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3. 카륜회의 -김일성동지회고록《세기와 더불어》 2 제 4 장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

주체111(2022)년 5월 11일 웹 우리 동포

 

6월하순이 되자 동무들은 약속한대로 카륜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카륜에는 이미 우리의 혁명조직들이 들어가있었다. 우리는 1927년경부터 만주각지로 쉽게 래왕할수 있는 교통의 분기점에 활동기지를 하나 만들어둘 필요를 느끼고 공청핵심들을 파견하여 이 일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카륜에서 회의를 하려고 결심하게 된것은 이곳이 교통상 편리한 지점에 자리잡고있다는 점과 회의참가자들의 신변안전과 비밀보장을 전적으로 담보할수 있는 은페된 활동기지라는 점을 고려해서였다.

카륜은 반일운동자들의 래왕이 잦은 고장이였지만 적들에게는 로출되지 않은 곳이였다. 이 고장 인민들이 또한 우리의 일이라면 후원을 아끼지 않았기때문에 회의장소로는 리상적인곳이였다.

내가 카륜에 도착하니 소년탐험대 총대장인 정행정이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내가 카륜에 갈 때면 늘 그가 역에 마중을 나왔다가 나와 동행하군 하였다.

카륜에 와보니 돈화나 길림보다는 분위기가 좀 평온하였다.

5.30폭동이 휩쓸고 지나간 뒤여서 그 당시 간도의 공기는 대단히 험악하였다. 그런데다가 일본군대의 동만출병이 박두한것과 관련하여 정세는 더 긴장해졌다. 일제가 간도에 군대를 들이밀려고 한것은 이 일대에서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혁명운동을 진압하고 만몽을 점령하며 쏘련을 침공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자는데 있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라남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 제19사단 사단장 가와시마중장이 룡정, 연길, 백초구, 두도구지방을 순시하고있었다. 국민당 길림군참모장과 민정청 청장도 때를 같이하여 동만을 시찰하였다.

간도지방의 혁명조직들이 동만으로부터 일본군 중장과 국민당 참모장, 민정청 청장을 내몰라고 호소한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나는 그때 카륜에 가서 진명학교 교원들인 류영선과 장소봉의 집에 숙소를 정하였다.

장소봉은 진명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동아일보》지국장의 일도 겸하여보았다. 그는 차광수처럼 글도 잘 쓰고 식견도 높은데다가 일도 잘하여 동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면 부부싸움을 자주 하는것이 흠이였다.

동무들이 충고를 주면 자기 안해가 지나치게 봉건적인 녀자여서 도무지 뜻이 맞지 않는다고 타발하였다. 장소봉이 가정생활에 취미를 붙이게 하느라고 내가 여러번 설복도 하고 비판도 하였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장소봉은 조선혁명군이 조직된후 무기를 구입하려고 장춘에 나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여 전향하였다. 한때는 나에 대한 《귀순공작》에도 동원되였다고 한다.

카륜을 혁명화하는데서 김혁과 장소봉은 특별히 많은 공로를 세웠다. 그들은 이 지방의 유지들과 힘을 합쳐 학교와 야학을 세우고 그것을 거점으로 교육운동을 벌리였으며 농민회, 청년회, 소년회, 부인회 등 종래의 계몽단체들을 농민동맹, 반제청년동맹, 소년탐험대, 부녀회 등의 혁명적인 조직들로 개편하여 각계각층 군중을 항일혁명의 담당자로 훌륭히 교양육성하였다.

김혁의 주관하에 잡지 《볼쉐위크》가 창간된곳도 바로 카륜이였다.

나는 카륜에 가서도 사도황구에서처럼 조선혁명의 진로를 두고 사색을 계속하였다. 한달가량 사색하고 정리한것을 종합해보니 퍼그나 부피가 큰 글이 되였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것은 우리 나라의 민족해방투쟁이 새로운 지도리론을 요구하고있는 현실적절박성을 뼈에 사무치도록 통감하였기때문이다.

새로운 지도리론이 없이는 혁명을 한걸음도 전진시킬수 없었다.

자주성을 요구하는 피압박인민들의 혁명적진출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세계적규모에서 더욱 더 확대되였다. 지구상에서 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피압박인민들의 해방투쟁이 가장 치렬하게 벌어지고있던 대륙은 아세아였다.

아세아가 식민지민족해방투쟁의 중심무대로 된것은 제국주의자들이 이무렵에 와서 아세아후진국들의 리권을 강탈하기 위한 침략을 더욱 로골화하였기때문이며 동방의 여러 나라 인민들이 과감히 떨쳐일어나 도처에서 민족적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결사적으로 전개하였기때문이였다.

외세를 구축하고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새 사회에서 살아가려는 동방인민들의 정의로운 투쟁은 그 어떤 힘으로써도 멈춰세울수 없었다.

쏘련, 몽골혁명의 약진에 발을 맞추어 중국, 인도, 윁남, 버마, 인도네시아 등 아세아 여러 나라들에서 혁명의 억센조류는 격랑처럼 끓어번지였다. 비폭력불복종운동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인도의 거리에서 방직공들이 붉은기를 들고 시위를 단행한것도 이무렵이였다.

중국인민은 제2차 국내전쟁의 불길속에서 1930년대를 맞이하였다.

중국을 비롯한 아세아 여러 나라들에서 벌어지고있는 혁명투쟁과 국내인민들의 적극적인 진출은 우리를 끝없이 흥분시키고 분발시켰다.

