력사에는 미국의 인디안살륙만행, 히틀러파쑈도당의 유태인멸살행위 등 인류를 경악시킨 반인륜범죄행위들이 적지 않게 기록되여있지만 국가의 조직성에 있어서, 살륙행위의 지구성과 규모, 그 방법의 잔혹성에 있어서 일제의 조선인학살만행은 그 모든것을 릉가하고있다. 더우기 자연재해까지 타민족말살의 기회로 악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한 례는 세상에 없었다.
이것은 민족배타주의사상이 뼈속까지 배인 일본사무라이와 같은 살인악마, 인간백정들만이 감행할수 있는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산물로서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 특대형반인륜범죄이다.
조선사람들의 피로 얼룩진 간또대지진참변은 일제가 우리 인민앞에 저지른 죄악의 일부이며 침략과 략탈, 파괴와 살륙만행으로 엮어진 일제침략사의 한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과거청산문제는 그 어떤 실무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을 비롯한 인류에게 들씌운 반인륜적죄악을 청산하기 위한 정치도덕적문제이고 국제법적문제이며 죄악에 찬 과거의 교훈을 되새기고 새 출발을 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를 가르는 시금석으로도 된다.
하지만 일본반동들은 한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러간 오늘까지도 우리 민족과 세계 인민들앞에 저지른 만고죄악에 대해 성근히 사죄하고 배상할대신 그 책임을 모면해보려고 별의별 오그랑수를 다 쓰고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전범국》의 모자를 벗어던지고 《전쟁가능한 나라》, 《정상국가》로 변신하여 해외침략의 길에 나설수 있도록 헌법개정까지 들먹이고있다.
더우기 남조선의 윤석열역적패당은 민족의 천년숙적과의 《관계개선》을 떠들면서 과거죄악을 눈감아주려고 하는가 하면 일본과의 군사적협력을 적극 강화하려 하면서 일본사무라이들의 군국주의야망, 조선반도재침광기에 부채질을 해주는 어리석은 망동을 거리낌없이 저지르고있다.
과거는 현재를 비쳐주고 앞날을 밝혀주는 등불이라고 하였다.
잘못된 과거에서 현재의 오유를 시정하고 새 출발을 할줄 알아야 한다.
지금처럼 전패국, 전범국으로서 인류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들씌운 범죄에 대하여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할 국가적의무를 리행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나라로 남아있을수록, 일본특유의 간교성 그대로 회피와 모면으로 력사에서 과거를 지워버리려고 요술을 부릴수록 절대로 정치난쟁이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윤석열역적패당도 일본반동들에게 굽신거리며 굴종적인 저자세외교에 집착한다면 민족의 저주와 규탄의 대상으로 되여 지금과 같은 비참한 처지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다.(전문 보기)
협잡문서로 국권을 강탈한 범죄국가
지금으로부터 112년전인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비법불법의 방법으로 날조한 《한일합병조약》을 세상에 공포함으로써 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완전히 전락시켰다.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에 이어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해낸 일제는 우리 인민의 거세찬 반일투쟁기세에 겁을 먹고 그 사실을 숨기고있다가 8월 29일에 가서야 공포하였다.
《한일합병조약》이 일제가 일방적으로 날조하여 세상에 공포한 협잡문서라는것은 증빙자료를 통해 이미 세상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09년에 《한일합병조약》의 조선어본과 일본어본이 한 필체로 작성되였다는것이 밝혀진데 이어 그 다음해인 2010년에는 《한일합병조약》의 량국문서는 물론 리완용을 《협정》전권대표로 임명하는 《칙유문》, 《조약체결》을 량국이 동시발표한다는 내용의 《합병조약 및 량국황제조칙공포에 관한 각서》 등 4종의 문서가 모두 한사람의 필체로 작성되였다는것도 밝혀졌다. 이 문서들을 일제의 식민지통치기구인 조선통감부의 한 인물이 작성하였던것이다. 《합병조약 및 량국황제조칙공포에 관한 각서》의 한 부분에 《통감부》라는 글자가 인쇄되여있었다.
원래 쌍무조약문의 작성은 쌍방이 각기 작성하는것이 원칙인데 이 자료들은 조선봉건정부가 《한일합병조약》작성에 전혀 관여하지 못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 정확한 증거로 된다.
이것은 일제통치배들의 지시밑에 조선통감부가 주동이 되여 《한일합병조약》과 그 관련문서들을 날조하였으며 그것들이 다 만들어진 다음 조선봉건정부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압적으로 공포하였다는것을 실증해준다.
또한 1910년 8월 29일에 공포된 《병합》을 알리는 순종황제의 칙유문에 황제의 서명이 없은 사실을 통해서도 《한일합병조약》이 날조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조약의 효력발생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국가원수의 비준을 받는것이다. 그런데 순종황제의 칙유문에는 어새만 찍혀있고 황제의 서명은 없었다. 반면에 같은날에 공포된 일본왕의 조칙문에는 어새와 함께 서명이 있었다.
더우기 《한일합병조약》은 일본왕의 재가(왕이 결재하여 허가하는것)에 대한 정식 통보를 받기도 전에 날조되였다.
1910년 8월 22일 10시 40분부터 1시간 5분동안 일본왕의 자문기구인 추밀원에서는 일본내각에서 제출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안 및 이와 관련한 칙령안 12건을 황급히 심의, 의결한 다음 즉시 그에 대한 왕의 최종재가를 요청하는 상주안을 바치였다.
일본내각에서는 《조약문》에 대한 왕의 재가를 받고 통감부에 전문으로 통지하였는데 그 시간은 이날 18시 30분이였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범죄적인 《한일합병조약》이 날조된 상태였다. 《한일합병조약》은 22일 16시에 날조되였다.
데라우찌는 일본왕의 재가에 대한 통보를 정식으로 받기도 전에 《조약》에 《조인》함으로써 당시 일본법률과 초보적인 국제조약체결절차를 심히 위반하였다.
이 몇가지 사실자료를 통해서도 《한일합병조약》이 사기와 협잡, 강권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불법비법의 문서라는것을 잘 알수 있다.
이처럼 일제는 지난 세기초 우리 나라를 비법적으로 강점하고 중세기적인 식민지통치를 실시하면서 840만여명의 조선청장년들을 저들의 전쟁터와 고역장에 강제련행해가고 100여만명을 학살하였으며 20만명의 조선녀성들을 끌어다 비참한 일본군성노예생활을 강요하였다.
더욱 분노를 자아내는것은 오늘 윤석열역적패당이 일본의 파렴치하고 오만방자한 태도에 저자세를 취하면서 그 무슨 《이웃》, 《관계개선》을 읊조리며 비굴하게 놀아대고있는것이다.
일제의 천인공노할 과거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지는 못할망정 일본군성노예문제《합의》에 대한 《존중》을 떠벌이고 일제강제징용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을 대신 지불하겠다고까지 하면서 조선반도재침의 칼을 가는 천년숙적과 군사적결탁을 강화하며 침략의 발판을 놓아주는 윤석열역적패당의 천하머저리짓, 매국배족적망동은 남조선인민들과 온 민족의 치솟는 분노를 자아내고있다.
윤석열역적패당의 흉심은 불보듯 뻔하다. 한마디로 미국상전은 물론 일본까지 등에 업고서라도 어떻게 하나 동족압살야망을 실현해보자는것이다.
이런 친일역적패당이 권력의 자리에 틀고앉아있기에 또다시 일본반동들이 조선반도에 발을 들이밀려고 공공연히 책동하고있는것이다.
다시는 과거의 치욕스러운 력사가 되풀이될수 없다.
오늘 온 남조선인민들이 일본반동들의 파렴치한 망동과 윤석열역적패당의 친일굴종적태도에 격노하면서 과감한 투쟁의 길에 나서고있는것은 너무나도 응당하다.(전문 보기)
최근소식 : 일제의 《한일합병조약》날조는 극악한 조선국권강탈범죄
8월 29일은 일제가 강도적인 방법으로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하고 공포한 때로부터 112년이 되는 날이다.
