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친구》의 소식을 들으며 – 해외동포의 글 –
새해를 맞으며 지인들과 안부를 주고받는것은 사뭇 즐거운 일이다. 허나 새해벽두에 날아온 《서울친구》의 소식은 나를 무척 괴롭혔다. 죽마고우의 신상에 닥친 불행이 1월의 한파처럼 내 넋을 파고든것이다.
여름이면 한강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함께 놀던 우리가 헤여진것은 내가 부모들을 따라 해외로 이주한 때였다. 5년반후 백부의 사망으로 서울에 갔을 때 우리는 서로 다시 만나게 되였고 그후 전화와 인터네트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게 되였다. 인물이 멀끔한데다 성품 또한 서글서글하고 직업도 괜찮아 동창들과 후배들속에서 인기가 굉장했던 그가 한창나이에 비명횡사하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 기막힌 일이 아닐수 없었다. 눈감겨주는이도 없이 외로이 절명하여 4달반만에야 부패된 모습으로 북망산으로 갔다는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간난신고하여 선이 닿은 옛 지우들을 통해 알아보니 그의 고독한 죽음은 정말 눈물없이 들을수 없는 참극이였고 격분을 자아내는 타살이였다.
지난해 여름에 있은 일이라고 한다. 윤석열이 집권한 이후 아우성치는 《민생고》는 나의 《서울친구》를 순간에 무직자, 무능력자로 만들었다. 련이어 들이닥친 처와의 갑작스러운 리혼과 부모들과의 결별은 그를 2평짜리 《쪽방》에 구겨박고말았다.
한창 번성하며 돈을 벌 때에는 살점이라도 베줄듯이 감겨돌던 그 많던 친구들과 지어 친인척들까지도 정작 《재도약》을 위한 밑천을 마련해보려고 애썼건만 누구도 나서주지 않았다. 점차 쇠진해지는 육체속에 방황하는 정신이 나의 친구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한것이다.
40대에 어찌하여 생을 접은것일가. 과연 무엇이 나의 친구를 정신육체적페인으로 만들어 그 지경에 이르게 했단 말인가.
그에 대한 대답을 나는 남조선에서 한달여전에 발표된 《2022년 고독사실태조사자료》와 지난 시기 나온 남조선의 《특수청소부》들의 실상을 폭로한 글들에서 뒤늦게나마 찾게 되였다.
《고독사 사망자는 증가추세이다.》, 《죽음을 준비하는이에게 무관심한 사회의 잔인함에 몸서리쳐진다.》, 《가족의 붕괴에서부터 마음의 병이 시작되였다.》, 《울며 몸부림치는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려줬다면…》…
그렇다. 내 친구의 불행뿐 아니라 남조선에서 해마다 증가하는 《고독사》는 철두철미 사회적무관심과 방임이 낳은 인재이며 이는 그 동네에서 말하듯이 《사회적살인》인것이다.
사회적존재인 인간의 경우 사회관계와의 절교는 사형선고가 아닐수 없다. 그러한 사형선고로 가뜩이나 가난에 쪼들리는 인생들의 정신과 육체는 더욱 일찍 병들게 되여 죽음의 벼랑턱에로 질주하게 되는것 아니랴.
돈에 의해 붕괴된 가족관계가, 금전에만 추종하는 기형적인 사회관계가 인간이 오복의 하나라고 하는 고종명마저 앗아간것이다. 사랑과 인정이 깡그리 말라버려 모든 인간관계가 돈의 함수로 해석되는 인간생지옥인 남조선에서 《고독사》는 사회적질병, 치유불능의 악성전염병으로 더 많은 감염자와 사망자를 기록할것이다.
인간의 파멸, 가정의 붕괴는 곧 사회의 종말로 이어질것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미쳐 남쪽에 사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허나 《서울친구》의 불행에 대한 그들의 응답은 너무도 차거웠다.
역시 사람 못살 곳이라는 생각, 일찌감치 그 땅에 침을 뱉고 떠난 나의 부모들의 선택에 감사한 생각뿐이다.
재중 – 강독 – 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