당을 내오고 옳은 지도리론만 내놓는다면 인민을 궐기시켜 얼마든지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승리할수 있다는 자신심이 우리의 마음속에 움직일수 없는 신념으로 뿌리를 내리였다.

이 시기에 와서도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무대에는 각당, 각파의 립장과 리해관계를 대변하는 여러가지 주의주장이 등장하여 대중을 이렇게도 이끌고 저렇게도 이끌고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리론들은 이러저러한 시대적, 계급적 제한성을 면치못하고있다.

그때까지의 민족해방투쟁에서 우리가 그중 높은 형태의 투쟁이라고 본것은 독립군들의 무장투쟁이였다. 이 투쟁에는 민족주의좌익진영에서 가장 적극적인 반일독립운동자들과 애국자들이 참가하였다. 그들이 독립군부대를 조직해가지고 무장투쟁을 시작한것은 독립전쟁을 해야 나라를 찾을수 있다고 믿었기때문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대부대에 의한 군사활동으로써만 독립을 쟁취할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직접적인 테로전술만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쫓아내는 가장 좋은 방도라고 주장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군대를 잘 훈련시켜두었다가 쏘련, 중국, 미국과 같은 강대국들이 일본과 전쟁을 할 때 그들과 련합하여 독립을 이룩하는것이 조선의 실정에 맞는 전략이라고 하였다.

이 모든 주장들은 어느것이나 다 일제와의 혈전을 지향하고있었다.

그러나 독립군의 투쟁은 이러한 초지를 끝가지 관철할만한 과학적인 전략전술을 갖추지 못하였고 독립전쟁을 끝까지 해나갈수 있는 강력하고 세련된 지도부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그 투쟁을 인적, 물적, 재정적으로 뒤받침할수 있는 튼튼한 대중적지반을 꾸리지 못하였다.

개량주의리론가운데서는 《실력양성론》이라는 안창호의 《준비론》이 독립운동자들의 화제거리로 되고있었다.

우리는 안창호란 인물자체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에 일생을 고스란히 바친 청렴하고 량심적인 애국지사로 존경하고있었지만 그의 리론에 대해서는 환영하지 않았다.

상해림시정부의 비폭력적독립운동로선도 대중의 지지와 공감을 받지 못하였다.

상해림시정부가 조직된지 얼마 안되여 사람들의 실망을 자아낸 존재로 된것도 이 단체가 시종일관 한가닥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비폭력적인 외교로선에 매달려 세월을 보냈기때문이였다. 그런것만큼 군사로선을 절대화하고있던 독립군은 이것을 한사코 랭대하였다.

조선을 국제련맹의 위임통치하에 두어달라고 애걸한 리승만의 청원에 대해서는 무슨 로선이라고 말할것도 없으며 민족주의우파가 제창한 《자치론》역시 민족의 독립정신에 배치되는 하나의 몽상에 지나지 않았다.

1925년에 창건된 조선공산당도 조선의 실정에 맞는 과학적인 전략전술을 세우지 못한채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였다.

총괄적으로 말하여 선행세대의 전략이나 로선이 가지고있는 보편적인 약점은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고 외면한데 있었다.

선행세대의 운동자들은 한결같이 인민대중이 혁명의 주인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진리를 무시하고있었다. 수백만대중의 조직된 힘에 의거해야 일제를 타도할수 있겠는데 우리 나라의 반일운동자들은 혁명도 독립전쟁도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 하는것으로 알고있었다.

공산주의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이런 립장에서 기초축성은 별로 하지 않고 몇몇 상층인물들로써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 당을 만들었으며 대중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3인1당, 5인1파식으로 서로 분렬되여 여러해동안 헤게모니싸움을 벌렸다.

선행세대의 로선이나 전략들은 또한 조선의 산 현실에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한 심중한 약점을 가지고있었다.

나는 조선의 산 현실에 부합되는 옳은 지도리론을 내놓자면 고전이나 다른 나라의 경험을 절대시하지 말고 모든 문제를 자체의 실정에 맞게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였다. 지도리론을 마련한다고 하여 10월혁명의 경험같은것을 통채로 받아들여도 안되였고 국제당이 그 어떤 만병통치의 처방을 가져다줄것같이 기대하면서 팔짱을 끼고 앉아있어도 안되였다.

《우리가 믿을것은 인민대중의 힘밖에 없다. 2천만의 힘을 믿고 그 힘을 하나로 묶어세워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혈전을 벌리자.》

나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웨침이 자주 울리였다.

나는 이런 충동을 안고 오늘 우리가 주체라는 이름을 달아서 부르고있는 사상을 보고의 구절구절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보고에 담으려고 한 내용들은 모두 우리 혁명의 전도와 관련되는 심중한 문제들이였다.(전문 보기)

 

[Korea Info]

 

Leave a Reply

《웹 우리 동포》후원 안내
カレンダー
2022年5月
« 4月   6月 »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29
3031  
最近の記事
バックナンバー
  • 2024
  • 2023
  • 2022
  • 2021
  • 2020
  • 2019
  • 2018
  • 2017
  • 2016
  • 2015
  • 2014
  • 2013
  • 2012
  • 2011
  • 2010
  • 2009
  • 2008
  • 2007
  • 2006
  • 2005
  • 2004
  • 2003
  • 2002
  • 2001
  •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