주권국가의 자주권을 란폭하게 유린하고 우리 민족의 운명을 무참히 란도질한 《한일합병조약》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병탄하기 위하여 날조해낸 불법비법의 사기협잡문서이다.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날조를 통하여 조선의 외교권과 내정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민족을 말살하고 형식상으로만 남아있던 국가실체로서의 조선을 영원히 없애버리기 위하여 국제조약체결의 초보적인 원칙과 규범마저 란폭하게 유린하면서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해냈다.
《조선사람은 일본법률에 복종하든가 아니면 죽어야 한다.》고 한 초대총독 데라우찌의 폭언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일제가 조선에서 100여만명을 학살하고 840만여명을 강제련행하여 노예적으로 혹사하였으며 20만명의 조선녀성들을 일본군성노예로 만든 죄행만 하여도 국제법상 시효가 없이 처벌해야 할 특대형반인륜범죄이다.
일제의 날강도적인 조선병탄책동과 조선민족말살을 노린 가혹한 식민지파쑈폭압통치로 말미암아 우리 인민은 40여년동안 이루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일제가 패망한지도 이제는 7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특대형반인륜범죄들에 대해 성근하게 사죄하고 배상할 대신 오히려 과거죄악을 미화분식하고 재침야망실현을 꿈꾸면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군사대국화책동에 집요하게 매달리고있다.
오늘도 일본은 과거에 지은 죄악우에 새로운 죄악을 덧쌓고있으며 이는 우리 인민의 반일감정을 끝없이 격앙시키고있다.
우리 인민은 천년숙적 일본의 조선침략사와 조선민족말살범죄를 생생히 기억하고있으며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모든 죄악의 대가를 세대를 이어가며 반드시, 철저히 받아내고야 말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일본연구소 연구원 박학성
력사의 교훈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조선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 대변인담화-
인류력사에 가장 큰 재난으로 깊이 새겨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때로부터 77년이 되였다.
인간의 한생과도 맞먹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사람들은 그 갈피갈피를 더듬으며 진실을 기억하고 후세에 전하고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대전이 남긴 교훈을 끝없이 되새기며 진정으로 평화롭고 평등하며 화목한 세계를 건설하여 두번다시 불행을 겪지 않기 위해서일것이다.
그러나 력사의 교훈에서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고 피비린 과거를 되풀이하려는 나라가 있으니 이는 다름아닌 일본이다.
아시아를 피에 잠근 살인원흉, 세계의 가장 추악한 전범국가로서 지난날의 범죄청산에 그 어느 나라보다 성근하고 진실해야 할 일본이지만 패망한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까지도 과거청산에 대한 법적, 도덕적책임을 다하지 않고있다.
우리 나라를 무력으로 강점하고 40여년간의 식민지파쑈통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민족의 말과 글, 성과 이름은 물론 옷차림과 풍속까지 짓밟고 막대한 국보와 문화재를 파괴, 략탈하였으며 천문학적수자에 달하는 방대한 경제적손실을 준데 대하여 털끝만큼도 청산한것이 없다.
더우기 일제가 840만여명의 조선청장년들을 강제련행하고 100여만명을 학살하였으며 20만명의 꽃다운 조선녀성들을 랍치, 련행하여 일본군성노예로 끌어간것은 국제법상시효가 없는 특대형의 반인륜범죄로서 그 원한은 대를 두고 풀어도 다 가실길 없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과거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고 력사적사실들을 외곡하면서 응당한 징벌을 받은 전범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국회의원들이 야스구니진쟈로 몰려가고 일본제국주의의 유물인 《히노마루》, 《기미가요》를 《국기》, 《국가》로 제정하였으며 저들의 범죄행위를 미화분식한 교과서로 자라나는 새세대들을 가르치고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패국인 일본이 아직도 아시아의 지배자, 맹주의 망상에서 헤여나지 못하고있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지금 일본은 우리 공화국의 《위협설》을 대대적으로 날조, 류포하면서 군사대국화실현을 위한 사회적기반을 닦고 모든 준비를 갖추었으며 이제는 허울만 남은 《평화헌법》까지 개악하여 재침의 마지막걸림돌을 제거하려 하고있다.
우리 공화국의 존엄높은 해외공민단체인 총련과 재일조선공민들을 집요하게 탄압하고 차별하면서 조선민족배타주의를 조장하고있는것도 결국은 우리에 대한 위험의식, 적대의식을 증대시키기 위한것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일본은 오늘의 시대가 《내선일체》, 《팔굉일우》를 떠들면서 다른 나라와 민족을 제 마음대로 우롱하고 유린하던 한세기전과는 다르다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지난날의 가슴아픈 희생과 참화를 잊지 않고있는 사람들은 일본의 재침책동을 절대로 방관하지 않을것이며 자기의 존엄과 자주권을 건드리는것은 더더욱 용서치 않을것이다.
우리 인민은 일본이 지난날 저들이 저지른 죄과에 대해 철저히 사죄할 대신 오히려 악랄한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추구하며 무분별한 반공화국, 반총련소동에 광분하고있는데 대하여 끓어오르는 민족적의분을 금치 못하고있으며 일본과는 끝까지 결산할 비상한 각오를 가다듬고있다.
일본이 우리 인민과 아시아인민들에게 참을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강요한 반인륜적범죄에 대하여 똑바로 청산하지 않고 그 피해자, 희생자들을 모독하면서 무분별한 군사대국화책동에 매달린다면 차례질것은 오직 정의의 심판, 력사의 심판뿐이라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할것이다.
주체111(2022)년 8월 15일
평양
조선전쟁시기 미제의 하수인노릇을 한 일본의 죄악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전쟁시기에 일본은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미제의 병참기지로 복무하였습니다.》
죄악으로 가득찬 일본의 현대사에는 지난 세기 50년대 미제가 도발한 조선전쟁에 적극 가담하여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끼친 범죄의 행적도 뚜렷이 기록되여있다.
제2차 세계대전종식후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는 새로운 대결의 서막이 열리고있었다.미제는 침략적인 극동정책실현의 돌격대로 써먹기 위해 일본의 군국화를 추구하고있었다.한편 일본은 패망의 력사에서 교훈을 찾을 대신 복수주의야망을 품고 미제의 세계제패전략실현에 편승하는 길로 나아갔다.
미일의 범죄적인 공모결탁은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도발을 계기로 강화되였다.
일본반동들은 조선전쟁도발의 첫 단계인 침략전쟁계획작성에서부터 미제의 특등주구, 전쟁하수인으로서의 추악한 정체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미제의 전쟁계획작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논것은 미극동군사령부의 《G-2》, 《G-3》에 소속된 《카토》기관, 《력사반》의 전 일본군 장성들과 고급장교들이였다.자료에 의하면 전 일본군 참모본부 차장이였던 가와베(K)와 아리스에(A), 다나까(T), 오노(O) 등 주요참모들로 구성된 《카토(KATO)》기관과 전 대본영 륙군부 작전과장 핫또리의 미극동군사령부 《력사반》 등은 조선전쟁도발계획을 작성제공한 주되는 비밀단체였다.이 단체에 망라된 전범자들은 전쟁도발계획작성을 위하여 남조선괴뢰군 또는 미제침략군의 군복을 입고 남조선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그들이 만든 극동침략계획이 1950년초에 미극동군사령부에 넘어갔던것이다.
미제가 조선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달자마자 일본반동들은 때를 만난듯이 미쳐날뛰면서 숱한 침략무력을 조선전선에 들이밀었다.
