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공노할 왕릉도굴만행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9)
일제의 문화재파괴략탈에서 첫 대상으로 된것은 전국각지에 분포되여있던 각이한 시대의 옛 무덤들이였다.
선조들의 분묘를 알뜰히 보호관리하고 해마다 제사를 정성들여 지내는것은 조선민족의 오랜 풍습이였다.우리 민족은 특히 력대 왕조들의 시조릉에 대한 보호관리와 제사를 중시하였다.우리 인민이 그토록 신성시하고 대대로 보존관리하여오던 력대 왕조들의 릉묘는 일제침략자들의 야만적인 만행으로 무참히 파괴략탈당하였다.
일제침략군에 의한 도굴과 파괴략탈은 청일전쟁, 로일전쟁시기에 본격화되였다.
력사기록에는 《1894년-1895년 청일전쟁시기에 벌써 일본인문화재략탈집단이 대거 침입하였다.1904년-1905년 로일전쟁전후시기에 그들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이나 강화도일대에서 고려고분을 철저히 도굴하였다.》고 씌여져있다.자료에 의하면 청일전쟁때 일제침략군은 릉묘의 형태를 갖춘것은 다 도굴하였다.지어 2차, 3차 들이닥쳐 도굴한 릉묘들도 적지 않았다.한 일본인은 《재일조선문화재와 일본인의 책무》에서 《1904년부터 2~3년동안이라고 하면 마침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터닦기가 진행되고있던 때인데 이 기간에 개성과 강화도, 해주 등에서 고려의 왕릉을 비롯한 약 2 000기의 분묘에 대한 대도굴이 행하여졌다.일본군대는 백주에 공공연히 폭약까지 써서 10만점이 넘는 청자와 그밖의 부장품들을 략탈하였다.》고 그 죄행을 폭로하였다.어느 한 왕릉을 도굴할 때 헌병, 경찰 등 수십명으로 무리를 이룬 침략군 대도굴단은 릉의 째임새에 무식하였으므로 나드는 곳을 찾지 못하여 무덤무지의 북쪽부분을 폭파하고 그안에 들어가 많은 량의 유물을 략탈해갔다.
우리 나라를 무력으로 강점한 후 일제는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을 공포한데 이어 5개년에 걸치는 《고적조사계획》을 발표하였다.이것은 더 많은 옛무덤을 도굴하여 유물들을 략탈하기 위해서였다.
《고적조사계획》이 완전한 략탈적성격을 띠였다는것은 이 계획수행을 위해 조직된 《조선고적조사위원회》의 구성과 행태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일제는 중추원안에 25명으로 구성된 《조선고적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기구의 절대다수는 총독부고관들이였고 전문고고학자는 한두명에 불과하였다.그들은 기구조직후 2~3개월동안에 고려시기의 무덤들을 포함한 수백기의 옛무덤을 파헤치고 수많은 유물을 략탈하면서 아무런 과학적발굴자료도 남기지 않았다.
일제의 악랄성은 조선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을 비롯한 력대 왕조들의 시조릉부터 파헤치고 파괴략탈한데서 뚜렷이 나타났다.그렇게 한 목적이 유적유물들을 략탈하여 저들의 부를 축적하자는데도 있었지만 보다는 시조왕들에 대한 우리 인민의 숭배심을 억제하고 말살하자는데 있었다.
주목하게 되는것은 1909년 일제가 세끼노를 비롯한 어용학자들을 내세워 조선의 옛 건축물, 옛무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실시하던 첫 시기에 벌써 강동의 단군릉에 검은 촉수를 뻗치고있었다는 사실이다.(전문 보기)