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마지막까지 아름다와야 한다 -김일성훈장수훈자이며 로력영웅인 전 철도성 부국장 김득찬동지의 생을 돌이켜보며-
우리 세대의 삶의 거울, 귀중한 본보기
김일성훈장수훈자이며 로력영웅인 전 철도성 부국장 김득찬동지는 90고령에 생을 마치는 마지막순간까지 충성과 애국의 불변궤도만을 따라 달리였다.
무사고주행운동선구자의 영예를 안고 한생토록 한모습, 한본새로 살아온 그의 값높은 삶은 당을 따르는 충성의 길에서는 단 한순간의 탈선도 있어서는 안된다는것을 다시금 고귀한 진리로 새겨주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그 어떤 난관과 시련앞에서도 주저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참된 애국의 한길을 걷는 사람, 조국과 인민이 맡겨준 혁명과업을 한치의 드팀도 없이 제때에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 진짜애국자입니다.》
김득찬동지는 조국해방과 함께 17살에 당시 함흥기관구 기관조사가 되였다.
그가 첫 출근을 하던 날 그의 어머니는 옷고름을 눈물로 적시며 이렇게 말했었다.
《해방이 정말 좋구나.엊그제까지 왜놈의 채찍밑에서 청소부로 천대받던 네가 기관조사가 되다니…》
나라없던 세월 증기기관차의 기적변을 다쳤다가 왜놈기관사에게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를 맞을 때 그 아픔보다도 망국노의 치욕이 가슴에 사무쳐와 피눈물을 흘린 그였다.
새 조선의 철도로동계급으로서의 자기 본분을 다하기 위해 잠을 잊고 일하던 주체35(1946)년 7월 어느날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철도종업원들에게 보내신 공개편지에 접하게 되였다.렬차운행이 제시간에 보장되지 않고 1분이라도 늦어지면 위대한 민주건설사업의 전 궤도가 바뀌여지고 이에 큰 지장을 주게 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며 철도운영을 정상화할데 대하여 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은 그에게 있어서 수송전사의 심장이 무엇을 위해 고동쳐야 하는가를 깨우쳐준 고귀한 지침이였다.
그때부터 그는 일부 사람들이 수입탄이 아니면 수송을 제때에 보장할수 없다고 할 때에도 주저없이 국내탄에 의한 렬차운행의 앞장에 섰고 수송도중 무연탄이 떨어지면 해당 역의 철도종업원들을 발동하여 석탄을 수집하여서라도 기어이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군 하였다.그 나날에 그는 마침내 그처럼 소망하던 기관사가 되였다.
준엄한 전화의 나날에는 여러대의 기관차를 적들의 폭격과 포격으로부터 구원하였으며 수백회에 걸쳐 포연속을 뚫고 수많은 군수물자를 전선으로 실어나름으로써 조국해방전쟁승리에 기여하였다.
온 나라에 복구건설의 마치소리가 높이 울리던 어느해 겨울날 당시 함흥기관구 차고에 한대의 낡은 기관차가 수리를 위해 들어왔을 때였다.
그는 그 기관차를 자기가 맡기로 결심하였다.
《기관차와 객차, 화차를 복구정비하라는것은 우리 수령님께서 주신 과업들중의 하나입니다.나라의 귀중한 재산인 저 기관차를 그냥 두고서야 어찌 발편잠을 자겠습니까.》
그는 작업반원들과 함께 성천강의 얼음을 까내고 전쟁시기 적들이 패주하면서 강에 처박아넣은 기관차에서 많은 부속품들을 회수리용하여 낡은 기관차를 새차처럼 만들어놓았다.그의 모범을 따라 기관구안의 작업반들에서는 애차운동의 불길이 세차게 타번지였다.
주체50(1961)년 3월 교통운수부문 열성자대회에 참석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득찬동무는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이 길러낸 훌륭한 수송전사이라고 하시면서 그가 발기한 무사고주행운동을 높이 평가하시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의 마음은 언제나 무사고주행과 잇닿아있었다.
마음이 흔들리면 궤도에서 탈선한다, 기운차게 증송의 기적소리를 울리면서 무사고로 달렸다고 뒤돌아보며 만족해할것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충성의 마음을 두줄기 궤도우에 얹고 변함없이 한길을 가야 한다는것이 그의 굳은 신조였다.
세월이 살같이 흘러 어느덧 그의 나이가 75살이 되였을 때였다.그에게 일부 일군들이 이제는 년세도 많고 해놓은 일도 많은데 년로보장을 받는것이 어떤가고 권고한적이 있었다.그날 그는 온밤 잠들수 없었다.철도를 떠난 자기 생을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그였던것이다.
그런데 글쎄 위대한 장군님께서 그의 마음을 속속들이 헤아려주실줄 어찌 알았으랴.
그가 철도성 일군으로 계속 사업하도록 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대해같은 은덕은 그에게 청춘시절의 패기와 열정을 안겨주었다.
그는 중요한 수송과업을 받은 기관차들에 승무조성원들과 함께 자주 오르군 했다.구배가 심한 구간에서는 제동을 어떻게 하는것이 효과적인가 등 모든것을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그를 두고 기관사들은 《무사고백과사전》이라고 정담아 부르군 했다.그럴 때마다 그는 적기의 맹폭격속에서 굴함없이 군수렬차를 몰아가던 전화의 나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
《수령의 명령을 결사로 관철하던 그때의 그 정신, 그 기백으로 달린다면 어찌 넘지 못할 령이 있을수 있겠소.》
그는 누가 과업을 주지 않았지만 새로운 철길검사차제작도 스스로 자기의 전투과업으로 받아들였다.승무원들과 며칠밤을 새우며 철길검사차를 더 훌륭히 개조한 그는 전국의 철길로선들을 따라 제가 직접 달려보았다.그러던 어느날 철길검사차가 들어가기 힘든 구간에 이르게 되였다.
《여기야 인적드문 곳인데 누가 와보겠습니까? 중요한 간선철길도 아니고 기껏해서 몇km구간밖에 안되는데 그냥 돌아갑시다.》
한 승무원이 이처럼 대수롭지 않아하였을 때 그는 격하여 말했다.
《뭐라구? 불과 몇km구간이라고 해도 여기로 인민을 태운 렬차가 다니고있소.그리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그 어느때든지 야전렬차로 이곳을 찾으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렇듯 순결한 충성심을 지니였기에 그는 끝끝내 모든 철길들의 선로상태와 철길구조물들에 대한 기술검사를 빠짐없이 진행하여 렬차운행의 안전성을 보장하는데 크게 기여할수 있게 되였다.
김종태전기기관차련합기업소의 로동계급은 지금도 그가 아흔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에 무거운 부속품배낭을 지고 기관차수리현장으로 들어서던 땀젖은 모습을 잊지 않고있다.
자기를 키워준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지니고 한생토록 무사고주행운동선구자로 불같이 살아온 그는 운명직전에 자식들과 철도성 일군들에게 언제나 만짐을 싣고 기적소리를 높이 울리며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 기쁨을 드려줄것을 절절히 당부하면서 손을 들어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을 열어주오.기관차의 기적소리를 다시 듣고싶구만.기적소리를 힘차게 울리며 계속 달리고싶소.》(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