1950년 7월 일본수상은 국회연설에서 조선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할것이다.》라고 떠들었으며 곁따라 일본외무성도 《조선전쟁과 일본의 립장》이라는 문건에서 조선전쟁에 가담하려는 속심을 공공연히 드러내놓았다.이에 따라 수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전선에 밀려들었다.제1진으로 200명의 전 일본군 장성, 장교들이 조선전선에 급파되여 괴뢰군의 각 군종참모부에서 군사고문과 전문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이어 태평양전쟁에 참가하였던 4 000여명의 일제침략군퇴물들이 미24보병사단과 미1기병사단에 배속되는 즉시 조선전선에 파견되여 전투에 참가하였다.영국의 로이터통신이 폭로한데 의하면 조선전쟁에 참가한 일본인들의 수는 1950년 7월에만도 벌써 2만 5 000명에 달하였다.
조선전선에 파견된 일본인들은 대체로 조선의 지리와 풍속에 밝은자들로서 미군의 선발대, 척후대로 전투에 진입하였다.인천상륙작전이나 원산항기뢰해제작전, 오산의 미제침략군 스미스특공대에서 척후역할을 수행한것도 바로 조선전선에 파견된 일본인들이였다.
일본반동들은 저들이 조선전쟁에 참가한 사실을 은페하기 위해 일본인들을 재일조선인부대로 가장시키고 군복도 괴뢰군의 군복을 입혔다.전투에 참가하는 경우 조선사람들과의 일체 접촉을 피하며 미제침략군이 둥지를 튼 지역에서만 싸우도록 하였다.또한 일본국내에서 군사검열제도를 내오고 이 사실을 일체 취급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통제하였다.
조선전쟁기간 전 일본렬도가 미제침략군의 병참기지, 공격기지로 화하였다.
일본은 조선전쟁기간 정부기구로서 특수조달청이라는것을 내오고 일본경제인련합체안에 방위생산위원회를 설치하였다.이 기구들을 통하여 미제가 요구하는 군수품의 생산과 수리를 적극 보장하였다.이와 함께 공업을 전시체계로 개편하고 국내의 모든 공장들을 전시생산에 동원하였다.
당시 미국과 괴뢰들이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조선전쟁의 첫 1년간의 전투들에서 파괴된 미제침략군 차량의 80%, 땅크의 30%, 각종 포의 68%, 저격무기의 70%가 일본에서 수리되였다.미국언론들까지도 《일본은 조선전쟁을 위한 하나의 공장으로 되였다.》고 평하였다.
미제가 조선전쟁을 도발한 해인 1950년에 일본이 철도로 수송해준 미제침략군의 화물량은 중일전쟁을 앞둔 1936년에 수송된 일제침략군의 군용화물량보다 10배이상이나 더 많았다.1951년에는 그것이 태평양전쟁시기 일제침략군의 화물수송량과 거의 비슷하였다.여기에 일본선박과 항공기에 의한 해상 및 공중수송의 몫까지 합치면 일본이 날라다준 미제침략군의 화물량은 헤아릴수 없이 방대하였다.
전쟁기간 오끼나와에서 출격한 미제공중비적들의 야만적인 폭격으로 인하여 조선의 거리와 마을, 산과 들이 재더미와 불바다로 되였으며 수많은 적수공권의 민간인들이 생죽음을 당하였다.
청소한 우리 공화국이 제국주의련합세력과 피어린 격전을 벌리고있을 때 《불길속에서 밤을 구워먹으며》 막대한 치부를 한 범죄국가가 바로 일본이다.일본반동들이 자랑하는 그 무슨 《고도성장》과 《경제적번영》이 바로 수천수만의 우리 인민이 흘린 피의 대가임을 인류는, 후대들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력사는 일본이 이미 조선전쟁시기부터 미제의 치욕스러운 전쟁사환군, 전쟁하수인이였다는것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전후 수십년간 일본은 재침야망의 실현을 집요하게 추구하면서 미제와 공모결탁하여 반공화국침략책동에 열을 올리고있다.
일본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우리 인민의 천년숙적이다.
우리 인민은 일본반동들의 범죄행적을 절대로 잊지 않고있으며 그 죄악의 대가를 기어이 받아내고야말것이다.(전문 보기)
[글과 사진] : 치욕과 망국의 굴레 ― 《한일협정》
만고역적 박정희역도가 《한일협정》에 도장을 찍은 때로부터 57년이 되였다.
민족의 존엄과 리익은 안중에도 없는 극악한 사대매국노들이 수십년간에 걸치는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는커녕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들을 《정당화》하려는 파렴치한 일본과 맞장구를 치며 조작한 《한일협정》은 말그대로 제2의 《을사5조약》이였다.
1965년 박정희역도는 《일본에 의탁하지 않고서는 래일이 없다. 제2의 리완용이 되고 매국노라는 말을 듣는 한이 있어도 협정은 꼭 체결하겠다.》고 떠벌이면서 《한일협정》을 체결하였다.
내외가 단죄규탄한바와 같이 박정희역도는 협상과정에 응당 우선시해야 할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대한 사죄와 배상은 요구조차 하지 않았으며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경제협력자금》의 명목으로 받기로 하고 《협정》조작을 마무리하도록 하였다.
지어 일본으로부터 6 600만US$의 돈을 뢰물로 받아먹고 그 대가로 조선인강제징용 및 강제징병자, 일본군성노예피해자들에 대한 피해배상과 문화유물반환의 포기를 약속하는 등 쓸개빠진짓도 서슴지 않았다.
– 매국과 굴욕의 《한일회담》회의록 –
2005년에 남조선에서는 《한일회담》의 전과정을 기록한 3만 5 000페지에 달하는 문서가 공개되였다.
그에 의하면 《협정》내용이 너무나도 매국적이고 굴욕적이였기때문에 그것을 체결한 박정희역적패당들조차도 내외의 항의규탄이 두려워 《조인》을 앞두고 일본상전들을 찾아가 남조선에서 반일감정이 높아지고있으므로 《일본이 먼저 손을 내밀어 납득할만한 성의를 표시》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추태를 부렸다고 한다.
하기에 당시 남조선도처에서는 《한일협정》의 무효와 재협상을 요구하는 각계각층의 투쟁이 그칠줄 몰랐다.
매국역적 박정희역도가 《한일협정》조작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죄악을 덮어버렸다면 그 딸년인 박근혜역도는 일본의 천인공노할 죄악을 덮어버리고도 성차지 않아 재침의 길까지 열어준 천하악녀이다.
2015년 12월 박근혜역도는 일본과의 《협상》이라는것을 벌려놓고 일본군성노예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책임인정과 공식사죄, 법적배상과 관련된 내용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것은 물론 그 무슨 《지원재단》이라는데 일본이 몇푼의 돈을 내고 그 대가로 일본군성노예범죄를 더이상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합의》라는것을 발표하였다. 지어 일본과의 북침공조를 노린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조작해냄으로써 천년숙적에게 조선반도재침의 길까지 열어주는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남조선의 현 집권세력인 윤석열패당 역시 《최악의 상태로 치닫는 한일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느니, 일본과의 관계에서 《정치적리득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느니 하는 등 해괴하고 얼빠진 망언을 쏟아내면서 일본과 가치와 리익을 공유하는 《새로운 50년을 그려나가겠다.》고 줴쳐대고있다.
이런 친일, 종일에 쩌든 역적무리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언제 가도 민족적수치를 면할수 없고 일본에 대한 천추의 한도 풀수 없으며 나중에는 전쟁의 재난까지 당할수 있다.
과연 이것을 그 누가 용납할수 있겠는가.
지금 남조선에서 외세와 매국노들에 의해 더럽혀진 치욕의 력사를 바로잡기 위한 투쟁이 과감히 진행되고있는것은 지극히 정당하다.(전문 보기)
최근소식 : 상투적인 정치사기극 – 랍치소동
최근 일본수상 기시다는 랍치관련단체들이 조직한 국민대집회에 참가하여 랍치문제는 기시다내각의 최중요과제이다, 전제조건없는 수뇌회담을 개최할 결심이다, 온갖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력을 다해 행동하겠다고 력설하였다.
재삼 강조하지만 랍치문제는 우리의 성의와 노력에 의하여 이미 다 해결되였으며 더는 조일사이의 문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20년전 아베를 비롯한 우익세력들이 저들의 추악한 정치적야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랍치문제를 극대화하여 정권유지에 악용하여왔다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2002년 조일평양선언이 채택되여 두 나라사이의 관계개선분위기가 높아지게 되자 일본우익세력들은 사실무근의 랍치관련자료들을 날조하여 국내외에서 대대적인 반공화국대결소동을 벌리였다.
이번에 기시다수상이 판에 박은 소리를 되풀이한것은 이미 되돌릴수 없이 해결된 랍치문제를 가지고 또다시 자국민들을 기만하여 다가오는 참의원의원선거에서 지지표를 긁어모으려는 리기적이고 상투적인 정치사기극에 불과하다.
반공화국적대시정책에 집요하게 매여달리면서 랍치문제를 정권유지를 위한 《영원한 카드》로 악용하려는 일본반동들의 저렬한 책동은 파국적후과만을 가져올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일본연구소 연구원 리병덕
投稿 : 抗議文 朝鮮敵視の従米デマ、誹謗中傷は許されない 李東埼
チュチェ111(2022)年 6月 4日 ウェブ・ウリトンポ
2022年5月17日付朝日新聞「天声人語」について
東京都中央区築地5-3-2 朝日新聞社編集局長殿
ならびに 2022年5月17日付「天声人語」執筆者殿
2022年5月17日付け朝日新聞「天声人語」を読んで吐き気を催した。昔、ヒトラーの「わが闘争」を読んでいて、ユダヤ人の悪口をつらねたくだりに出逢い、思わず口をハンカチで押えた経験を思い出す。
他国の不幸をあざ笑う
コロナの脅威が全世界を覆っている。日本人も苦労している。ついに北朝鮮にもコロナ菌が侵入したか、できるだけの支援はするから互いに頑張ろう、というのが隣国のよしみではないか。同病相憐れむどころか「ワクチンも治療薬の備えもない国で・・・北朝鮮の人々はいま 柳の葉を煎じ、塩水でうがいをしているのか」という。 「備えもない」と勝手に断定した後で他人の不幸をあざ笑い、からかっている。こんなに下劣な文章を、よくも活字にできたものだ。
調べもせず平気で嘘をつく
この「天声人語」の下劣さのもう一つは、平気で嘘をついていることだ。メディアは公器だからよほど慎重、謙虚でなくてはならない。
「『感染ゼロ』を標榜してきた北朝鮮から一転、感染拡大のニュース」「『清浄』『清浄』と言い続けた果てのこの現実」と、まるで朝鮮がコロナ感染を隠してきたかのような書きぶりである。調べもせずに事実に反することを書いてはいけない。そういうのをデマというのだ。 米国の北朝鮮ウォッチ専門サイト「38ノース」2020年 4月23日付けは3人の専門家による共同論文『北朝鮮 のCOVID-19ゼロ主張は何を意味しているか』を掲載した。論文は北朝鮮が、中国が(2020年の)1月23日に 武漢を封鎖する3日前に国境封鎖を断行したと述べ、こ れは世界で最も早い国境封鎖措置だったと指摘した。そ して「多くの国が北朝鮮のように早期に旅行禁止措置と 積極的な検疫措置をとればよかったのにと思っているに違いない」「医療分野で活動する人道主義組織が指摘するように、北朝鮮人は非常に効率的に公衆衛生介入を実施している」と書いている。
事実、2021年1月に開かれた数千人規模の党大会で も、密集密接の参加者がマスクなしで座っている姿が TV放映されていたし、これまた全国から参集する最高人民会議(国会)の映像も同様。今年に入ってからの各種大衆集会も同様であった。ただ、全体集会の後に部門別に分かれて討論する協議会ではマスクを着用してい た。
朝鮮メディアの電子版や、在日朝鮮人の日刊紙・朝鮮新報などを読むと日常生活ではマスク着用はもちろん、 全社会的に消毒、検疫、地域担当医師らによる日常的な 巡回健診、検温、発熱者の即時隔離治療が徹底的に行われてきた。メディアは連日世界のコロナ情報をつたえる とともに、予防知識を繰り返し浸透させている。
前述の論文は「新型コロナウィルスは最終的には北朝鮮にも侵入するであろう」「彼らは北朝鮮内での患者発生に備えて治療能力構築に投資している。診療と治療に必要な外部の支援も到着し始めている」と書いている。 朝鮮はコロナ菌侵入に前もって備えてきた。この「天声人語」は「ワクチン提供の申し出も退けてきた」と書いているが、外部の支援をむやみに断っているのではない。 自力でできることは自力でやろうとしているだけだ。必要なばあい、すでに支援も受けている。今後も必要なら善意の支援は喜んで受けるに違いない。
ちなみに、この論文執筆の中心らしいキー・B・パーク 博士はハーバード大学医学部教員で、国連WHOコンサ ルタント。18回北朝鮮を訪問した。したがってWHOや 朝鮮の当局者らといつでも通話でき、詳細な情報も入手できる立場にある。
加害者の罪を被害者に負わせる
この「天声人語」の下劣さのさらにもう一つは、朝鮮を困難に陥れている加害犯人を免罪し、その責任を被害者である朝鮮当局になすりつけているところにある。
アメリカは朝鮮戦争停戦から約70年にもなる今日に至るまで、極東のこの小国との平和協定締結を拒み、戦時状態を維持しつづけている。停戦は朝米双方が引き金に指をかけたまま、にらみ合っている状態。国際法上、 戦争継続状態なのだ。南北が和解しようと共同声明まで出しても、その実行をアメリカはことごとく妨害、阻止してきた。
そして毎年、米韓合同軍事演習をし、あの狭い朝鮮半島の周辺に戦略爆撃機、空母打撃群などの核資産を集結させている。「先制攻撃」「斬首作戦」「北朝鮮全土占領作戦」がその内容だ。アメリカが核先制攻撃を政策として 公布しているのは、天下周知の事実ではないか。そのうえさらに「史上最強の制裁」だ。
民族の存亡をかけた必死の自衛努力を「天声人語」は「革ジャンにサングラスでミサイルを仕切ったり」と揶揄する。世界はアメリカに従うべきで、ましてや朝鮮人ごときが逆らうとはけしからんという奴隷的固定観念が、 この筆者の頭にはこびりついているらしい。
加害者はアメリカであり、被害者は朝鮮民族なのだ。アメリカの犯罪には見て見ぬふりをし、「人口の4割が栄養不足」と、責任を朝鮮当局に転嫁する。逆ねじくわせて被害者を加害者に仕立てるその手口は、市井の無頼漢と選ぶところがない。
朝鮮人民にたいする侮辱
アメリカと正面対決して朝鮮は一歩も退かない。彼らは勝利を確信しているから、困難の中でも楽天的である。 最高指導者の周りに一心団結し、自力更生で社会主義経済強国へと着実に前進している。ほかの国ならとっくに滅んでいただろう。
こういう朝鮮人のプライドを、この「天声人語」の筆者などは到底理解できまい。スズメが大鵬の志など決して理解できるわけがない。
この「天声人語」筆者は朝鮮の最高指導者を嘲弄するような書きぶりだが、これは朝鮮人民全体にたいする侮辱である。無礼千万だ。朝日新聞はいつから、初歩的な国際的礼節もわきまえぬごろつき新聞に成り下がったのか。
私は、2022年5月17日付朝日新聞「天声人語」欄の筆者の誹謗中傷に抗議するとともに、こういう無責任で下品な文章を載せた朝日新聞編集局の責任を問うものである。(記事全文)
■[コメント]:tongi@bj.wakwak.com
조선인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극악한 만행
(평양 5월 13일발 조선중앙통신)
13일부 《민주조선》에 실린 개인필명의 글 《조선인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극악한 만행》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를 불법비법의 방법으로 강점한 일제는 조선을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조선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무참히 유린말살하고 탄압한 일제의 극악무도한 식민지통치는 조선인민의 민족적분노를 폭발시켰다.일제의 식민지통치가 심화될수록 우리 인민들속에서 반일기운은 날로 높아갔다.
극도의 불안감을 느낀 일제는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의 투쟁을 탄압하기 위하여 1925년 5월 12일부터 우리 나라에서 《치안유지법》을 실시할것을 공포하였다.
《치안유지법》은 공산주의운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1925년 4월에 제정하여 일본에서 실시한 악법이였다.일제는 본토에서 실시하던 악법을 우리 나라에서도 실시함으로써 조선인민의 애국적인 투쟁은 물론 사소한 반일요소에 대해서까지 무자비하게 탄압하려 하였다.
전문 7조로 되여있는 《치안유지법》의 제1조만 놓고보아도 공산주의자들과 애국적인민들에게 10년까지의 징역 또는 금고형을 들씌울것을 규정하였다.
이 악법에 기초하여 일제는 조선사람의 사소한 반일적인 요소도 악랄하게 탄압하였으며 더우기는 조선공산주의운동을 말살하기 위하여 미쳐날뛰였다.
1925년 11월 일제는 신의주에서부터 애국자들에 대한 검거소동을 벌렸으며 같은해 12월에는 전국적규모에서 검거소동을 벌렸다.수차례에 걸친 대규모검거소동을 통하여 수많은 애국자들과 혁명가들을 체포투옥한 일제는 그들을 대상으로 야수적인 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1928년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을 《신치안유지법》으로 개정하여 조선인민의 반일기세를 더욱 무자비하게 억눌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조선에서 식민지통치를 더욱 강화하고 어떻게 하나 우리 인민의 혁명적진출을 막아보려고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전면적으로 개악하여 실시하였다.이를 통하여 일제는 우리 인민의 공산주의운동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으며 수많은 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무고한 조선사람들을 체포,투옥,학살하였다.일제의 야수적인 만행에 의하여 감옥으로 끌려가 옥고를 치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선사람들은 그 얼마인지 모른다.
일제는 장장 수십년간에 걸친 식민지통치기간 비단 《치안유지법》뿐 아니라 수많은 악법들을 제정,공포하여 우리 인민을 극악하게 탄압하면서 식민지통치를 강화하였다.
실로 우리 인민의 모든 권리와 자유를 깡그리 말살하고 우리 나라를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미쳐날뛴 일제야말로 조선민족의 불구대천의 원쑤이다.
우리 인민은 조선사람의 피와 눈물,고통으로 얼룩진 일본의 피비린내나는 과거사를 절대로 잊지 않고있다.
일본반동들이 수치스럽고 치떨리는 과거를 미화분식하며 과거청산을 회피하고있지만 죄는 지은데로 가기마련이며 일본은 절대로 과거청산의 법적,도덕적의무에서 벗어날수 없다.
우리 인민은 기어이 피의 대가를 받아내고야말것이다.(전문 보기)
파쑈악법을 휘둘러 감행한 특대형범죄
세대가 바뀌고 혁명이 전진할수록 더욱 투철한 반제계급의식을 지니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난날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다음 정치적폭압과 경제적략탈을 강화하는것과 함께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면서 못된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일제가 지난 세기 전반기 조선에서 식민지파쑈통치를 실시하면서 저지른 특대형범죄의 하나는 우리 나라의 청장년들과 녀성들을 강제련행, 랍치한것이다.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법적으로 제도화한것이 바로 악명높은 《국가총동원법》이다.
19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전쟁을 본격화한 일제는 그에 필요되는 인적, 물적자원을 충당하기 위해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이라는것을 조작해냈다.당시 일제는 이 법의 49조에 《본법의 시행은 외지에도 적용한다.》는 강도적인 문구를 박아넣고 그것을 식민지조선에서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시행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에 기초하여 《국민근로보국협력령》, 《국민징용령》, 《학도근로령》, 《녀자정신근로령》, 《조선청년특별련성령》 등 조선의 남녀로소를 가림없이 강제징발하기 위한 각종 악법들을 무더기로 꾸며냈다.
1945년 8월까지 일제는 무려 840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청장년들을 일본의 탄광, 광산, 조선소, 언제, 철도공사장과 중국, 남양군도 등에까지 끌고가 중세기적인 노예로동과 비참한 총알받이의 운명을 강요하였다.
일제에게 끌려간 조선사람들은 죽음의 고역장들에서 그야말로 짐승처럼 혹사당하였다.일제는 군사시설물공사장이나 탄광, 광산, 언제건설장 등에 조선사람들을 내몰아 그들의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깡그리 짜내였다.
태평양전쟁시기 감독으로 종사한바 있는 한 일본인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조선사람들은 언제나 벌거벗고 일하였으며 땀을 닦을 수건도 없었다.조선사람들은 밀차를 둘이서 뛰면서 밀었다.뒤에서 몽둥이를 쥔 사나이가 뛰면서 따라서기때문에 밀차를 미는 사람도 뛰지 않을수 없었다.나는 말을 가지고있었는데 말도 그렇게는 부리지 않았다.》
일본에서 발견된 1944년-1945년 자료에 당시 일본전국에 있었던 549개소의 군사시설물공사장들에 끌려간 조선사람들이 노예로동을 강요당하였다고 기록되여있는 사실, 극비밀리에 건설을 진행하던 마쯔시로대본영지하방공호에서 1945년 4월부터 패망할 때까지 일제에게 강제징발된 약 2 000명의 조선사람들이 쇠사슬에 련결된채로 가혹한 로동을 강요당하였다고 한 전 일제침략군 사관의 고백은 일제의 비인간적만행을 폭로하는 단적인 실례이다.
일제는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강제징발하여 마지막피땀까지 깡그리 짜냈을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빼앗았다.
시미즈, 단나차굴공사장에서만도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무주고혼이 되였다.한 일본인은 자기의 목격담에서 조선사람의 시체를 밀차에 실어다 구뎅이속에 마구 처넣었다, 그렇게 묻힌 조선사람이 많았다고 실토하였다.1940년부터 1944년까지의 기간에 혹가이도를 비롯한 일본전국의 탄광들에서 6만여명의 무고한 조선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겼다.《침목 1대에 조선사람 1명》, 《석탄 한삽에 피 한방울》이라는 말도 바로 이때에 생겨났다.
더욱 분노를 자아내는것은 전대미문의 특대형반인륜죄악인 일제의 성노예범죄가 바로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합법화, 본격화되였다는 사실이다.일제는 이 악법을 걸고 10대의 소녀로부터 유부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선녀성들을 닥치는대로 유괴, 랍치하여 일제침략군의 성노예로 전락시켰다.
실로 《국가총동원법》이야말로 우리 인민에게 천추만대를 두고 아물수 없는 피의 원한을 남긴 악법중의 악법이다.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조작해낸 때로부터 84년이 흘렀다.그러나 일제에게 강제징발되여 참혹한 불행과 고통, 죽음을 강요당한 수많은 조선의 청장년들과 야수들에게 무참히 짓밟힌 조선녀성들의 령혼은 오늘도 잠들지 못하고있다.
우리 인민은 일제의 특대형범죄를 천만년세월이 흘러도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며 반드시 철저히 결산할것이다.(전문 보기)
기행 : 강산은 아름답게 변했어도 피맺힌 원한은 남아있다 -구성시의 여러곳을 돌아보고-
세대가 바뀌고 혁명이 전진할수록 더욱 투철한 반제계급의식을 지니자
우리의 기행은 생산의 동음이 세차게 울려퍼지고 문명의 창조물들이 일떠서는 조국땅 방방곡곡에로 이어지군 하였다.하지만 구성시에 대한 이번 기행은 제국주의자들과 계급적원쑤들이 남아있는한 계급투쟁은 끝날수 없으며 복수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야 한다는 철리를 다시금 깊이 새겨안은 길이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세월이 흐르고 사회주의건설이 심화될수록 계급투쟁은 약화되는것이 아니라 더 치렬해집니다.》
구성남문을 지나 북쪽으로 뻗은 길이 있다.그 길을 따라 걸으며 동행한 구성시계급교양관 관장 리철호동무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방전 이 길을 사이에 두고 왜놈자식들만 공부하는 학교와 조선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었습니다.제 애비들을 믿고 때없이 깔그랑거리는 왜놈아이들때문에 싸움이 그칠줄 몰랐습니다.그런데도 일제경찰놈들은 덮어놓고 저들족속들의 편역만 들면서 조선학생들을 경찰서에 끌고가 뭇매질하고 심지어 그 어린 아이들을 지하감방에까지 처넣어 모진 고통을 주었습니다.》
운동회를 진행할 때 왜놈들은 조선아이들만 다니는 학교의 운동장 한가운데 회가루를 잔뜩 뿌려놓고 그속에 《왕눈깔사탕》이라는것을 묻어놓은 다음 선수로 나온 아이들이 뒤짐을 진 상태에서 땅바닥에 엎드려 그것을 입으로 헤집어 물게 하는 비인간적인 경기를 조직하군 하였다.그 바람에 경기때마다 어린 아이들의 입술은 험상하게 부풀어올랐다.그 참혹한 모습을 본 부모들의 가슴속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암흑의 그 세월 일제가 우리 인민에게 강요한 민족차별정책과 식민지노예교육의 일단을 폭로하는 사실들이였다.어찌 그뿐이랴.일제가 구성지역에서만도 수많은 사람들을 징용, 징병으로 끌어갔는데 그들중 절반이상이 살아돌아오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는 철천지원쑤 일제에 대한 치솟는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구성방직공장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관장의 말에 의하면 해방전 이곳에 일제가 세운 아마공장이 있었다고 한다.일제는 구성사람들이 곡식대신 아마를 심게 하고는 그것으로 아마공장을 돌려 바줄 등 대륙침략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대대적으로 생산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그리고는 짐승들도 먹지 않을 썩은 콩깨묵을 들여다가 왜왕이 하사하는 《대두미》라고 하면서 농민들이 낟알대신 그것을 사먹도록 강요하였다.
우리는 관장에게서 기룡리에 있는 《어미》물길굴에 대한 피맺힌 사연도 듣게 되였다.1930년대중엽 일제가 이곳에서 물길굴공사를 벌려놓았는데 끌려온 사람들의 대다수가 처녀들이였다.악착한 일제놈들은 그들에게 중세기적인 노예로동을 강요하였다.
공사가 끝난 후 왜놈들은 굴의 출구를 막아놓고 서슴없이 물동을 터뜨려 사람들을 수장시키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어머니! 엄마야!》
앓는 어머니를 위해, 배고파 우는 동생들을 위해 이를 악물고 고역을 치른 처녀들은 물속에 잠겨 숨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어머니를 찾고 또 찾았다.그후 이 고장 사람들은 어머니를 찾는 처녀들의 비통한 목소리가 계속 굴간에서 울려오는것같다고 하면서 이 물길굴을 《어미》물길굴이라고 불렀다.오늘도 억울하게 숨진 그날의 령혼들의 복수의 절규가 메아리쳐오는듯한 《어미》물길굴, 이는 과거 일본이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죄악의 일단을 만천하에 폭로해주는 력사의 증견물이였다.
구성시에는 결코 해방전 일제놈들의 죄악만 서리여있는것이 아니였다.
관장은 1951년 4월 어느날 정오무렵 불의에 날아든 공중비적들이 구성남문에 소이탄을 마구 내던져 이 오랜 력사유적이 형체를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파괴된 이야기, 식량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뒤늦게 후퇴의 길에 오른 한 당세포위원장을 기룡리의 어느한 고개에서 체포한 원쑤놈들이 그를 소나무에 꽁꽁 묶어놓은 다음 두발과 열손가락에 대못을 박고 시퍼런 낫으로 가죽을 벗기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지르다가 무참히 학살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구성시에 서린 피맺힌 원한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들려주는것이였다.
그의 말을 들으며 우리의 생각은 깊어졌다.
세월은 흐르고 강산이 변모되였다고 하여 쓰라린 과거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한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우리 세대의 계급의식이 흐려진다면 수난의 력사가 되풀이될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참으로 무심히 걸을수 없는 길이였다.
세대가 바뀌고 혁명이 더 멀리 힘차게 전진할수록 투철한 반제계급의식을 끊임없이 심장속에 쪼아박아야 함을 걸음걸음 되새기게 한 기행길이였다.(전문 보기)
최근소식 : 일본의 무분별한 대조선적대시정책은 비참한 파멸만을 초래할것이다
얼마전 일본수상 기시다가 인디아와 캄보쟈를 행각하여 이 나라 수상들과 각각 회담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문제로 되는것은 우리의 미싸일발사를 유엔안전보장리사회결의《위반》으로 걸고들고 더는 존재도 하지 않는 랍치문제해결에 대해 운운한것이다.
여러차례에 걸쳐 강조했듯이 우리가 국가방위력강화를 위하여 취하는 임의의 조치들은 세계최대의 열점지역인 조선반도와 아시아태평양지역에 조성된 안보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국가와 인민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정정당당한 자위권행사로서 주변나라들의 안전에 조금도 위해가 되지 않는다.
지난날 조선과 아시아나라 인민들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고 그에 대한 성근한 사죄와 보상도 하지 않고있는 전범국 일본이 이 나라, 저 나라를 찾아다니며 우리의 미싸일발사를 집요하게 걸고드는것은 저들의 침략적인 군사력증강책동을 합법화하고 재침야망을 실현해보려는 위험천만한 행위이다.
일본이 이미 되돌릴수 없이 완전무결하게 해결된 랍치문제를 계속 물고늘어지는것은 어떻게 하나 조선인강제련행을 비롯한 저들의 특대형반인륜범죄를 덮어버리고 반공화국적대시정책을 합리화해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일본은 무분별한 대조선적대시정책으로 초래될것은 비참한 파멸뿐이라는것을 명심하고 자중자숙하여야 할것이다.
국제사회는 과거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나며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실현하기 위해 겉으로는 《평화》의 가면을 쓰고 실지로는 재침의 칼을 갈며 세인을 우롱, 기만하는 일본위정자들의 정체를 똑바로 가려보아야 한다.
아시아나라들은 일본의 교활하고 파렴치한 요설에 귀를 기울일것이 아니라 조선반도의 정세안정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할것이다.(전문 보기)
론평 : 명백히 드러난 천년숙적의 재침기도
최근 남조선에서 일본반동들이 조선반도유사시 《자위대》파견을 계획하고 준비해온 사실자료들이 폭로되여 온 겨레의 커다란 분노를 자아내고있다.
알려진데 의하면 일본은 이미 1963년에 조선반도에서 무력분쟁을 가상하고 일명 《미쯔야겐뀨》라는 군사작전계획을 세워놓고있었으며 조선반도유사시 《자위대》파견계획을 1997년 《미일방위협력지침》 1차개정과 2015년 2차개정, 1999년에 제정한 《주변사태법》, 미일공동작전계획 《5055》 등을 통해 부단히 수정보충해왔다고 한다. 더우기 각방으로 일본의 편을 들어주고있는 미국이 남조선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있는것만큼 일본은 유사시 남조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조선반도에 《자위대》를 투입할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천년숙적 일본의 명백한 재침기도로서 우리 민족에 대한 용납할수 없는 도발망동이 아닐수 없다.
일본반동들이 오래전부터 저들의 해외군사활동을 제약하는 장애물들을 없애버리고 전쟁에 참가할수 있는 길, 재침의 길을 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누구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구실밑에 《방위계획대강》과 《중기방위력정비계획》을 수립하고 그것을 부단히 개정, 갱신해왔는가 하면 천문학적인 돈을 탕진하면서 《자위대》를 《전수방위》집단으로부터 첨단무장장비들을 갖춘 공격형의 침략무력으로 변신시켰다.
그리고도 모자라 최근 기시다패당은 《적기지공격능력》을 보유하기 위해 집요하게 책동하고있으며 미일공동작전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여 날뛰고있다.
이번에 일본이 조선반도유사시 《자위대》파견을 계획한 사실자료가 폭로된것은 섬나라족속들의 날로 로골화되는 군사대국화책동과 해외침략야망이 얼마나 뿌리가 깊으며 오늘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웅변으로 실증해주고있다.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실현에 들떠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날뛰는 일본반동들의 행태는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천년숙적에게는 오직 철저하고 무자비한 철추만이 정답이라는것을 더욱 굳게 해주고있다.(전문 보기)
남조선과 일본인민들 일본 도꾜에서 3. 1인민봉기 103년을 계기로 합동집회진행
남조선인터네트신문 《통일뉴스》를 비롯한 언론들의 보도에 의하면 3. 1인민봉기 103년을 계기로 지난 1일 일본 도꾜에서 남조선과 일본인민들의 합동집회가 진행되였다.
일조협회, 《일한민중련대 전국네트워크》, 《재일한국민주통일련합》 등이 주최한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일제강제징용범죄를 비롯하여 일본군성노예범죄, 간또대지진때 조선인학살범죄를 규탄하면서 《식민지지배청산》을 웨쳤다.
참가자들은 일본정부가 《전쟁을 할수 있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선제공격능력보유》를 떠들어대면서 헌법을 개정하려고 획책하고있는데 대해 폭로하면서 일본의 군사대국화, 아시아재침야망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에 전력을 다하자, 일본인민들과 함께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해 힘차게 투쟁하자고 호소하였다.(전문 보기)
3. 1인민봉기자들의 피의 웨침
《조선독립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이 구호는 지금으로부터 103년전인 1919년 3월 1일 12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평양에서 수천명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떨쳐나와 소리높이 웨친 반일독립의 함성이였다.
이날 평양에서의 대중적인 독립만세시위투쟁으로부터 시작된 3. 1인민봉기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모든 도를 휩쓸었으며 지어 만주와 상해, 연해주, 일본, 하와이를 비롯한 해외의 조선사람들이 사는 곳마다에서도 《독립선언서》가 힘있게 울려퍼졌다.
3. 1인민봉기는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온 민족이 일제에 대한 쌓이고쌓인 울분을 터뜨린 분노의 항거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항쟁이였다.
하지만 항쟁참가자들은 날강도 일제의 총칼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였으며 삼천리강토는 그야말로 피바다로 변하였다.
일제는 헌병, 경찰, 소방대 등 조선주둔군무력을 완전무장시켜 탄압에 내몰다못해 본토의 병력까지 끌어들였으며 봉기진압에 주저없이 총탄을 퍼부으라는 살인명령을 하달하였다.
당시의 탄압만행이 얼마나 야만적이였는가에 대해 일본의 어느한 어용학자는 《일본인들은 차마 볼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탄압에 광분하였다. 일본헌병의 포악성은 형언할수 없는바 그들은 늙은이와 부녀자, 어린이들까지 총검으로 찔러죽이고 목을 달아매여 죽였다.》고 개탄하였다.
총칼로 살륙하는것도 모자라 네마리의 소나 말에 사람의 팔다리를 매여 채찍으로 내몰아 사지를 찢어 죽이고 작두로 목과 팔다리를 잘라 나무에 매달아놓은것을 비롯하여 일제는 봉기에 떨쳐나선 우리 인민들을 짐승도 낯을 붉힐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하였다.
그때로부터 옹근 한세기가 넘었다. 그러나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버리지 못한 일본반동들은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피비린 과거죄악에 대해 반성하고 응당 사죄와 배상을 할 대신 파렴치한 력사외곡과 조선반도재침책동에 의연히 매여달리고있다.
어떻게 하나 과거죄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배상을 모면해보려는 일본반동들의 파렴치성, 비인간성은 극도에 이르고있다.
최근에만도 일본반동들은 내외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고위관료들의 참가하에 《다께시마(독도)의 날》행사놀음을 강행하였으며 과거 조선인강제징용피해자들의 고욕의 피자욱이 력력히 슴배여있는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망동까지 벌려놓고있다.
제버릇 개 못준다고 일본의 날강도적인 극악한 본성은 절대로 고쳐질수 없다.
하기에 3. 1인민봉기참가자들은 오늘도 우리 후대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있다.
항쟁참가자들의 피의 웨침을 잊지 말고 천년숙적 일제가 저지른 죄악의 대가를 기어이 받아내라고.(전문 보기)
군사적위협공갈로 조작한 《한일의정서》
세대가 바뀌고 혁명이 전진할수록 더욱 투철한 반제계급의식을 지니자
1904년 2월 23일은 일본침략자들이 조선봉건정부를 위협공갈하여 《한일의정서》라는 침략문서를 조작한 날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는 지난날 수십년동안이나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들씌운 철천지원쑤입니다.》
일제의 《한일의정서》조작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완전히 식민지화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한 날강도행위였다.
《한일의정서》의 불법성은 그것이 일제의 일방적인 강권과 폭력에 의하여 조작되였다는데 있다.
일반적으로 의정서라고 하면 국가들사이의 합의를 표시하는 외교문건의 하나로서 호상간의 존중과 쌍방의 리익을 도모하는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일제는 이런 초보적인 원칙을 무시해버렸을뿐 아니라 조선봉건정부의 의사같은것은 애당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1903년 12월 일제는 《각의》에서 《어떠한 경우에 림하더라도 실력으로써 이(조선봉건국가)를 우리 세력권하에 두지 않으면 안되는것은 물론이지만 가능한한 명의가 서는것을 택하는것이 상책이므로… 보호조약을 체결할수 있으면 가장 편리할것이다.》라고 결정하였다.
이것은 일제가 조선을 이미 저들의 군사적강점하에 두는것을 기정사실화하고 거기에 형식상 《외교적인 문서》라는 외피를 씌우려고 획책하였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이러한 목적으로부터 일제는 수개월간이나 조선봉건정부에 갖은 위협공갈을 다 들이대면서 《한일의정서》에 도장을 찍을것을 끈질기게 강박하였다.그러나 일제의 파렴치한 시도는 조선봉건정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였다.
일제가 《의정서》조작을 서두른것은 당시 조선을 통제권에 넣기 위한 렬강들사이의 각축전이 치렬하게 벌어진것과 관련된다.
이 리권쟁탈전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일제는 폭력수단을 동원하는것도 서슴지 않았다.
외교적공갈이 잘 먹어들지 않자 악에 받친 일제는 로일전쟁을 도발하고 우리 나라에 무력을 대대적으로 들이밀었다.1904년 2월초 일제는 짜리로씨야에 국교단절을 통보하는 동시에 미리 편성해놓은 침략군선발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인천에 상륙한 일본침략군선발대는 곧바로 한성으로 쳐들어왔다.
조선강점의 군화발을 들여놓은 첫 순간부터 일제는 침략자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일제강점자들은 위협적인 군사행동을 더욱 로골화하면서 우리 나라를 피의 란무장으로 만들었다.
당시 《매천야록》은 《왜군이 인천에서 한성에 들어온것이 병졸이 5만명이고 말이 1만여필로서 황궁과 관청, 지어는 일반살림집까지 점령하였으며 남방으로부터는 왜군이 동래를 거쳐 대구로 나아가고 남해를 거쳐 남원으로 나갔으며 군산을 거쳐 전주로 나아갔다.그리고 서로에는 평양, 삼화, 북로에는 원산, 성진에서 호상간의 거리를 수백리로 하여 점차… 나아갔다.》고 하면서 일제침략군의 점령소식을 상세히 폭로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제는 《한일의정서》조작책동에 더욱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하나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포악무도한 범죄행위였다.
일제는 우선 조선의 《황실과 령토보존》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침략무력을 내몰아 황궁을 봉쇄함으로써 고종황제가 《의정서》체결을 거부하여 피신할수 없게 철저히 차단하였다.
이와 함께 저들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대상들은 무자비하게 제거해버렸다.
일제는 《한일의정서》를 조작하려는 책동이 조선봉건정부 관리들의 완강한 반발에 부딪치게 되자 침략군대를 동원하여 《반대세력》체포소동을 벌려놓았으며 지어 한밤중에 정부관리를 랍치하여 일본으로 끌어가는 무지스러운 망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한일의정서》라는것은 일제가 강도적인 방법으로 조작한것이였다.
일제가 《한일의정서》조작을 통해 노린것은 우리 나라를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합법적인 구실을 만드는것이였다.(전문 보기)
최근소식 : 독도는 영원한 조선의 령토(2)
일본의 집요한 독도강탈책동
독도는 6세기초부터 조선령토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고 조선의 력대 왕조들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관리되여왔으나 일본은 그것을 빼앗아 저들의 령토로 만들려고 무모하고도 집요하게 책동하여왔다.
일본의 독도침탈책동은 14세기부터 시작되였으나 그 시기에는 주로 독도에 사는 우리의 섬주민들을 살륙하고 재물을 략탈하는데 그치였다.
17세기부터 독도를 저들의 령토로 만들기 위한 일본의 책동은 더욱 표면화되였으며 파렴치하게도 독도를 마치 저들의 령토이기라도 한듯이 묘사하면서 여기에 조선어민들이 들어와 고기잡이를 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조선봉건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봉건정부의 완강한 태도에 의하여 일본정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인정하고 일본인들의 울릉도수역에로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리게 되였으며 문서를 교환하여 이를 확정하였다.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하고 해외침략이 정책화되면서 독도에 대한 일본의 강탈책동은 더욱 로골화되고 큰 규모에서 감행되였다.
조선봉건정부가 쇠퇴몰락하여 자기의 국권마저 지킬수 없게 되자 일본은 이것을 독도를 저들의 땅으로 만들어버릴 더없는 기회로 여기고 실천에 옮겼다.
일본은 조선식민지화를 노린 《을사5조약》의 조작을 모의하던 1905년 《시마네현고시》 제40호라는것을 조작하여 2월 22일부로 공포함으로써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횡포한 짓을 감행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조선을 식민지화하였던 일본제국주의의 죄악에 찬 과거범죄의 산물이며 오늘까지도 계속되고있는 재침야망의 집중적인 발로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일본연구소 상급연구원
력사학학회 위원장
후보원사 교수 박사 조희승
최근소식 : 성근한 사죄와 배상은 시대와 력사앞에 지닌 마땅한 의무와 도리
최근 유럽나라들이 지난 시기 아프리카의 식민지나라들에서 략탈하였던 문화재들을 해당 나라들에 반환하면서 수백년간의 불미스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아프리카나라들과의 화해를 도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있다.
벨지끄, 프랑스, 네데를란드 등 여러 나라들이 아프리카나라들에서의 문화재략탈로 아프리카인민들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 공식인정하고 이전 식민지나라들의 문화재양도를 엄금하였던 국내법을 수정하여 해당 나라들에 문화재들을 반환하고있으며 이는 아프리카사람들의 환영을 받고있다.
이와는 상반되게 지난 세기 조선인민에게 헤아릴수 없이 막대한 불행과 고통을 준 일본만은 수십만점에 달하는 우리 민족문화유물들을 략탈하고도 그 죄행에 대한 사죄와 배상은커녕 오히려 력사외곡책동에 더욱 광분하고있다.
지금 도꾜국립박물관, 네즈미술관을 비롯한 크고작은 박물관들과 대학, 절간들에 도자기, 금속공예품, 자개박이공예품, 불상, 그림, 도서, 활자 등 우리 나라의 다종다양한 문화유물들이 전시 또는 보관되여있고 개인들의 수중에 장악된것까지 합하면 그 수는 헤아릴수 없다.
일본이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고려자기만 하여도 3만~4만점이나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객들은 조상들의 문화재략탈행위에 대해 인정하기는커녕 도리여 이를 《가장 볼만 한 문화사업》이였다고 극구 찬양하고 우리 나라에서 략탈한 문화재들을 저들의 《국보》로, 《중요문화재》로, 《중요미술품》으로 등록해놓고 소개하면서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전통을 마구 란도질하고있다.
보다 참을수 없는것은 최근 일본문화청 문화심의회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인강제로동범죄의 증견장인 니이가다현의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고 획책하고있는것이다.
불미스러운 식민주의시대의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는것이 시대적흐름으로 되고있는 오늘 응당 일본도 겸허한 자세를 가지고 수치스러운 과거죄행에 대해 성근하게 사죄하고 배상해야 할것이며 이는 시대와 력사앞에 지닌 마땅한 의무이고 도리이다.(전문 보기)
최근소식 : 독도는 영원한 조선의 령토(1)
일본의 력사외곡, 령토강탈책동이 더욱더 로골화되고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의 신성불가침의 령토인 독도를 빼앗아내려고 갖은 권모술수를 다해온 일본은 오늘도 독도침탈야망을 버리지 않고있다.
일본외상이 올해 외교연설에서 독도를 《다께시마》라고 부르면서 《일본고유》의 령토라고 한것을 비롯하여 련속 9년동안 외교당국자들이 《독도령유권》을 주장하고있는것은 《대동아공영권》을 제창하면서 침략의 길로 나섰던 《제국시대》가 되살아나는것같은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수 없다.
지난 세기 40여년간의 악독한 식민지통치로 조선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들씌웠을뿐 아니라 침략전쟁을 전세계에로 확대하여 수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전쟁의 상처를 남긴 일본이 자기의 죄악에 찬 과거에 대하여 성근하게 사죄하고 보상할 대신 침략적인 《독도령유권》을 주장하는것은 조선의 존엄과 자주권에 대한 란폭한 침해이며 인류량심과 정의에 대한 참을수 없는 우롱이다.
우리는 독도가 력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조선의 불가분리의 령토이라는것을 다시한번 명백히 하며 일본의 독도침탈책동과 파렴치한 력사외곡책동을 준절히 단죄한다.
독도는 력사적으로, 국제법적으로 확증된 조선의 령토
우리 나라의 독도령유권은 1 500여년의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다.
독도를 제일 처음 발견하고 대대로 개척한 나라는 조선이며 그것을 국토에 편입하고 독도령유를 내외에 선포한 첫 국가도 조선이였다.
독도는 6세기 초엽 우리 나라 3국시기 신라가 자기령토로 통합하고 관할하면서부터 조선이 령유권을 행사하였다.
그후 고려시기인 12세기에 정부에서 관리들을 독도에 파견하여 섬을 직접 통치관리하였고 봉건정부시기인 19세기말에 이르기까지 독도는 우리 나라의 관할하에 있었으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살며 일해온 우리의 령토이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고려사》, 《리조실록》을 비롯한 우리 나라의 고서적들에 기록되여있으며 일본의 옛 국가공문서에도 독도가 조선의 령토임을 인정하는 문구들이 반영되여있다.
일본사람이 제작한 지도와 구일본해군수로부에서 처음 발간한 지도에도 독도가 조선의 령토로 표시되여있다.
이외에도 독도가 조선령토임을 증명하는 자료는 수없이 많이 존재하고있다.
독도는 국제법상 공인된 령토취득의 기본원칙의 하나인 《무주지선점》원칙에 의하더라도 론의할 여지없는 조선의 령토이다.
독도는 언제한번 그 령유권이 포기된적이 없이 력대 우리 나라 정부들에 의하여 관할되였다.
특히 1900년 우리 나라정부는 당시 국제법의 요구에 맞게 독도의 령유권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칙령 제41호》를 공포하여 독도에 대한 령유권을 명백히 선포하였다.
이처럼 독도는 그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고유한 조선의 령토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일본연구소 상급연구원
력사학학회 위원장
후보원사 교수 박사 조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